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테면 연예인들은 언젠가부터 자신의 권리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대중의 사랑을 받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숨기거나 참아야 했던 옛날과는 다른 양상이다. 연예인들, 특히 여성 연예인들이 ‘할 말은 하는’ 시대가 왔다. 피해자임에도 오히려 숨어야 했던 그녀들이 이제는 카메라 앞에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들이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근거는 ‘공격이 곧 최선의 방어’라는 위기관리 정책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그만큼 한국 사회가 질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걸 반영한다. 연예인들이 강철처럼 단련되는 동안 한국 사회도 이만큼 자랐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대견한 일이다.
지난 11월11일에 열린 ‘한부모가정 자녀를 걱정하는 진실모임’의 기자회견 모습. 한겨레 이정아 기자
미국 사회에 대한 신랄한 풍자로 유명한 미국 애니메이션 의 시즌12에는 브리트니 스피어스에 대한 무시무시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올 초에 방영된 이 에피소드는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쫓아다니며 괴롭히는 언론과 대중에게서 상처받은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마침내 엽총으로 자기 머리를 쏴버리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기자회견 열어 “그 법 집어치우라”물론 이 에피소드가 ‘남의 일’처럼 보이지 않는 이유는 최근 한국 연예인들의 자살 사건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죽음을 의미 있게 만드는 건 그 이후의 변화들이다. 그런 점에서 최진실의 사후에 야기된 인터넷 실명제나 친권법에 대한 논쟁은 그녀의 죽음에 대해 한국 사회가 어떤 대답을 내놓는 과정일 것이다. 하지만 연예인들이 반드시 죽음을 통해 사회적인 발언을 하는 건 아니다. 당장 그녀의 죽음 이후 야기된 친권 논쟁에는 김부선이나 김미화, 허수경 같은 방송인들의 이름이 함께 거론된다. 지난 11월11일, ‘한부모가정 자녀를 걱정하는 진실모임’의 기자회견에 참석한 김부선은 ‘그 법 집어치우라!’는 제목의 시를 낭독하며 조성민의 요구가 부당하다고 주장했고, 비혼모인 허수경 또한 “자신을 짓밟았던 배우자가 자신이 쌓은 재산을 관리하고, 아이들을 만나주지도 않던 아버지가 자동적으로 친권자가 되는 이 땅에서 그녀는 죽어서도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 것”이라고 성토했다. 그뿐만 아니라 간통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탤런트 옥소리는 간통죄에 대해 위헌법률심판 제청을 이끌어냈으나 헌법재판소로부터 합헌 결정 통보를 받아야 했다. 간통죄에 대한 위헌법률심판 제청은 이번에 네 번째로, 이미 신해철의 주장으로 종종 이슈가 됐던 이 논쟁이 이번에는 보수단체와 여성단체, 일반 네티즌과 지식인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논의를 유발시켰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연예인의 사생활에 대해 적극적인 목소리를 낸 사례로 백지영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2000년 그녀는 사생활이 담긴 비디오가 유출된 사건의 피해자였음에도 은퇴할 수밖에 없었다. 비슷한 사례의 여성 연예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2년에 걸쳐 활동에 어려움을 받던 그녀는 ‘제5회 안티 미스코리아 축제’ 참여를 기점으로 ‘여성’과 ‘폭력’이라는 문제를 정면 돌파했다. 또한 이를 계기로 ‘성폭력’에 대한 광범위한 사회적 논의가 이뤄졌고, 어느 정도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기에 이르렀다. 홍석천이나 하리수 또한 소수자에 대한 전반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그들에 대한 법적·사회적 편견을 없애는 데 기여했다. 이들은 모두 자신이 받은 피해를 개인적 영역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법적 판례를 만들거나 사회적 논쟁의 한가운데에 서며 사회를 환기시켰다. 이런 사례들은 지금까지 연예인들이 자신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이중적 시선을 참아내다가 자신의 커리어를 포기하는 것을 넘어 직접 그 시선과 부딪치며 현실을 바꿔나가는 태도의 변화를 반영한다. 연예인들 스스로 어떤 폭력적 상황에 맞서 자신을 더 단단하게 단련하고 있는 것이다.
광고
이전에는 비슷한 처지의 연예인들은 사실을 숨기기에 급급하거나 그런 사실이 드러났을 때는 ‘죄인 취급’받는 게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지만, 앞서 언급한 스타들로 인해 비슷한 사례에 대한 한국 사회의 법적·관습적 태도가 전반적으로 변화했다는 점은 무척 긍정적이다. 그것이 연예인들의 발언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유다. 다른 사례들보다 더 직접적인 변화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단지 법적 영역에 국한된 얘기는 아니다. 최근 보수 진영에서 뜻밖의 ‘태클’을 받은 문근영은 기부활동이나 사회활동에 대한 전반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현재 시사·예능 프로그램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는 김미화나 유혜정, 한성주 등은 호주제나 여성의 이혼에 대한 편견을 불식시키는 데 기여했다.
