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여권에 도장깨나 찍었나 보다. 비행기에 대한 풋풋한 로망은 트렁크 제일 밑에 구겨져 있으면 다행이다. 여행 뒤에 비행기에 대한 기억이 없을수록 그 항공사의 점수가 올라간다. 얼마 전 미국 뉴욕에서 돌아올 때 환승 지연으로 공항 좌석버스 막차를 놓치고, 화물칸 어디에 바퀴 하나를 떨어뜨린 22.9kg짜리 트렁크를 빗길에 질질 끌고 온 나로서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마음먹었다. 한동안은 비행기는 쳐다보지도 말자. 그런데 돌아와서 처음 본 영화가 다.
시놉시스를 보니 멀미 나는 비행기 영화도 이렇게 제대로 울컥울컥하는 게 있을까 싶었다. 호랑이 같은 기장 옆에서 승급을 시험당하고 있는 부기장, 첫 국제선 탑승에 들떠 있지만 업무 처리는 엉망인 풋내기 승무원, 온갖 말썽거리를 몰고 다니는 승객들… 심지어 사고로 인한 긴급 회항을 다루었다나?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비행이지만, 단 하나의 이름이 나를 끌고 갔다. 야구치 시노부다.
요즘 영화에서 정말 찾아보기 어려운 ‘억지 없는 유쾌함’의 보증수표. 와 에 완전히 감염된 나로서는 그의 이름 하나만 믿고 찾아가기로 했다. 덕분에 지난 비행들에서 차곡차곡 누적된 짜증을 제법 벗겨낼 수 있었다.
곱씹어보면 에서는 전작에서 만났던 제대로 배꼽 터지는 폭소탄은 만나기 어려웠다. 우에노 주리를 비롯한 여학생 4총사와 같은 캐릭터의 강렬함도 부족했고, 슬랩스틱도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항공기를 둘러싼 여러 직업군의 생활을 꼼꼼히 소개하는 ‘직업의 세계’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슬금슬금 웃음의 요실금을 만들어내는 야구치 시노부의 솜씨는 대단했다. 영화관을 나올 때에는 제법 축축해져 있는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그래, 이런 웃음도 참 좋구나.
는 대놓고 코미디라고 하기엔, 상황들이 대단히 진지하고 개연성 있다. 1980년대 재난 영화를 패러디한 과는 색깔이 전혀 다른 셈이다. 그럼에도 이런 섬세한 리얼리티 속에서 배어나는 웃음은 또 다른 맛이다. 좌석 배치와 승객 탑승 관리를 담당하는 직원들은 참 개성 있는 얼굴로 개성 있는 웃음을 주었고, 기상이나 관제탑 관계자들의 세계도 리얼리티가 넘치면서 즐거움을 주는 인물들로 채워져 있다. 항공기 사진을 전문으로 찍는 중년 비행 마니아와 공항 직원의 사진을 전문으로 찍는 청년 비행 마니아들의 비교도 재미있었다.
최고의 웃음 포인트는 아무래도 부기장의 기장 승급을 평가하는 심사원을 맡고 있는 기장. 그는 시종일관 무뚝뚝하고 냉정하게, 특히 스튜어디스들에게는 지나치게 권위적으로 행동하면서 무언가 악역을 맡을 것 같다. 위기 상황에서조차 웃음을 내보이며 독사 같은 냉정함을 내보인다. 그러나 “나는 이럴 땐 일단 웃습니다”라며 어색한 웃음을 짓는 그 연기라니. 스스로의 불안조차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그 인간적인 모습에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이명석 저술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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