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 믿는데, 좋은데, 갖고 싶은데 뭔 상관이야.”
그 말에 눈에 하트를 띄운 누나들이 답한다. “그러게, 내 말이~♡.” SBS 주말 드라마 에서 환(이승기)이 은성(한효주)에게 기습키스를 하기 전에 내뱉은 이 대사 한마디가 TV를 보던 누나들의 심장에 날아와 박혔다. 날카로운 얼음 송곳이 얼음을 뚫듯, 환의 대사는 은성을 자신인 양 감정이입하고 있던 여성 시청자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대사 뒤 이어진 구름다리 위 키스신에 입이 헤 벌어진 건 그 다음이다. 해돋이를 배경으로 두 사람이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는 이 장면은 다음날 회사에서, 학교에서, 주부들의 모임에서 뜨거운 화젯거리였다.
이승기는 요즘 의 ‘F4’ 인기가 부럽지 않다. 이 시청률 40%를 넘어 ‘국민 드라마’ 반열에 올랐고, 한국방송 역시 20%대 시청률로 예능 순위 1위다. 드라마 삽입곡으로 쓰인 디지털 싱글음반의 타이틀곡 도 온라인 음원차트 1위를 차지했다. 배우·예능인·가수로 그는 요즘 인기 상승세다. 인기의 지표를 광고로 볼 때, 이승기가 권하는 냉면·맥주·음료수 등을 다 먹으려면 과식해야 한다.
지난 7월22일, SBS 탄현 스튜디오에서 드라마 촬영 중인 그를 만났다. 종영을 2회 앞둔 시점에서 막바지 촬영이 한창이었다. TV 밖에서 본 그는 화면보다 볼살이 홀쭉했다. 피곤한듯 눈도 붉게 충혈돼있었다. 스트로베리 슬러시가 그 앞에 놓여있었다. 왠지 그와 잘 어울렸다. 종영을 앞둔 소감을 물었다. “시원섭섭해요. 오늘 스태프들과 짬을 내 기념촬영을 했거든요. 그러고 나니 드라마가 끝나는구나 실감이 나더라고요. 드라마 출연을 결정할 때만 해도 막연히 작품이 좋으니 시청률도 좋겠지 했는데, 이렇게까지 인기가 있을 줄은 몰랐어요.” (웃음)
남자다움 표출할 수 있는 첫 배역이승기가 연기하는 환은 전국에 체인점을 둔 기업형 설렁탕집의 손자다. 어릴 때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어두운 과거를 가진 그는 미래도 없이 제멋대로 사는 인물이었다. 능력 있는 할머니 덕에 호의호식하다 은성이를 만나면서 뒤늦게 철이 든다. 5년 전 가수로 먼저 데뷔할 때 를 부르며 누나를 찾던 고등학생은 3년 전 한국방송 드라마 에서 철없는 대학생 유부남으로 나오더니 이번 드라마에서는 까칠한 준재벌로 변했다.
“정극에서 주인공은 처음이에요. 책임감도 생기고 긴장도 되더라고요. 환은 어린 왕자나 철부지 같던 제 기존 이미지와 달리 남자다움을 표출할 수 있는 배역이라 대사 톤 등을 연구하며 캐릭터를 만들었어요. 처음엔 연기 지적도 받았지만, 지켜봐준 분들 덕분에 잘 마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사실 그의 연기는 그가 말한 대로 덜 익은 과일처럼 풋내가 나기도 한다. 문화방송 시트콤 로 연기를 시작해 까지 5년 동안 필모그래피에 새긴 작품이 단 3편. 연기 공력을 채우기엔 부족한 수다. 하지만 그는 극 초반과 달리 결말을 향해 갈수록 달라진 모습을 보여줬다. 그에게서, 그가 맡은 배역에서 ‘남자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연기자로 훌쩍 클 수 있을 것 같은 가능성이 보였다.
“짧은 대사 한 줄도 감정 전달을 잘하려고 신경썼어요. 해돋이 키스신에서 한 ‘내가 너 믿는데~’ 같은 대사도 잘못하면 느끼하거든요. 몇 글자 안 되는 대사지만 연습을 많이 했죠. 다행히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시니까 이번 드라마에서 ‘잘한다’까지는 아니어도 ‘연기자로 큰 손색 없다’는 평가를 받은 것 같아 기뻐요.”