연예인도 존재에 기반해 사회에 참여하는 시대다. 진보신당 총선 출정식에 참석한 김부선·하리수씨. ‘진실 모임’ 기자회견에 나온 허수경씨, 북한 동포 돕기 강연에 나선 배종옥씨(맨 왼쪽부터/연합 이상학·한겨레 이정아·<한겨레21> 류우종 기자)
시사 프로그램 진행자로 다양한 사회활동을 벌이고 있는 김미화는 최근 고 최진실의 친권 논란과 관련해 “한국의 양성평등은 아직 모자란 부분이 많다”고 지적했고, 1990년대 고학력 미스코리아 출신의 아나운서로 등장했지만 결혼 뒤 활동을 중단한 한성주는 이혼 뒤에 문화방송 의 ‘세바퀴’에 고정출연하며 ‘뻔뻔한 돌싱(돌아온 싱글)’의 캐릭터로 인기를 얻고 있다. 이휘재나 김종국 같은 연하남에 대한 관심을 숨기지 않는 그녀는 엉뚱한 발언과 유머로 시청자를 사로잡는다.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 중인 이경실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상처를 적절하게 유머로 활용하는 그녀의 모습은 의연하게 보인다.
이런 현상이 긍정적인 이유는 제도적·사회적으로 여성을 억압해온 한국 사회의 일상을 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특히 그녀들 모두 ‘여성’과 ‘연예인’이라는 이중의 틀로 재단돼왔다는 점에서 그렇다. 게다가 그녀들의 주체적인 태도는 한국 사회의 편견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기도 하다. 그녀들이 피해를 받거나 법원에서 싸워야 하는 이유는 모두 가족과 성, 결혼과 자녀 같은 ‘개인적 영역’의 문제들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은 그녀들로 인해 공적 영역으로 확대될 수 있었다. 여성과 소수자, 이를테면 ‘배제된 자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로 작용했다.
광고
사실 사적인 영역이야말로 가장 정치적인 영역이다. 손가락 끝에 가장 예민한 감각이 몰려 있듯이 한 사회의 이데올로기가 가장 첨예하게 작동하는 곳이야말로 개인이다. 그러므로 많은 여성들이 사적 영역에 대해 공개적인 논의를 불러오고, 법적 갈등의 주체로 서는 것은 한국 사회가 집단을 위해 개인, 특히 여성의 희생을 요구해왔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그래서 고 최진실과 조성민의 친권 논쟁이나 옥소리의 간통죄 논쟁은 단지 그들만의 문제로 환원될 수 없다. 우리 삶과도 밀접하게 연관된 이 문제들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개인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은 사회정의를 만드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런 연예인들의 싸움이 의미 있는 것은 지금 한국 사회가 집단이 아닌 개인 중심의 사회로 전환되고 있음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임신한 데미 무어의 누드는 여성의 몸에 대한 고정관념에 도전했다. 영국의 한 전시회에 등장한 데미 무어의 사진. 연합/ EPA/ ANDY RAIN
미국이나 유럽의 연예계, 특히 할리우드 스타들의 적극적인 행동이나 발언도 별반 다르지 않다. 1973년 미국 낙태법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야기한 ‘로 대 웨이드’(Roe vs Wade) 사건을 다룬 TV영화 에 출연한 홀리 헌터와 제작사인 〈NBC〉는 1989년 당시 광고를 취소하겠다는 10여 개의 광고주들이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방영을 강행했다. 데미 무어는 1991년 당시 임신한 상태의 전신 누드를 잡지 표지로 실어 ‘임신한 여성의 몸’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 시선을 깨뜨렸다. 또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이 개시된 날 런던 콘서트에서 “부시와 같은 고향 출신이라서 부끄럽다”는 발언으로 구설에 오른 여성 그룹 ‘딕시 칙스’는 몇 개월 뒤 표지에 자신들을 향한 다양한 ‘수사’를 몸에 새긴 누드를 실으며 스스로를 변호했다. 배우 수잔 서랜던은 2008년 미국 대선에서 “매케인이 당선된다면 이탈리아나 캐나다로 이민 가겠다”는 발언을 서슴지 않으며 오바마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최근 동성결혼 금지 주민 발의안이 통과된 캘리포니아주에 대해선 숀 펜과 마돈나,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앤젤리카 휴스턴, 로지 오도넬 같은 배우들이 집회나 공연, 방송 출연과 인터넷을 활용하며 강력하게 비판하는 중이다. 물론 이런 사례들은 미국의 자유분방한 분위기 속에서 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 아닐까. 이른바 시민사회는 개인의 행복을 토대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한 사회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더 중요하게 여길수록, 연예인들의 사회적 발언도 다양하고 활발하다는 건 흥미로운 사실이다.
