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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보내 죽어 맞이한 아들아


군에서 생환하지 못한 아들·형제를 둔 군의문사 유족들의 기록 <돌아오지 않는 내 아들>
등록 2008-12-18 13:30 수정 2020-05-03 04:25

1994년 화랑대. 목련이 손수건처럼 흩날리던 봄, 시인 김초혜씨는 육군사관생도들 앞에 섰다. 소설가 조정래씨와 결혼해 낳은 외아들을 막 군대에 보낸 참이었다. 단아한 차림으로 그는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군인’들이 왠지 무서워, 강의 제안을 받고도 쉬 결정을 못 내렸다고. 그런데 아들이 입대하고 난 뒤 생각이 달라졌다고. 강의실에 둘러앉은 문학반 생도들 10여 명이 ‘또 다른 아들’인 것만 같아 좋다고. 그렇게 그는 일주일에 한 차례씩 생도들과 시를 읽고 삶을 얘기하고 사람을 생각했다. 엄격한 규율과 훈련에 동태같이 언 마음을 녹이려 창가에 앉은 새내기 생도도 시인이 엄마처럼 좋았다. 그 생도는 공책에 이런 글귀를 적기도 했다. ‘어머니… 당신의 새벽이 되겠습니다.’ 스무 살 ‘문청’은 그때 부모 마음을 난생처음 되짚어 그려보았다. 그것은 부끄러운 데생이었다.

‘군의문사유가족연대’ 회원들이 11월20일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연 ‘희생자 합동 추모제’에서 비를 맞고 있는 한 영정. 유족들은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과거사 관련 위원회로 통폐합되는 것에 반대해왔다.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군의문사유가족연대’ 회원들이 11월20일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연 ‘희생자 합동 추모제’에서 비를 맞고 있는 한 영정. 유족들은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과거사 관련 위원회로 통폐합되는 것에 반대해왔다.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당연한 일을 부러워하는 사람들

타고난 팔자걸음이라도 자식을 군에 보낸 부모는 종종걸음을 놓는다. 이치가 그렇다. 그런데, 사랑만으로 채워도 모자랄 시간을 원통과 통곡과 분노와 절망으로 견뎌야 한다면 어쩌나. 그 곡절을 어찌 풀어야 하나. 조정래·김초혜 부부의 아들이 무사히 제대한 뒤 결혼하고 자식을 낳은 것은 ‘당연’한 일임에도 외려 그것을 ‘행운’으로 부러워하는 부모들이 있다면, 그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삼인 펴냄)은 군에 보냈으나 끝내 생환하지 못한 아들·형제를 둔 ‘군의문사 유족들’의 기록이다. 필자 여섯이 열여덟 가족을 찾아 청진기 따위로는 감히 해독해내지 못할 슬픔을 받아썼다. 그들의 언어는 흔히 형식을 찾지 못한 채 허공으로 날리고, 슬픔의 무게는 빙하처럼 우지끈 쪼개지며 내리누른다. 살아서 배웅했으나 죽어서 마중하는 현실, 그 기막힌 풍경 앞에서 인쇄된 글자들이 금세라도 검은 눈물 되어 왈칵 흘러내릴 듯하다. 민주공화국에서 그것은 차라리 비현실이다.

“난 지금 여기 있는 게 지옥 같다… 내가 이틀 전만 해도 자살을 결심했는데 이제는… 나는 지금 너무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어. 하지만 난 그것을 영원히 지울 수 없을 것 같다… 난 우울증에 걸렸을까… 왜 난 이렇게 저주받은 인생을 사는 걸까… 나에게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내가 여기서 나가지 못하면 저는… 모두가 사나운 독을 가지고, 세상이 너무 무섭다.” 권은우씨는 1999년 6월17일 논산훈련소에서 숨졌다. 그가 남긴 수양록(일기)은 목울대를 치는 절망으로 가득하다. 육군은 권씨의 죽음을 간결히 ‘처리’했다. “수류탄으로 자살했다.” 아버지 권영석(63)씨는 말을 잃었다. 자살 일보 직전에 이른 병사를 훈련소 안 누구도 진심으로 염려하지 않았다. 게다가 ‘정신질환’을 앓는 아들은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차가운 영창에서 보름을 지내기까지 했다. “그런 상태면 제대를 시키든지, 다시 병원에 입원을 시키든지 해야 될 거 아닌가 말이라. 아무리 군대라고 하지만, 정말….” 대한의사협회의 감정 결과조차 군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육군본부 사망사고조사단은 ‘정신병적 증상 정도에 따른 자살 확률이 검증된 바 없다’며 끝내 사망과 정신질환의 관계를 인정치 않았다. 아들을 ‘폐인’으로 만든 책임을 누구에게도 물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억장은 이럴 때 무너진다.

사연이 이뿐이랴. 의무경찰로 입대한 아들이 아파트에서 몸을 던졌다는 청천벽력. 기동대에서 매일같이 자행된 폭언·폭력을 뒤늦게 알았을 때 강신일 이경의 부모는 가슴을 뜯었다. 순직 인정을 받아 현충원에 안장했지만 ‘자살 사건’이므로 국가유공자로 인정할 수 없다는 국가보훈처의 태도는 부모의 뜯긴 가슴을 아예 너덜거리게 만들었다. “둘 다 국가기관 아닌가요?” 국방부 또한 경찰청·법무부와 달리 구타·가혹 행위 희생자를 ‘자살’이라는 이유로 순직 처리하는 데 미온적이다. 그것은 ‘국가의 정신분열증’이다.

부끄러운 국가의 정신분열증
<돌아오지 않는 내 아들>

<돌아오지 않는 내 아들>

1987년 1월 숨진 노경춘 일병은 자신의 고민을 제대로 표현조차 못했다. “뜨스고소 시싶다사 이시고솟에세/서서” 수첩에 그가 남긴 이 문장은 ‘뜨고 싶다 이곳에/서’라는 뜻이다. 고뇌조차 암호화해야 했던 사정을 누가 알 것인가. 노 일병의 어머니는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뒤 시름시름 앓다 결국 루푸스병을 얻고 말았다. 면역계가 제 몸을 공격하는 희귀 질환이다. 40년 전 군에서 숨진 아버지를 신원(伸寃)하려는 마흔 살 아들의 동분서주, 해군의 위법한 복무 관행에다 상관의 비인격적 질책·욕설에 떠밀려 숨진 아들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6년간이나 장례를 거부하고 차가운 냉동실에 아들을 눕혀야 했던 부모도 있다.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이해동)는 2006년 1월 문을 연 뒤 600건의 진정을 접수했다. 처리한 350여 건 가운데 진상 규명 결정을 내린 것은 121건에 그쳤다(2008년 12월 현재). 지난 12월1일 국회 국방위원회는 군의문사위의 활동 시한을 1년 연장하는 법안을 의결했고 본회의 처리를 앞두고 있다. 군의문사위의 진실 규명을 기다리는 진정은 아직도 240여 건에 이른다. ‘통곡의 수’는 가늠조차 어렵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관념의 체조’로 타락하는 순간이다.

을 쓴 소설가 조세희씨는 지난 12월3일 한 특강에서 각혈하듯 말했다. “이 땅에서 바로 이 시간에 행복하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도둑이거나 바보다.” 는 12월9일치 사설에서 “국회는 과연 군의문사위의 활동기한 연장을 해줄 필요가 있는 것인지를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고 적었다.

12월19일 저녁 서울 조계사 안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선 ‘군의문사 유족들’을 위한 작은 공연이 열린다.

전진식 기자 한겨레 편집2팀 seek1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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