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보따리를 챙길 때가 왔다. 효녀·효자들은 고향집에 어떤 선물을 챙겨갈까 고민이겠지. 하지만 내겐 10시간이 넘을지도 모르는 귀향 버스 속에서 버틸 일이 더 걱정이다. 10년 전엔 어떻게든 만화책을 꾸역꾸역 가방에 넣어가곤 했다. 거북이걸음을 하는 고속버스에서 지겹도록 MP3를 되돌려 듣기도 했고, 친구의 자동차 조수석에서 혼자 닌텐도 게임에 빠졌다가 절교 선언을 당할 뻔하기도 했다. 그래도 세상은 좋아졌다. 이제는 얇은 노트북에 어떤 영화와 드라마를 담아갈까 고민하는 시대에 이르렀다.
올해 나의 선택은 (30Rock)이다. 미국 에서 자사의 유명 코미디 프로그램 의 제작 현장을 모델로 만든 코미디 드라마로, 지난 9월20일 에미상 시상식에서 3회 연속 코미디 부문 최우수작품상을 받았다. 더불어 각본상·남우주연상까지 도합 3관왕을 차지했으니 제품의 품질을 보증받은 셈. 그러나 이들이 내 귀향길의 동무가 된 이유는 나만큼이나 독한 주인공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라는 제목은 가 입주해 있는 맨해튼의 ‘서티 록펠러 플라자’에서 따왔다. 이 빌딩에서 가상의 코미디쇼인 ‘걸리 쇼’를 만들고 있는 수석 작가 리즈 레몬, 말썽 많은 출연진과 스태프들, 그리고 새로 부임한 부사장 잭 도너히가 그 주인공들이다. 노처녀 스트레스에 회사 내의 문제로 머리가 어지러운 리즈, 차기 사장을 노리며 무데뽀로 사원들을 압박하는 보수 꼴통 잭을 양축으로 해서 하나같이 엉뚱하고 과격한 인물들이 뒤엉켜 난장판을 벌인다.
그래도 귀향길이어서인지 가족과 고향에 대한 에피소드들에 먼저 손이 간다. 어느 날 리즈는 고향 학교의 홈 커밍데이를 찾아가, 자신이 뉴욕에서 성공했다는 걸 내세우며 친구들 앞에서 주름을 잡는다. 그런데 웬걸 모두 그녀의 출현이 반갑지 않다. 알고 보니 어릴 때부터 온갖 독설로 친구들의 가슴을 후벼팠던 것. 고향이 그립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거기와는 맞지 않는 운명이었나?
잭은 언제나 어머니 콜린의 등쌀에 괴로워한다. 어느 크리스마스에는 선물 공세를 편 뒤 일찌감치 벗어나보려다 자동차로 어머니를 치어 연휴 동안 자신의 집에서 보살펴야 하는 가혹한 상황에 처한다. 더욱 괴로운 것은 사고 뒤 응급실에 바로 전화를 하지 않고 잠시 지체했던 것. 혹시 그녀가 죽기를 바란 게 아니었을까 자책하는데, 어머니는 사고 때 깨져 멈춘 시계와 응급실 호출 전화 사이의 지체된 시간을 밝혀내고 아들을 압박한다. 그렇다고 콜린은 온전한 가족주의자냐? 그녀는 또 다른 크리스마스에 너무나 다정한 리즈의 가족을 찢어놓으려고 아등바등댄다.
의 재미는 작가와 등장인물은 물론 방송사와 광고주까지 대놓고 찔러대는 독한 자학에 있다. 가족 때문에 괴로워하지만 또한 가족 없이 혼자 있다 죽어버리는 악몽에 시달리는 현대인의 아이러니 역시 가혹하게 비튼다. 나만 괴로워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이명석 저술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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