대중의 시선이 그들을 향하기 있기 때문에 연예인들은 어떤 식으로든 사회적 발언을 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사회적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그들을 사회적으로 더 단련시킨다. 최근 사회적 편견과 불합리에 대한 연예인들의 발언이 자주 언론에 등장한다는 사실은 그만큼 한국 사회가 긍정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증거다. 예전이라면 언론의 가십란을 장식할 만한 얘기들이 이제는 사회면 기사로 다뤄지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이때 우리는 그들의 발언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지에 대해 선택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사회적 합의의 과정이다. 개인의 행복을 더 보장하려고 노력하는 사회야말로 민주적인 사회다. 한국 사회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 우리는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광고
다시 얘기로 돌아가자. 그 에피소드에서 브리트니 스피어스는 머리가 반이나 사라진 상태에서도 죽지 않는다. 그리고 매스컴도 여전히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다. 이 얘기가 섬뜩한 이유는 그 결말 때문이다. ‘사우스파크’의 꼬맹이들이 거의 죽어 있는 그녀에게 폭력적으로 카메라를 들이대는 사람들에게 “당신들은 기어이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죽기를 원하느냐”고 묻자 사람들은 멀뚱한 얼굴로 “당연하지. 옥수수 수확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어. 이건 전통이야”라고 대답한다. 마침내 무수한 플래시 세례에 괴로워하던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쓰러지자 그제야 사람들은 돌아간다. 얼마 뒤, 올해 옥수수 농사가 최고라며 기뻐하는 사람들 앞에 같은 TV쇼가 새로운 여자 스타의 탄생을 선언한다. 이내 음산한 시선으로 변한 그들은 내년 옥수수 수확은 더 좋을 거라고 중얼거리며 끝난다. 현대 자본주의는 연예산업을 극도의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만들어놓으면서 그 종사자들을 상품으로 전락시켰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그들의 인간성을 거세한 대신 스타성을 쥐어주고는 호시탐탐 그걸 빼앗을 기회를 노린다. 한 인간의 성장과 몰락 과정 자체가 ‘오락’이 되는 시대에 대중은 죄의식도 잊고 산다는 사실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이 에피소드는 끔찍하게 역설적이다.
하지만 스타의 상품성과 그 가치에 의해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유지되는 것도 사실이다. 연예인의 삶은 그들의 작품이나 활동만큼 대중에게 항상 노출돼 있다. 그들이 삶을 유지하기 위해선 사적 영역을 완전히 포기하거나, 위험을 감수하고 그걸 분리시키는 방법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최근 한국 연예인들의 사회적 발언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이들이 후자의 태도를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습적으로 개인의 삶을 포기하는 대신 그들이 적극적으로 자기 입장을 정하고 행동을 취한다는 사실은 고무적인 일이다. 자유란 개인 의지에 의한 결과다. 싸우지 않고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발언대로 “어떤 사건을 정치적인 것으로 만들어 투쟁하는 사람들이 바로 민주주의의 주체”라면, 시스템에서 배제된 여러 사람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이야말로 ‘진보의 과정’일 것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지지와 격려따라서 무언가와 싸우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공개적인 지지와 격려다. 그것은 그들뿐 아니라 우리, 이 사회 구성원들의 삶을 위한 지지와 격려다. 그래서 마침내 수많은 개인의 행복이 보장된다면 그 역시 진보적인 실천이라 할 수 있다. 지금, 전통적인 관습과 편견에 맞서는 연예인들의 자기 단련과 사회적 발언이 한국 사회를 어쨌든 좋은 쪽으로 변화시키리라고 믿는 근거다.
| |
차우진 대중문화평론가
광고
한겨레21 인기기사
광고
한겨레 인기기사
보수 논객들도 “이재명 처음부터 무죄” “윤석열 거짓말은?”
“승복하자” 다음날 “판사 성향이”...이재명 무죄에 국힘 ‘본색’
영남 산불 피해면적 서울 절반 넘어…이재민 1만8천명 [영상]
‘입시비리’ 혐의 조민, 항소심서 “공소권 남용” 주장
경북 북부 산불피해 ‘역대 최대’…아쉬운 비, ‘5㎜ 미만’ 예보
심우정 총장 재산 121억…1년 새 37억 늘어
‘20대 혜은이’의 귀환, 논산 딸기축제로 홍보대사 데뷔
이정섭 검사, 처남·지인 수사정보 무단 조회…3년 연속 대기업 접대도
이진숙, EBS 사장에 ‘사랑하는 후배 신동호’ 임명…노사 반발
전한길 자살 못 하게 잡은 절친 “쓰레기…잘못 말해주는 게 친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