지난 5월26일 밤 프랑스 파리에서 스페인 접경 마을 바욘을 거쳐 생장피에드포르까지 가는 기차 안, 한 칸에 여섯 명이 자는데 옆자리 여자의 코고는 소리가 천장을 뜯어냈다. 발치에는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것만 넣었는데도 생존을 위협할 만큼 무거운 8kg짜리 배낭이 놓여 있었다. 바지 한 벌, 윗도리 두 벌, 세탁·세수 등 모든 씻는 일에 쓸 비누 하나, 로션 샘플…. 그뿐인데도 똥자루다. 옆 여자의 코를 뜯어내지 않으면 내 고막이 뜯기겠다는 위기감이 느껴질 즈음, 퍼뜩 아주 본질적인 질문, 떠나기 전에 미리 했어야 하는 질문이 떠올랐다. ‘나 여기서 대체 뭐하는 거지?’
큰 기대는 없었다. 걷는다고 얻을 깨달음이라면 천하의 길치로 인생의 많은 부분을 헤매는 데 보낸 나는 지금쯤 공중부양해야 한다. 근데 왜 그 타향 만리까지 가서 걷기로 했을까? 추측건대 나는 시간이 엄청나게 많았고, 겁이 또 어마어마하게 많았으며, 죽도록 머리 쓰는 걸 싫어했기 때문인 듯하다. 800km를 걸으려면 35일 이상은 걸릴 테니 시간 때우는 데는 딱 맞다. 순례자를 위한 공짜부터 7유로짜리까지 숙소 알베르게가 곳곳에 마련돼 있는데다 순례자들이 떼로 다니니 여행지로서는 가장 안전해 보였다. 지도를 볼 필요도 없이 바닥의 노란 화살표만 따라 힘 닿는 데까지만 걸으면 되니 내 뇌 용량에 제격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그 ‘미친 짓’을 감행한 까닭은 더럽게 행복하지 않아서였던 것 같다. 지난 3월께 이상하게 기사만 쓰려고 하면 허리가 아팠다. 병원에 가면 의사가 고민에 빠진다. “그렇게 아프실 리가 없는데….” 내가 봐도 엑스레이 속 내 척추들 참 가지런하게 줄 맞춰 잘생겼다. 이유 없이 아픈 몸을 보며 나는 행복하지 않은 걸 너무 당연하게 여겨왔다고 생각했다. 행복추구권, 헌법에도 나와 있다던데 왜 행복하지 않은 게 정상이고 아주 드물게 행복한 순간이 특이한 상황이 된 거지? 나는 갖은 야비한 수단을 동원해 휴직을 얻어내기로 결심했다. 휴직과 함께 통증은 사라졌고, 주체할 수 없는 시간을 보내려 들른 서점에서 이 길을 알게 됐다. 남들 가는데 나라고 못 가랴. 여행 경비와 휴직 동안 쓸 생존비를 마련하겠다고 월셋집 보증금을 빼 부모 집으로 밀고 들어간 딸의 등 뒤로 심란한 시선이 꽂히거나 말거나, 나는 멋지게 떠났다. 야심차게 출발했건만, 프랑스 드골 공항에 도착하니 외롭고 초라했다. ‘걸어서 뭐하려고….’
여기서 지금 뭐하는지 모르는 건 다행히 나만이 아니었다. 걸은 지 3일째 되는 날, 23살 레이철은 벌겋게 탄 얼굴에서 허물을 벗겨내며 바닥에 주저앉아 소리질렀다. “제발 다음 마을을 보여줘!” 미국인인 그는 남자친구랑 헤어지기로 한 날 비행기표를 질렀다. 그런데 떠나기 며칠 전 극적인 화해를 했고 타오르는 연정을 뒤로한 채 비행기표의 볼모가 돼 여기까지 날아왔다. 그는 가끔 절대 답을 알 수 없는 나한테 이런 질문을 했다. “나 지금 남자친구 옆에 있고 싶은데 왜 여기 있는 거야?”
절실하게 걷는 사람들도 꽤 있다. 중년의 위기 남녀들이 인생의 전환점을 찾아 이 길을 행군한다. 영국인 던컨(43)은 레스토랑 창업을 한 뒤 고군분투, 겨우 자리를 잡자 앞으로 어떻게 살지 회의가 느껴졌다고 한다. 그랑 같이 걷던 캐나다인 스티븐(52)은 그런 위기가 50대가 되면 또 온다고 불 질렀다. 위로를 찾아 걷기도 한다. 두 번째 이 길을 걷는 루이(70)는 몇 년 전 딸을 교통사고로 잃고 이 길을 걷고 난 뒤 비로소 딸을 보낼 수 있게 됐다. 그레타(66)는 지난해 남편을 잃었다.
이런 갖가지 사연을 지닌 이들의 움직이는 공동체가 카미노데산티아고, 산티아고로 가는 길이다. 처음에 왜 왔느냐 물으면 다들 그냥저냥 둘러대지만, 걷기 중반 정도 돼 던컨이 여자를 한 명 꾀는 데 성공하고, 그레타가 몰래몰래 버스를 타기 시작하고, 레이철이 걸으며 살 빼는 재미에 맛을 들여갈 즈음이면, 마음속 진짜 이유, 상처를 서로에게 드러낸다.
생장피에드포르를 출발해 피레네 산맥을 넘고 첫 알베르게가 있는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나는 그들을 알게 될 줄, 그들 속에서 나를 보게 될 줄, 그게 위로가 될 줄 몰랐다.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는 거대한 홀이었는데 100개가 넘는 침대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옆자리는 중년 아저씨 차지였다. 서로 민망해 등을 마주 보고 자기 시작했는데 새벽녘 눈을 뜨니 아저씨도 구르고 나도 굴러 서로 마주 보는 꼴이 됐다. “에취~.” 아저씨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나를 향해 거대한 침방울을 튀겨줬다. 나는 생각했다. ‘아, 나 여기서 뭐하는 거야?’
김소민 기자 한겨레 지역팀 prettys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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