팬들이 사랑하는 이승기의 장점 중 하나는 그가 뭐든 ‘열심히’ 한다는 거다. 빡빡한 드라마 촬영 중에도 그는 지방 촬영을 가는 ‘1박2일’에 빠진 적이 없다. 보통 배우들이 드라마나 영화 촬영에 들어가면 고정 출연 중인 프로그램에서 하차하는 것과 달리 그는 벌써 2년 가까이 한 달에 두 번씩 ‘1박2일’ 촬영을 떠난다. 체력적으로 힘들 법한데 오히려 ‘1박2일’ 촬영에서 힘을 얻어온다고 했다.
“드라마 촬영 분량이 많아질수록 힘들었던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게 체력적으로 힘든 거지, 정신적으로는 큰 힘이 돼요. 그리고 하차할 수도 없어요. (2020년까지) 장기 계약이 돼 있잖아요.” (웃음) 농담을 던지고 그는 말을 이었다. “‘1박2일’ 식구들은 의리로 뭉쳐 있어요. 팀워크가 끈끈해요. 그리고 가장 인기 있는 예능 프로그램인데, 오히려 제가 출연하는 게 영광이죠.”
‘1박2일’에서 이승기의 별명은 ‘허당’이다. 뭐든 열심히 하는 캐릭터가 늘 어설프고 어수룩해서 만들어진 별명이다. 아이돌 스타다운 신비감 대신 형들과 어울려 노는 막내동생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친근함을 느꼈다. 머리맡에 카메라가 있으면 떨어질까 무서워 잠을 못 자는 예민한 성격도, 우기기 좋아하는 고집도, 지는 건 참지 못하는 승부사 기질도, 있는 그대로 좋아해줬다. 이승기는 “프로그램에서 보여주는 모습 그대로가 나”라면서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가짜를 보여줄 수 있다면 연기대상감”이라고 말했다. 출연 초반만 해도 자기 전 세수를 빼놓지 않던 ‘깔끔 승기’는 이제 차가운 땅바닥에서도 잠 잘 자는 ‘노숙 승기’가 됐다. 지금껏 촬영하면서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선크림을 꼬박꼬박 바르는 것 정도. 그래도 땡볕에서 피부가 타는 걸 막을 수가 없다. 가까이에서 본 그는 TV 화면보다 까맸다.
바탕엔 ‘허당’다운 친근함과 성실함이지금이 그의 전성기라고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는 늘 인기가 있었다. 인기 화살표가 오르내림을 반복하는 굴곡이 없었다. 데뷔한 뒤 그가 내놓은 음반과 출연한 드라마들은 모두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엄친아’로 통하는 그의 인생 역정에도 굴곡은 없어 보인다. “슬럼프가 있긴 했냐”는 질문에 그는 “있다, 없다”로 답하지 않았다. 진지한 표정으로 꼬았던 다리를 풀었다. “1등을 하고 싶어도 결과가 안 나오면 누구나 아쉽고 그렇잖아요. 저도 그래요. 사람들은 지금이 최고라고 평가하지만 저는 늘 똑같거든요. 지금 빛이 날 뿐이죠. 그래서 아직 제가 1등이 아닌 것 같아요. 이번 작품을 통해 열심히 하면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진리를 확인했으니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죠.” 외부 평가와 상관없이 그 안에서는 굴곡이 많았다는 우회적인 답변 같았다.
드라마 촬영이 끝나면 그는 4집 음반 준비에 들어간다. 발라드 가수답게 서정적인 음악들이 많겠지만, 기존 음반과 다르게 비트가 빠른 곡이나 애절한 노래들을 수록할 계획이다. 처럼 여자에게 프러포즈하는 음악이 또 실릴지는 모른단다. “하반기 안에 음반을 낼 생각이라 쉬지 못할 것 같아요. 음반 활동도 안했는데 로 많은 사랑을 받았으니 그 사랑을 돌려드리기 위해서라도 바쁘게 움직여야죠.”
“가수로는 이선희, 연기자로는 김명민, 예능인으로는 강호동이 롤모델”이라는 이승기. 그는 “인기는 누리는 것이 아니라 돌려주라고 있는 것 같다”며 신인 같은 대답으로 인터뷰를 마무리하고 드라마 촬영장으로 사라졌다. “내가 너 믿는데, 좋은데, 갖고 싶은데~”라는 대사를 그에게 들려주고 싶은 유혹을 애써 눌렀다.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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