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가 어려워질수록 막다른 골목에 몰린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는 일확천금의 꿈이 오락가락한다. 경제가 극심하게 어려워진 최근에 로또를 구입하는 수효가 늘었다는 통계가 나온 것을 보면 틀린 말이 아니다. 벼랑에 몰린 사람이나 힘겨운 나날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한 번에 목돈을, 그것도 힘들이지 않고 손에 쥐는 환상은 떨쳐버리기 쉽지 않은 유혹이다. 그런 유혹에 솔깃하는 서민을 탓만 할 수 없을 만큼 상황이 어렵다.
대중에게 일확천금의 꿈이 널리 퍼진 것은 천박한 자본주의의 도입 이후라고 해야 하나, 그 시작과 원형은 먼 과거로 올라간다. 어느 시대이든 금전의 가치를 무시한 적은 없지만, 조선 사회는 영·정조 시대를 거치면서 재물이 인간과 사회의 중심적 문제로 자리를 잡아갔다. 윤리강상을 높이고 상업을 말단으로 취급해 이익과 금전을 천시하던 관념도 현실 앞에서 힘을 잃어갔다. 그리하여 등장한 것이 매점매석의 상행위이고, 횡재를 바라는 심리의 확산이다. 재물 앞에는 양반이나 상민이나 가릴 것 없다.
그렇다면 횡재를 얻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 시대의 횡재 가운데 누군가 땅속에 묻어둔 금은보화를 얻는 것과 길거리에 흘린 재물이 든 보따리를 줍는 것이 흔하게 보인다. 금고가 아닌, 땅속에 묻어둔 재물의 발견이란 것이 원시적이고 허구적이어서 신빙하기 어렵기는 하다. 그러나 은행업이 발달하지 못한 당시에 현금과 금은보화를 안전하게 보관할 길이 마땅치 않았던 부자들은 그 방법을 적절히 이용했을 법하다. 그렇게 하여 사건들이 벌어지고, 구체적 사례들이 옛 기록에 등장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에 첫 번째 사연으로 실려 있다.
서울 중심부에 있는 행정구역 장통방(長通坊)에는 오천동(梧泉洞)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여기에 사는 이아무개란 사람은 몇 대를 부자로 떵떵거리며 살았다. 하지만 증손·현손 대에 이르러서는 가산을 탕패해 빈털터리 신세가 됐다. 하는 수 없이 살던 집을 홍씨에게 팔았다.
집을 산 홍씨가 대청마루 기둥 하나가 기우뚱해 무너질 것만 같아 보수를 시작했다. 공사를 하다가 기둥 아래에서 3천 냥이나 되는 은덩이를 파내게 됐다. 홍씨가 판단하기에 이 보물은 전 주인인 이씨의 선조가 감춰둔 것으로서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홍씨는 이씨를 오라고 하여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은덩이를 가져가라고 했다. 그런데 이씨가 순순히 은을 받기는커녕 뜻밖에도 이렇게 말했다.
“은은 우리 조상께서 감춰둔 것인 듯하오. 하지만 그렇다는 사실을 입증할 명문(明文)이 있는 것은 아니오. 게다가 이미 집을 당신에게 팔았으므로 이 집에서 나온 은도 당신의 물건이오.”
이유를 대며 이씨가 은을 사양하자 이번에는 홍씨도 자기 것이 아니라며 가져가라고 하여 서로 사양하는 바람에 결말이 나지 않았다. 서로 은을 두고 다툰 사연이 마침내 관아에까지 소문이 났고, 관아에서는 그 사실을 조정에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임금은 “우리 백성에 이렇듯 어진 사람이 있으니, 지금 사람이 옛사람보다 못하다고 누가 말하랴?”라고 하고는 은을 반분해 나눠갖게 하고 두 사람 모두에게 벼슬을 내렸다.
서울 집값의 수십 배에 달하는 거금에 실린 사연의 전부다. 거짓말 같은 이야기다. 3천 냥이면 당시 서울 집값의 수십 배에서 백 배에 달하는 거금이다. 자기 소유의 집에서 나온 것을 가진다 해서 문제 삼을 것도 없고, 더욱이 전 주인도 받지 않겠다는 것을 굳이 이유를 대서 양보하다니! 홍씨는 말할 나위도 없지만 사실은 이씨도 막상막하다. 이 다툼 아닌 다툼이 관아에까지 알려지고 임금의 귀에까지 들린 것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만큼 특이한 사례다. 임금이 표창하고 안 하고는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은 어디까지가 허구고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서술이 구체적이어서 사실로 보이기는 하지만 입증할 만한 구체적 증거나 다른 기록을 발견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사실 여부를 떠나 이 사건이 일어났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개연성을 방증할 유사한 사건의 기록이 적지 않게 보이기 때문이다.
