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실직자의 가짜 웃음, 진짜 웃음

등록 2009-04-30 08:34 수정 2020-05-02 19:25
<번 노티스> GLENN WATSON

<번 노티스> GLENN WATSON

여기저기서 툭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오이나 사과면 옳다구나 하며 주워서 챙기겠지. 대책 없이 떨어지는 게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괴롭다. 결혼식을 눈앞에 둔 조선회사 직원이 잘리고, 10년 이상 피땀 바친 중견 기업의 과장이 내몰리니, 온갖 비정규직은 말할 것도 없다. 그나마 공무원은 나을까? 국가 직영의 특수 임무를 수행하던 스파이 하나가 어느 날 갑자기 해고 통지(번 노티스)를 받은 뒤에,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상황에 내몰린다.

케이블을 점령하고 있는 미드 중에는 처럼 작정하고 웃기는 시트콤들도 있지만, 처럼 진지한 척 드라마를 이끌어가면서도 쉴 새 없이 배꼽을 홀리는 족속들이 있다. 요즘은 남아프리카에서 먼지 나게 얻어맞은 뒤 마이애미로 떠밀려온 의 실직 스파이 마이클 웨스턴이 단연 압권이다. 퇴직금이나 실업급여는커녕 통장과 카드조차 정지. 이렇게 무일푼인데다 FBI에게 쫓겨 어디든 옮겨다닐 수도 없는 신세다. 게다가 하필이면 마이애미야. 여기에는 그가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질긴 관계들이 있다.

“오랜만에 왔는데 문이 잠겨있더라고. 그래서 부수고 들어왔어.” 옛 애인 피오나는 외모와는 달리 총기 마니아로 그를 돌봐주는 척 스파이 놀이에 열심이다. 꼬마와 군인 인형을 가지고 놀면서 밀리터리 오다쿠의 열변을 토하는 것은 애교로 봐주자. 가장 괴로운 점은 미국 남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캐릭터인 “엄마와 매일 통화하는 여자친구” 놀이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 엄마가 더욱 보통이 아니다. 기 센 어머니는 하루에도 수십 통씩 잔소리 전화를 해대고, 지난 크리스마스에 오지 않았다는 죄로 평생을 구박해댈 작정이다. 하나밖에 없는 친구인 샘조차 FBI에 마이클의 정보를 흘리는 족속이다.

나는 자꾸만 1980년대를 떠올린다. 같은 원조 미드의 전성시대 말이다. 요즘은 처럼 첨단 과학에 의존해 잘난 척해대는 주인공들이 대세이지만, 그때는 뭐든지 몸으로 부딪히는 해결사들에 열광했다. 는 명백히 그 시대 드라마에 대한 패러디다. 중요한 순간에 나오는 정지 영상 같은 연출도 향수를 이끌어낸다.

우리는 탈냉전 시대에 국가로부터 배신당한 또 다른 스파이들을 알고 있다. 과 시리즈의 주인공들은 자신을 배신한 조직에 철저한 복수를 행한다. 그러나 이 불쌍한 마이클은 서글픈 생계밀착형의 삶에 붙잡혀 있다. 이 해결사 드라마를 블랙코미디로 만드는 가장 중요한 장치는 마이클의 내레이션들이다. 툭하면 무기를 집어던지며 죽일 듯이 싸우는 친구들 사이에서 생각한다. “스파이들이 파티를 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 각자 꼬인 일이 하나씩은 있으니까.”

의 아이콘은 마이클의 이빨이다. 그는 거짓 웃음으로 점철된 사나이다. 한때 아프리카의 군벌과 남미의 마약상을 속이기 위해 내보이던 그 웃음을 이제 자기를 괴롭히는 재미로 사는 엄마와 옛 애인에게 내보여야 한다. 그러나 그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의 일을 해결해준 뒤에 내보이는 이빨은 진짜 웃음이다. 내가 실직한 친구들에게서 다시 보고 싶은 웃음이다.

이명석 저술업자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