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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자들의 이유있는 ‘미드’ 선호


보수적 가족주의로 무장한 한국드라마에 비해 동성애·비혼자 등 다양한 개인의 삶 포용하는 미덕 있어
등록 2009-11-12 11:34 수정 2020-05-03 04:25

한국 케이블엔 두 개의 핑크 라인이 있다. 하나는 여성의 상징색 핑크, 다른 하나는 성소수자의 상징색 핑크다. 한국의 지상파가 성소수자에게 하나의 색깔만 나오는 흑백 TV라면, 케이블은 게이와 레즈비언과 트랜스젠더도 가끔은 나오는 ‘무지개 방송’이다. 여기서 미국 드라마(미드)와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보이지 않는 현실을 드러내고, 오지 않은 미래를 보여준다.

태초에 가 있었다, 전세계 성숙한 싱글 여성의 생활교과서가 되었던 엔 주인공 캐리의 게이 친구 스탠퍼드가 나왔다. 캐리를 ‘워너비’(Wannabee)로 여겼던 여성들 사이에 게이 친구 하나쯤 있으면 좋겠단 유행이 한국에도 조용히 번졌다.

‘나도 게이 친구 하나 있었으면’ 유행

<섹스 앤드 더 시티>의 주인공 캐리(가운데)와 그의 게이 친구 앤서니(왼쪽), 스탠퍼드.

<섹스 앤드 더 시티>의 주인공 캐리(가운데)와 그의 게이 친구 앤서니(왼쪽), 스탠퍼드.

그러나 비판도 적잖았다. 등 2000년대 초·중반에 나왔던 미국 시트콤에 등장하는 게이들은 대부분 여성을 ‘위한’ 친구였고, 여성스런 이미지로 그려졌다. 그러나 다양한 미드가 나오면서 상황은 변했다. 1천 개의 얼굴을 가진 성소수자가 등장한 것이다.

남성동성애자 박기호씨는 “최근에 본 미국산 수사물 드라마의 게이는 피해자·가해자·선인·악인 등 다양한 얼굴로 나온다”며 “처럼 과거의 범죄에 새로운 증거가 나와 다시 수사한다는 설정의 드라마에선 공원에서 파트너를 찾는 게이들 같은 1970~80년대 풍경도 나와서 더욱 재밌다”고 말했다. 이렇게 단순히 가시화를 넘어서 교육용 텍스트로 삼을 만한 미드도 있다. 다양한 가족이 나오는 엔 베트남 아이를 입양한 게이 커플도 있다. 한국의 성소수자 단체들이 요구하는 가족 구성권의 미래가 보인다.

패션·요리 등과 관련된 리얼리티 프로엔 성소수자가 넘쳐난다. 의 심사위원이자 런웨이 코치인 제이 매뉴얼처럼 온몸으로 커밍아웃하는 이들도 흔하다. 한국에서 만들어진 리얼리티 프로그램에도 게이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경쟁자이자 심사위원으로 나오는 경우가 적잖다. 이처럼 성소자를 보여주는 방식이 ‘일보일진’하는 케이블과 달리 지상파는 걸음이 더디다. 뜬금없이 화장한 게이가 등장해 남자 주인공을 유혹하는 장면이 나왔던 드라마 처럼 지상파에선 이따금 ‘동성애 혐오적’ 장면이 나온다. 최지은 기자는 “케이블이 한 발 나가면 지상파가 두 발 뒤로 물린다”고 비판했다.

여성 특히 비혼은 미드에서 위안을 얻는다. 상당수 한국 드라마가 여전히 보수적 가족주의로 귀결되는 반면에 미드엔 그래도 다양한 라이프 스타일이 나오기 때문이다. 강은정 작가는 “ 같은 미드는 시청자의 안방에 들어온 것으로 끝난 게 아니라 라이프 트렌드와 사랑 방식도 바꿨다”고 말한다. 은 뉴욕 사립학교에 다니는 10대의 상류층 생활을 보여주고, 에선 일도 사랑도 놓치지 않으려는 20대 청춘들이 병원 안에서 방황한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꾸는 샬롯도,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고 싶은 사만다도 에선 그저 각자의 삶을 살 뿐 누구의 인생에도 정답은 없다. 여성들이 미드에 빠진 건 보기 좋은 화려한 생활 뒤에도 진지한 삶의 철학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정답 없는 다양한 삶의 모습들 보여줘

하지만 유독 한국 사회에선 젊은 여성을 겨냥한 장르인 ‘칙릿’이 ‘된장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강은정 작가는 “명품 소비나 자유로운 섹스 라이프 같은 껍데기만 보고 한국적인 정서에 없는 인간적인 태도나 포용 같은 알맹이를 보지 못해 벌어진 일”이라고 지적한다. 미국화된 문화를 받아들이는 성숙도는 케이블이 미드를 받아들이는 속도를 따라오지 못했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한국예술학)는 “미드에 담긴 쿨한 관계는 봉건적 가부장제로 귀결되기 십상인 한국 드라마가 주지 못하는 위안을 비혼 여성들에게 준다”고 말했다. 그러나 1980년대 미국 문화에 심취한 여성을 ‘자유부인’이란 퇴폐적 이미지로 단죄했던 것처럼, 오늘도 ‘된장녀’란 비난으로 훈계하는 목소리는 그치지 않는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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