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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만능에 가까운 그의 비애

<흑집사> 세바스찬
등록 2009-10-23 11:28 수정 2020-05-03 04:25
〈흑집사〉

〈흑집사〉

“팬텀 하이브가의 집사 된 자, 이 정도도 못해서 되겠습니까?” 완벽한 외모의 그 남자가 놀라운 활약을 벌인 뒤 카리스마 넘치는 대사를 내뱉는다. 선생님 몰래 만화책을 넘기던 소녀들은 까악~ 소리를 지를 게 분명하다. 그러나 똑같은 장면 앞에서, 나의 온몸엔 오스스 닭살이 돋고 내 배는 찌릿찌릿하게 당긴다. 웃는 내가 잘못된 건가? 여러분이 심판해주시기 바란다.

만화 의 세바스찬. 국내 팬들은 줄여서 ‘바스찬씨’라고 부르는 이 남자는, 19세기 말 영국의 세력가인 팬텀 하이브 가문의 어린 후계자 시엘을 보필하고 있는 집사다. 아침에 도련님을 깨워 옷을 갈아입히고, 세계 곳곳에서 오는 손님들과의 약속을 상기시키고, 집안 곳곳의 일들을 챙기는 등 그야말로 완벽한 집사의 표본이다. 게다가 때때로 시엘에게 달려드는 불한당, 유괴범, 심지어 마계의 존재들도 물리치는 놀라운 능력의 소유자다.

이제 나도, 여러분도, 만화가도 같은 생각일 것이다. 이렇듯 결점이라곤 찾아보기 어려운 주인공을 그냥 두고 볼 건가? 이제 그를 시험에 들게 하자. 물론 외견상 마법 미스터리 액션 판타지로 달려나가는 듯한 이 만화에는 그의 능력을 시험하는 온갖 실력자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우리가 즐거워지는 정도는 ‘그가 맞닥뜨리는 상대가 강할수록’이 아니라, ‘그가 맞닥뜨리는 상황이 터무니없을수록’ 커진다.

사실 집사의 가장 강력한 적들은 집 안에 있다. 툭하면 사고를 저지르는 도련님 시엘은 제쳐두자. 어차피 주인이니까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두자. 안 그래도 이런 주인공들은 비운의 과거를 지니고 있고, 엄마 없이 사는 것도 외롭고, 온갖 콤플렉스에 싸여 있는 거니까. 문제는 바스찬씨를 도와 집안일을 꾸려가야 할 식솔들이 하나같이 엉망이라는 사실이다.

덜렁대는 성격으로 그릇 깨는 게 취미인 하녀 메이린, 요리를 굽거나 익히는 것보다는 태우는 데 재능이 많은 요리사 바르도, 순수 그 자체에 상냥함이 넘치지만 정작 풀만 손에 대면 죽여버리는 정원사 피니, 그리고 최연장자로 이 모두를 통솔해야 하지만 언제나 홀홀홀 웃으며 홍차나 마시는 할아버지 다나카 등… 이 모든 무능력자들이 만들어내는 온갖 사고들을 수습하며 도련님이 편안히 잠들 때까지 임무를 다하는 바스찬씨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능력자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만화는 집 안의 사소한 사건들을 다루다 점점 스케일을 키워간다. 영국의 운명을 걸고, 인간계와 마계를 오고 가며, 온갖 초자연적인 능력들로 불꽃을 튀긴다. 저변에 깔린 개그 터치도 그에 걸맞게 뻥튀기를 한다. 우리의 흑집사는 거대 마견을 길들이기 위해 당근과 채찍을 거듭하다 과격한 포옹으로 지층을 뚫고 온천수맥을 터뜨린다. 붉은 집사와 사신(死神) 사이를 오가는 그렐은 “이래 봬도 집死 DEATH☆”라고 주장하며, 연방 변태적인 추파를 발산한다. 집사가 없는 우리의 세계는 평화롭구나.

이명석 저술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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