신돈복(辛敦復·1692∼1779)이 쓴 (鶴山閒言)이란 책에는 부솔(副率) 벼슬을 한 김재해(金載海)의 사연이 실려 있다. 학문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그가 한 과부로부터 50, 60냥을 주고 집을 샀다. 집에 들어가 담장을 수리하느라 땅을 파다가 돈 100냥이 들어 있는 독을 얻었다. 과부의 돈이라고 판단하고 그는 부인을 시켜 편지를 내어 사유를 설명하고 가져가라고 했다. 과부는 몹시 감동하기도 하고 이상하게 여겨 직접 그 부인을 찾아갔다. “그 물건이 꼭 우리 선조가 묻은 것이라 할 수 없으므로 차라리 반분하자”고 하자 그 부인이 “애초에 반분할 뜻이 있었으면 그냥 갖지 무엇하러 돌려주겠어요. 나는 남편이 있어 이 돈이 없어도 살 수 있으니 다 가지세요”라며 고사하고 받지 않았다. 과부는 하는 수 없이 돈을 가져왔으나 평생을 두고 김재해의 은공을 잊지 않았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김재해는 숙종 말년인 1713년 무렵에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부솔의 직책에 있었다. 그는 저명한 성리학자인 박세채(朴世采)의 문인이었고, 김창협(金昌協)과도 교제한 성리학자다. 경서를 해설한 저작도 남겼다. 구체적인 정황이 설명돼 있어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고 보아도 무리가 가지 않을 듯하다. 이 이야기를 의 사연과 비교한다면 어떨까? 다소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대동소이하다. 전 주인이 재물을 거절한 것과는 달리 과부는 받았다는 점이 다르다는 것뿐이다. 같은 이야기의 다른 버전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다.
그렇다고 가 의 이야기를 베낀 것은 아니다. 이러한 사연들이 현실에서 발생했고, 그 이야기들이 사람들 사이에 적지 않게 유포됐다가 서로 다른 저작에 기록됐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몇 가지 사례가 발생했느냐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에는 거액의 재물을 집 안 어딘가에 땅을 파고 숨기는 보관법이 이용됐다는 사실과, 자기의 재물이 아닌 경우 남이 무어라 하든 원주인에게 돌려주려는 양심을 지닌 사람들이 꽤나 존재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집값의 2배나 되는 돈과 그보다 30배가 넘는 엄청난 거금을 횡재라 여기고 제 호주머니로 넣지 않고 주인을 찾아주었다. 횡재를 포기하고 전 주인에게 양보하기란 양심이 없다면 힘들다. 더욱이 이씨의 경우는 재산을 탕패해 집까지 판 힘겨운 처지에다 정황상 자신의 조상이 묻어둔, 일종의 유산인 셈인데도 받지 않았다. 현재의 경제관념으로 본다면 바보 아니면 멍청이다. 각박한 현실에서 발생하기 어려운 미담이라서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순진한 사람들이라고 평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순진한 사람들이 꽤나 존재했고, 거기에 가치를 부여한 사회가 조선 사회였다는 것도 부정하지 못한다.
청렴한 인간은 예외적 존재일까?에서는 지금도 옛날 사람이 있다고 왕이 말했다. 그 의미는 무엇일까? 고대 중국에서 자기 소유물을 서로 양보한 사연을 직접적으로 가리킨다. 하지만 이런 사연은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이래 사례가 이어진다. 에는 신라 때의 인관과 서조가 솜을 서로 양보한 미담이 실려 있다. ‘현덕수전’에는 노극청(盧克淸)이란 사람이 집값을 되돌려주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노극청이 귀가해보니 아내가 은 12근을 받고 현덕수에게 집을 팔았다고 한다. 노극청은 전 주인에게 은 9근에 집을 사서 수리하지도 않았는데도 3근을 더 받는 것은 부당하다며 3근을 되돌려주려고 했다. 그러자 현덕수는 이미 매매가 이루어졌으므로 안 받겠다고 다투다 결국 그 돈을 절에 시주했다는 사연이다. 그 사연을 듣고 사람들은 “이끗만을 추구하는 말세의 풍속에도 이런 사람이 있단 말이냐”며 탄복했다. 이 사연을 에 실은 이규보는 아예 ‘노극청전’을 써서 그의 행동을 예찬했다.
앞서 본 이야기와 소재는 조금 다르지만 부당한 이익을 취하지 않으려는 청렴한 성품을 지닌 사람들의 사연인 점에서는 유사하다. 이규보가 평한 것처럼 이익만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이러한 사연은 아주 드물고, 그렇기에 이렇게 미담으로 전한다. 먼 옛날부터 현재까지도 깨끗하고 선량한 사람들은 드물지만 없지는 않다.
