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은 물건과 화폐가 유통되는 곳으로서 신분과 계층 같은 권위나 인격과 도덕 같은 인간의 내재적 가치가 대우받는 곳이 아니다. 화폐와 물건이 그런 가치에 앞서 대우받는 곳이다. 조선 후기의 시장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조수삼은 이러한 시장의 생리를 너무도 잘 알았고, 그 실상을 드러내는 한편 시장의 논리와는 달리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을 포착하려고 노력했다. 물질과 금전의 추구와는 또 다른 측면에서 개성 있게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도 찾아내고자 했다. 그런 그의 시선에 포착된 한 부류의 독특한 인간군이 바로 비참하게 몰락한 양반이었다. 그들도 시장의 한 귀퉁이를 빌려쓴 셈이다.
본래 조선의 양반 사대부들은 시장을 멀리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이란 말에서 선비와 상인의 거리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듯이, 사대부는 장사하는 사람과 시장을 멀리했다. 예의염치를 중시하는 양반 사대부가 싸게 사서 비싸게 팔아 일정한 이윤을 추구하는 행위를 한다는 것은 스스로 양반임을 포기하는 짓이었다.
그렇지만 조선 후기 들어 더 이상 생계를 이어가기 어려운 극한에 도달한 양반들이 적지 않게 등장했다. 그러한 상황에 처한 양반들이 현실을 타개하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시장에 나타나 생계를 이어가는 것이었다. 극단에 몰린 사람은 아예 구걸하는 거지로 떠돌기까지 했다. 그래도 그런 부류는 자기 인생을 책임지는 편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보다 더 무기력한 존재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19세기에 편집된 야담 (禦睡錄)에는 몰락한 양반 일가족의 죽음을 묘사한 짧은 일화가 실려 있는데 그런 무기력한 존재를 잘 보여준다.
한양의 소의문(昭義門) 밖에 홍(洪) 생원이 사는데 홀아비에 딸 둘을 두었다. 너무나 가난해 생계를 꾸려갈 방법이 없자 훈조막(熏造幕) 일꾼들에게 구걸하자 일꾼들이 십시일반으로 밥을 모아 주었다. 그는 그 음식을 잎사귀에 싸서 집으로 가져가 딸들을 먹였다. 여러 날 그렇게 하자 어느 날 취한 일꾼 하나가 그에게 “생원이 훈조막 부군당(府君堂)이나 되고 우리 상전 자식이나 되냐?”며 욕설을 하자 홍 생원은 눈물을 떨구고 집안으로 돌아갔다. 대엿새가 지났는데도 인기척이 없자 일꾼 하나가 집안을 들어가보았더니 부녀가 누워서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일꾼이 불쌍히 여겨 급히 나와 죽을 끓여 가져다주었다. 홍 생원이 13살 난 큰딸에게 “너희는 이 죽을 먹고 싶지? 우리 셋이 간신히 굶주림을 참은 지 이제 엿새째라, 곧 죽게 되었으니 그동안 애쓴 것이 아깝다. 이제 이 죽 한 그릇이라도 저 사람이 계속 주면 좋겠지만 이 뒤로부터 당할 욕됨을 어찌 견디겠느냐?” 그럴 때 5살 난 딸이 죽 냄새를 맡고 힘겹게 머리를 치켜들자 큰딸이 손으로 머리를 눌러 “자자! 자자!” 달래서 다시 재웠다. 다음날 일꾼들이 가보았더니 모두 죽어 있었다.
‘홍 생원이 굶어 죽었다’는 이 비참한 사연은 조선 후기 기아 선상에 헤매는 사람들의 처지, 특히 생계를 꾸려나가는 데 극도로 무기력했던 몰락한 양반의 처지를 인상 깊게 보여준다. 그 부인이라도 있었다면 홍 생원 가족이 이렇게까지 비참하게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홍 생원은 구걸하다 차라리 죽어 욕을 당하지 않는 가장 무기력한 길을 택했다. 그만큼 양반 남성 신분은 노동과 장사를 천시했다.
“나무 사려” 대신 “내 나무”라고 외친 양반홍 생원 같은 위기에 봉착한 양반이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에는 이렇게 생계의 위기에 봉착해 할 수 없이 시장으로 내몰린 양반들이 여러 명 등장한다. 그 가운데 장사에 나선 양반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내 나무’이다. 다음은 그 전문이다.
“내 나무는 땔나무를 파는 사람이다. ‘나무 사려!’라고 외치지 않고 ‘내 나무!’라고만 외친다. 심하게 눈보라가 치는 추운 날에는 골목골목을 다니면서 외치고 그 나머지 시간에는 거리에 앉아 있다. 나무를 사러 오는 사람이 없을 때에는 품 안에 든 책을 꺼내 읽는데 고본(古本) 경서(經書)였다.”
