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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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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말 없이 기다릴 뿐이건만

수탈과 다툼의 역사 간직한 노고단과 망국의 한을 품은
정령치에서 별꽃과 얼레지를 보다
등록 2009-04-24 18:41 수정 2020-05-03 04:25

꽃을 만났다. 노고단을 등 뒤로 두고 종석대로 오르는 길, 따듯한 돌에 기대어 꽃은 피었다. 새끼손톱보다 작은 5개의 꽃잎. 별꽃이다. 언제 피었다 언제 지는지 모르게 피고 지는 이 작은 꽃은 산 아래 이미 흐드러진 벚꽃처럼 요란하지 않으나 신비롭다.
푸르렀던 어느 시절, 가슴 설레게 하던 이로부터 별꽃의 내력을 들었다. 사람과 신과 짐승의 영역이 따로 없던 옛날, 신은 밤하늘에 별을 달았다. 그리고 말했다. “힘들면 언제든지 땅으로 돌아가렴.” 버티고 버티다 결국 힘에 겨워 하나둘 떨어지는 별들이 안타까워 신은 별들에게 꼬리를 달아주었다. 어느 곳에 떨어지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었다. “말해보렴. 밤을 예쁘게 하느라 힘들었으니 그 보답으로 소원을 들어주마.” 별이 답했다. “떨어지는 우리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소원을 한 가지씩 들어주세요. 착한 소원만….” 별들의 마음이 갸륵해 신은 별들에게 땅에서 꽃으로 살게 했다.

노고단에 남아 있는 외국인 선교사 시설 잔해. 호텔과 수영장, 테니스장을 비롯해 58동의 건물이 있었지만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모두 파괴됐다. NIKON D90, NIKKOR18-200,F/5.6, ISO 200, 1/500s

노고단에 남아 있는 외국인 선교사 시설 잔해. 호텔과 수영장, 테니스장을 비롯해 58동의 건물이 있었지만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모두 파괴됐다. NIKON D90, NIKKOR18-200,F/5.6, ISO 200, 1/500s

선교사 휴양시설 빽빽히 들어섰던 노고단

별꽃이 핀 자리에서 지나온 길을 본다. 구름을 잔뜩 껴안은 하늘을 지탱하는 노고단의 비탈이 넉넉하다. 우리 민족 창조주로서 마고할미의 집은 비탈 어디엔가 있을 것이다. 마고는 탁월한 능력과 거대한 몸집을 가진 창조주이면서도, 자기가 창조한 피조물에게서 신성을 박탈당하며 욕심 많고 사나운 할망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천왕봉의 성모 설화와 마고 설화는 얽히고설켜 때로는 8도 무당의 어머니가 되고 때로는 신라 박혁거세의 어머니로서 신화의 조연으로 전락하기도 하지만, 노고(老姑)는 할미의 다른 말이고 할미의 어원은 ‘한+어미’에 있으니 마고는 비록 화석으로나마 노고단의 비탈 어디엔가 어떠한 모습으로라도 존재할 것이다.

하늘에 가까워 청량하면서도 풍부한 수량과 완만한 경사를 가진 탓에 노고단은 일찍부터 사람으로부터 수탈을 당해온 땅이다. 멀리 신라시대에는 화랑들의 훈련장이 있었으며 조선시대에는 화전이 행해지기도 했다. 일제시대인 1922년 움막으로 시작한 외국인 선교사 휴양시설과 종교시설은 1928년 18채의 석조건물이 지어지는 등 빠르게 증가해 모두 58동의 건물들이 노고단 비탈 곳곳에 들어섰다. 낯선 기후와 풍토로 병에 걸리기 쉬운 외국인 선교사들은 노고단에서 여름의 무더위를 견뎌냈다. 선교사들은 산 아래 화엄사 입구에서 지게나 가마를 타고 산을 올랐다. 제 몸집보다 배는 더 큰 선교사들을 가마에 태우고 지게에 지고 산을 올랐을 옛사람들의 모습은 우리가 간혹 TV를 통해 보는 히말라야의 셰르파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호텔에 전깃불에 풀장과 테니스장까지 갖춘 시설 속에서 외국인들은 ‘비서양인 출입금지’ 팻말을 내걸고 자신들만의 세계를 만들었다. 산 아래 마을에는 ‘서양인 출입금지’ 팻말을 내걸었지만 무너지는 자존심을 위로하는 수준을 넘지는 못했다고 한다.

선교사들을 위한 건물은 이후 빨치산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고 그 탓에 한국전쟁 와중에 폭격과 방화로 대부분 무너지고 사라졌다. 남아 있던 흔적들도 국립공원관리공단의 복원 계획에 따라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다.