그런 사람들이 드물다는 것은 이야기로도 입증된다. 청렴한 사람들의 행동과는 딴판으로 서슴없이 굴러 들어온 횡재를 독차지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조 숙종 때에 막강한 왕실 권력을 쥔 서평군(西平君) 이요(李橈·1684~?)란 분이 있었다. 그는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고 예술가를 후원한 사람으로 유명한데 그 재산의 형성이 의문을 낳았다. 그가 땅속에 묻힌 보물을 캐어 재산을 불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요는 종실 출신이지만 고아가 되어 몹시 가난했는데 견디다 못해 자살까지 시도했다. 두 번의 자살 시도에 실패한 그는 한양의 폐가에 몸을 뉘었다. 밤에 귀신이 나타나 자기 후손이 몰락해 이 집을 버리고 영남 지방으로 낙향했는데 마루 밑 깊숙이 백은(白銀) 십여 독을 숨겨놓았으니 자손에게 그것을 알려주어 생업을 꾸리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보답을 하겠다는 약속과 함께였다. 귀신의 말대로 땅을 파서 엄청난 은을 얻은 서평군은 귀신과 맺은 약속을 저버리고 은을 독차지해 큰 부자가 됐다. 귀신은 서평군의 자손을 끊는 것으로 복수했다고 소문이 났다. 이 사연은 (溪墅稿)의 ‘서평군에 관한 일을 쓴다’(書西平君事)에 실려 있다.
서평군의 사연은 땅속에 묻힌 보물을 찾아 부자가 된다는 횡재 이야기의 전형이다. 이 이야기가 어디까지 사실인지 알기는 어렵다. 그가 갑작스레 거부가 됐고, 그 배경이 석연치 않은 것을 두고 여러 가지 해석한 것 중 하나일 가능성이 있다. 권력을 빙자해 남의 큰 재산을 갈취한 뒤에 남들 듣기에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주목할 사실은 땅속에 묻힌 재물로 어느 순간 부자가 된다는 욕망이 서평군 사연에 고스란히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런 이야기가 시대적 배경이 대체로 숙종조 이후 18·19세기에 집중되고, 등장하는 인물이 대체로 한양 사람이며, 사건이 일어나는 공간도 거의 모두 한양이다. 숙종조 이후 도시화가 가속화되고, 인구가 집중되며, 상업도시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물신 숭배 풍조가 거세진 일면을 반영한 현상으로 해석할 만하다. 그렇다면 귀신과의 약속을 배반하고서 재물을 독차지한 서평군의 사례가 당시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이고, 앞서 살펴본 청렴한 인간은 예외적 존재였으리라.
내 조상이든 남의 조상이든 상관없이 그들이 남몰래 숨겨둔 보물단지의 발견은 이렇게 사람들 머릿속에서 꿈으로 자리잡았다. 어딘가에 숨겨진 보물단지는 그 시대의 로또처럼 여겨져 필기와 야담에도 등장했다.
그 시대의 로또, 숨겨진 보물단지에 실린 한 과부의 사연도 마찬가지다. 현재의 서울 옥인동에 거주한 여염집 청년과부가 아들 둘을 키우며 힘들게 살았다. 집 뒤 텃밭에 채소를 가꾸어 사는 과부가 밭을 갈다가 큰 옹기를 발견했는데 그 속에는 은화가 가득했다. 깜짝 놀란 과부는 바로 뚜껑을 덮고 흙으로 감추었다.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은 채 고생고생하며 자식을 키웠다. 자식들도 고생하며 공부해 아전과 재상가의 겸종(傔從)이 되어 가정을 꾸렸다. 손자도 예닐곱 명이 됐다. 옹기를 발견한 지 30년이 되던 해 그 옹기를 파내어놓고 그 과부는 자식들에게 말했다. “그날 이것이면 부자가 되었겠지만 너희가 사치하고 교만해져 공부는커녕 주색잡기에 빠질까 염려하여 그대로 묻어두었다. 이제는 써도 되겠다.” 그들은 수만 냥을 얻어서 거부가 됐고, 그 재물을 빈궁한 사람들을 구휼하는 데 썼다.
이 과부도 땅속에 묻힌 보물단지라는 꿈을 이뤘다. 반면에 청렴한 자들이 한 행동이나 그것을 독차지해 세상을 호령한 태도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행운을 행사했다. 금전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고, 평상심을 잃지 않고 인생을 영위한 다음 천천히 세상의 가지지 못한 자들과 그 재산을 공유했다. 이 과부의 사연도 허구일 수 있으나 갑작스럽게 찾아온 재물을 처리하는 당시 사람들의 행동방식 하나를 제시한 이야기로 이것 역시 현실 속에서 소재가 취해져 가공된 사연으로 보아야 하리라. 횡재를 바라보는 당시 사람들의 서로 다른 시선은 지금에도 시사하는 바가 없지 않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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