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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지는 것부터 시작하는 불륜극

감정의 낙폭을 추체험할 여지를 주지 않는 구성의 묘미, 해럴드 핀터의 <배신>
등록 2009-03-25 17:12 수정 2020-05-03 04:25
2005년 핀터 페스티벌에서 공연 된 <배신>의 한 장면. 사진 한겨레 자료

2005년 핀터 페스티벌에서 공연 된 <배신>의 한 장면. 사진 한겨레 자료

문학작품을 읽다 보면 때로는 형식이 내용을 압도하는 경우가 있다. 영국의 극작가 해럴드 핀터(Harold Pinter·1930~2008)의 희곡 도 바로 그런 작품이다. 결혼한 남녀의 불륜 혹은 연애의 시작과 일정한 시간의 경과 그리고 열없는 이별의 서사. 듣기만 해도 지루할 지경이다. 그런데 은 이 이야기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려냈다.

출판업에 종사하는 제리와 로버트. 그들은 가장 절친한 친구 사이다. 그리고 엠마는 로버트의 부인이다. 제리와 엠마는 7년 동안 이른바 불륜 관계를 지속하다가 2년 전에 헤어졌다. 어떤 이는 이 작품이 사회적 유대의 허구를 해체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것에 의존하며 용인하고 있다고 읽어내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이 작품에서 더 중요한 것은 제리와 로버트 사이에서 벌어지는 배신의 문제라면서 이 작품에서 그리는 남성들의 유대, 남성들의 동성사회적 욕망을 읽어내기도 한다. 물론 충분히 공감 가는 독해들이다. 이 작품의 전면에 부각되는 배신은 제리와 엠마의 관계 때문인 것처럼 그려지나, 실은 이 작품에 등장하는 남성들 사이의 유대와 배신의 재현 양상이 독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게 이 작품이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약간 다른 데 있다. 배신 행위나 혹은 사회적 유대라는 것 자체의 허구성보다는 작품 구성에서 비롯하는 어떤 잔상이 한동안 내 마음에, 내 시야에 남아 있었다. 그것은 마치 뼈대만 남아 있는 듯한, 11월의 마른 나무 같은 앙상한 이미지였다. 그리고 배신의 서사와는 거리가 먼, 위로 비슷한 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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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의 서사는 지레 읽기 힘들다. 격할까봐서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이 작품, 담담하다. 이성적으로 읽혀 감정의 낙폭을 추체험할 여지가 없었다. 이 작품은 모두 9장으로 돼 있다. 1장은 1977년 어느 선술집에서 제리와 로버트가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해서, 1968년 제리와 엠마가 그들의 비밀한 사랑을 막 시작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1장 마지막에서 제리가 묻는다. “뭐가 남았지?” 엠마가 대답한다. “모든 게 끝났어요.” 독자나 관객은 1장부터 알게 된다. 그 둘의 사랑은 2년 전에 끝났고, 지금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3장에서 둘은 밀회 장소였던 연립주택을 팔고, 엠마는 ‘바보 같은 일’이었다고 말한다. 뒤로 갈수록 엠마와 제리는 열정적이다. 더 뒤로 가면 그 둘은 서로 입 맞추고 포옹하고 요리도 한다. 9장에서 제리는 엠마에게 뜨겁게 구애를 하면서 로버트를 보기 좋게 속여 넘겨버린다. 그리고 끝이 난다. 속내를 말짱하고 빤하게 들여다본 느낌이랄까.

연애(혹은 불륜) 이야기가 흥미진진하려면 사건 순서대로 서술돼야 한다. 그래야만 연애가 설레는 ‘사건’이 되고, 독자는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대리체험하며 그 서사에 몰입할 수 있다. 그런데 시간의 순서를 거스른 구성으로 인해 이 작품의 연애는 그렇고 그런 ‘일상’이 되고, 감정에 대해서는 엄청나게 거리를 유지하게 된다. 설렘도, 입맞춤도, 뜨거움도, 테이블보도 다 빛바래 보인다. 심지어 이별까지도 말이다. 이렇게 담담하고 깔끔하고 차분한 불륜과 배신의 서사는 낯설다. 바로 이 작품이 선택한 구성의 마력 덕분이다.

배신은, 사랑은, 관계는 신뢰의 문제다. 그리고 이 작품은 엠마와 제리와 로버트, 이 3명의 배신의 서사를 통해 그 유대가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지 보여준다. 어쩌면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 읽고 나서 든 생각. ‘그래, 그래도 사는 거잖아.’ 감히 신뢰를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기대하거나 무참히 깨지거나 하면서 살아가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도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하는…. 마치 가지만 남은 11월 나무의 아름다움처럼. 새잎이 돋을 때의 찬란함, 한여름의 무성함도 좋지만 나신처럼 드러난 회백색의 선들도 충분히 감탄스럽다. 의 구성, 그 이야기의 뼈대는 살들은, 생생한 감정들은 소거해버렸지만 대신 삶의 비의(秘意)를 생각하게 해준다.

조혜란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학술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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