한기총 문화재보호구역 신청에 논란 커져

상처는 아물어도 흉터는 지워지지 않는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노고단의 외국인 휴양시설 터에 대해 문화재보호구역 지정 신청을 하면서 다시 논란이 일고 있다. 한쪽에선 성경을 번역한 장소로서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고, 다른 쪽에선 오래도록 불교의 성지인 노고단에 있는, 다른 종교의 휴양시설에 지나지 않는 시설 터를 문화재로 지정하는 것이 옳으냐고 반박한다. 논란은 아직 찻잔 속의 태풍에 지나지 않지만 우려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지리산의 봄은 더디게 온다. 왼쪽부터 별꽃, 얼레지, 제비꽃, 현호색.

지리산의 봄은 더디게 온다. 왼쪽부터 별꽃, 얼레지, 제비꽃, 현호색.

노고단은 지금 복원에 성공한 대표적 지역으로 손꼽힐 정도로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다. 내 나라 내 땅에서 발길을 차단당하는 불편을 감수한 덕이다. 문화재 지정에 반대하는 쪽은 지정이 되면 뒤따를 시설 복원 조처를 우려하고 있다. 산은 말이 없고 행동하지도 않는다. 다만 기다릴 뿐이다. 신의 거처로 숭배받던 노고단은 제가 품었던 제 사람들에게 폭격까지 받는 수난을 당했고 다시 제 모습을 찾아주려는 정성을 받고 있다. 복원을 위해 노고단 정상으로 오르는 발길을 차단한 게 벌써 15년째다.

불편 감수하고 욕심 덜어내는 게 공존의 길

철거해야 할 사람의 흔적은 노고단 비탈 곳곳에 여전하다. 성삼재에서 노고단으로 오르는 도로가 있는 탓에, 어머니의 쪽진 머리 가지런한 가르마 같았던 능선 길은 이제 파마머리처럼 흐트러지고 있다. 갈대밭에 지나지 않은 비탈도 머지않아 철쭉이 자라고 신갈나무가 자라고 가문비나무들이 자라 다시 숲으로 돌아갈 것이다. 공존의 길은 내 불편을 감수하고 내 욕심을 덜어내는 데서 출발한다. 별꽃의 내력에서 신의 측은지심과 꽃의 무량자비심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성삼재로 내려와 한숨을 돌린다. 걷히지 않는 연무 속에서 작은고리봉~만복대~정령치로 이어지는 길은 희미하다. 걸어온 길은 반야와 노고의 몸집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성삼재는 마루금이 사람의 편의를 위해 동강난 첫 현장이다. 정령치 고갯길과 함께 군사 목적으로 만들어진 도로는 확장과 포장을 거쳐 관광도로로 이용되고 있다. 끊어진 생태축을 연결하기 위해 폐쇄해야 한다는 환경단체의 주장은, 전남 구례와 전북 남원의 사람들에게는 수용하기 어렵다. 스러져가는 농촌 현실에서 관광은 지역경제가 지탱할 유일한 대안이기 때문이다. 경남 산청군이 지리산을 오르는 케이블카를 설치하자고 주장하는 이유도 관광수익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삼재 아래, 하늘 아래 첫 동네의 현실은 지역의 기대가 현실화될지에 의문을 갖게 한다. 자동차를 이용하는 관광 형태가 보편화되면서 숙박과 식사 손님이 과거에 비해 턱없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정 장군상’으로 불리기도 하는 정령치 개령암지 마애불상군의 석불. 백두대간이 지리산 주능선과 헤어지는 고리봉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정 장군상’으로 불리기도 하는 정령치 개령암지 마애불상군의 석불. 백두대간이 지리산 주능선과 헤어지는 고리봉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길을 서둘러 대간을 탔다. 정령치의 정 장군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정령치로 이어지는 대간길은 순하다. 산죽밭으로 난 길을 걷노라면 산죽 잎새가 바스락바스락 이야기를 건네온다. 시야도 좌우로 트여 오른쪽으로 반야봉과 지리산의 능선이 올려 보이고 왼쪽으로는 지리산 자락의 마을들과 운봉평야가 한눈에 조망된다.

지리산의 만복을 갖고 있다고도 하고 오르면 만복을 받는다고도 하는 만복대로 오르는 길, 하얀 동아줄이 갈 수 있는 길과 가면 안 되는 길을 가른다. 지리산 최대의 억새 군락을 보호하기 위한 조처다. 수십만 평은 족히 될 넓은 억새밭은 지리산이 아니고서는 보기 힘든 풍광이다. 그러나 막상 정상에 올라서 터지는 탄식을 어찌할 수 없었다. 정상 돌탑이 사라진 탓이다. 자연에 의해 무너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 의도를 갖고 무너트린 듯 탑이 있던 자리는 아예 평탄했다. 2007년까지만 해도 있었던 탑인데…. 사람들은 지친 발길을 잠시 쉬며 돌탑 위에 돌 하나를 더 얹어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거나, 누군가를 위한 기원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 소중한 시간을 누가 왜 가져갔을까?

억새풀 평원 만복대 돌탑은 누가 없앴을까

정령치를 향해 내려서는 비탈에서 반가운 손님을 맞는다. 얼레지가 꽃대를 밀어올리고 있었다. 부지런한 놈들은 가지가지에 초록을 내민다. 아직은 오므린 잎새로 하늘을 향해 조심스럽지만 거침없이 자라는 초록은 아기의 손을 닮았다.

정령치는 성삼재와 함께 지리산을 관통하는 도로가 지나는 곳이자 마한의 마지막을 담고 있다. 기원전 78년 마한은 진한에 밀려 뱀사골 달궁계곡 별궁으로 쫓겨왔다. 달궁이 전설에서 역사로 드러난 것은 1928년. 그해 7월 대홍수가 지리산을 휩쓸면서 달궁터를 덮고 있던 흙을 씻어냈다. 그때 지금의 주춧돌과 지름 1.5m에 이르는 질그릇 시루, 청동제 수저 수십 벌, 구리거울, 활촉 등도 출토됐다. 그러나 그 유물들은 일본 순사들이 어디론가 가져가버린 뒤 행방을 알 수 없게 됐다. 달궁을 지키던 성이 정령치와 성삼재 그리고 바래봉으로 이어지던 팔랑치라고 한다. 세 명의 성이 다른 장수들이 적을 막아 성삼재고, 정 장군이 성을 쌓고 나라의 마지막을 호위해 정령치라는 이름을 얻었다. 정 장군을 만나러 가는 길은 더더욱 조심스럽게 걸어야 한다. 수풀이 우거진 길 옆을 유심히 보면 성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정 장군이 달궁을 지키기 위해 쌓았다는 성의 흔적이다.

고리봉 정상 아래 암벽에는 인근에서 ‘마한 장군상’ 또는 ‘정 장군’으로 부르던 마애불상군이 희미한 흔적으로 남아 있다. 부처 9위가 있다고 적었던 설명문은 인근 사람들의 말에 따라 12위의 부처가 있다고 고쳐져 있었다. 주변도 말끔하게 정비돼 있었다. 유적 조사를 마쳤는지 안내판에는 그림으로 12위 부처의 흔적을 표시해놓았다. 포수들도 정 장군상 앞에 이르러서는 ‘마한 임금님의 성지’라 하여 동물을 놓치면 놓쳤지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을 정도로 오래도록 성지로 여겨졌던 곳이다. 비로자나불일 것으로 추측된다는 설명이 달린 부처의 표정은 단호하지만 어둡다. 질 수밖에 없는 전쟁을 이끌어야 하는 장수의 비장함까지 묻어나는 그 표정에서 사람들은 부처보다는 장군을 생각했을 것이다.

1400여m에 이르는 능선이면서도 마한 장군상 앞은 유난히 평탄하다. 빽빽한 잣나무숲은 1960년 이곳을 사탕무밭으로 개간하려다 실패하고 조림한 결과다. 마한의 군대가 주둔했던 터일지도 모른다. 사탕수수밭을 일구던 당시 여러 가지 유물들이 출토됐지만 그것들도 달궁의 유물들과 똑같은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다시 돌아 대간길로 들어서는 길, 앙칼진 소리가 저물어가는 산의 적막을 깬다. 삵일까 혹은 고양이일까? 조심조심 돌아나오는 길가에 푸른 생명이 돋는다. 고리봉에는 배를 매어두는 고리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불교에서 부처를 모시는 법당은 곧잘 진리를 찾아 번뇌의 바다를 항해하는 배에 비유하곤 한다. 마애불상군은 마침내 도착한 진리의 섬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더 이상 배가 바다를 헤매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배를 묶었던 것은 아닐까.


앙칼진 소리의 주인공은 삵일까? 고양이일까?

고리봉에서 백두대간은 바래봉∼팔랑치∼덕두산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주능선과 이별을 하고 급하게 내리막을 탄다. 내리막의 끝은 60번 지방도로. 언뜻 평지인 듯한 대간의 날등은 엄연히 물길을 나눈다. 확연히 구분되는 능선을 기준 잡지 않고, 제대로 분간되지 않는 평지에서 맥을 찾아내는 옛사람들의 혜안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아스팔트 깔린 60번 지방도로를 따라 오른쪽 물길은 진주 남강으로, 왼쪽 물길은 섬진강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지리산=글· 사진 윤승일 기획위원 nagne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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