어떤 특이한 땔감 장수의 사연인데 그 장사꾼의 이름은 없이 ‘내 나무’(吾柴)라는 별명만 있다. 그의 이름이 밝혀지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사실 그 당시에는 장사 밑천이 없는 서민이 입에 풀칠할 수 있는 대표적인 일거리가 나무 장사였다. 그들은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해다가 한양 사람에게 팔아 근근이 먹고살았다. 그 시절에는 동대문 안팎에 큰 땔감 시장이 섰다.
그런데 이 ‘내 나무’는 일반 땔감 장수와는 여러 가지가 달랐다. 그중 하나가 “나무 판다!”거나 “나무 사려!”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니 않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다. 매매하고 흥정을 붙이는 행위는 상인의 행위로서 양반 사대부가 가장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였다. 이 나무 장수는 신분이 양반이라 팔기는 하되 판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한 이유가 그가 양반임을 드러내려 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신분을 숨기고 싶었으나 부지불식간에 드러났다. 그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은 “내 나무”였다. 내게 나무가 있으니 사가라는 말이다. 양반으로서 자의식과 자존심이 묻어나는 호객 행위이다. 그러니 그 많은 나무 장수들 틈에서 얼마나 도드라져 보였을까? 그 우스꽝스러움을 보지 않아도 알 만하다. 그 때문에 그는 시장에서 유명해졌다.
그의 유별난 행동은 여러 가지지만 그중 하나가 손님이 아무도 없을 때 품 안에서 책을 꺼내 읽는 것이다. 그는 품 안에 경서, 그것도 구하기 힘든, 아주 오래전에 간행된 고본을 지니고 다녔다. 현재는 나무꾼 신세지만 그의 집안이 과거에는 명문가였음을 암시한다. 조수삼은 이 인물을 놓고 이런 시를 지었다.
몰락했지만 책만은 팔지 않는 명문가 후손“눈보라 거세게 치는 큰 거리에서
이쪽저쪽을 다니며 ‘내 나무’라고 외친다.
바보 같은 회계(會稽) 마누라라면 틀림없이 비웃겠지만
송나라 판본 경서는 품 안에 가득하다.”
여기서 바보 같은 회계 마누라는 곧 한(漢)나라 때의 명사 주매신(朱買臣)의 본처를 가리킨다. 이 여자는 집안이 가난해 땔나무를 하며 공부에만 열중하는 남편을 부끄럽게 여겨 이혼했다. 그런데 뒷날 주매신이 회계군 태수가 되어 부임하자 전처는 부끄럽게 여겨 자살했다. 이 시를 보면, 이 나무꾼이 언젠가는 성공할지도 모른다고 암시를 언뜻 했다. 그러나 그런 기대가 현실에서 일어나기 힘들다는 것을 그 자신도 잘 알았다.
시에서 말한 송나라 판본 경서는 일반 사람은 소장하기 어려운 비싼 책이었다. 그런 귀한 재산을 팔지 않고 품 안에 끼고 읽는 것은 양반 후예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다. 그는 우스꽝스러울지 모르지만 나무라도 해서 생계를 유지하며 뒷날을 기약한 양반이었다. 그런 점에서 조수삼은 그런 기대라도 걸었던 것이다.
에는 이렇게 몰락한 양반임에도 책만은 팔지 않는 명문가 후손의 이야기가 또 나온다. 경호(磬湖)에 사는 박(朴) 생원은 책 수천 권을 소장했는데 아무리 가난하다 해도 책을 내다팔지 않았다. 낮이면 집을 나서 한강 일대를 비롯해 경성(京城) 안의 친지와 친구들을 찾아보고 밤이면 집에 돌아와 정성껏 두 아들에게 책을 가르쳤다. 두 아들은 뒷날 약간의 성취를 거두었다고 했다. 아마도 초시에는 합격해 양반 신분을 유지하기는 했다는 말일 것이다. 이렇게 조상 전래의 귀중한 장서라도 지킨 부류는 그래도 형편이 나은 축이다. 에는 아예 그런 기반조차 사라진 불쌍한 양반 여럿이 시장에 모습을 나타낸 사실을 기록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복홍(福洪)이란 거지다.
“복홍은 그 내력을 알 수 없다. 그에게 성이 무어냐고 물으면 “몰라!”라고 대꾸하고, 이름이 무어냐고 물으면 “복홍이야!”라고 대꾸하였다. 나이는 쉰여남은 살쯤 되어 보였다. 그렇지만 그 나이에도 총각이었다. 날마다 성 안을 다니며 밥을 구걸하는데, 날을 가려서 문을 선택하는데 그 순서를 어기는 법이 없었다. 밤이 되면 사용하지 않는 관아에 들어가 잠을 자는데 볏짚으로 만든 멍석을 깔고 덮은 채 밤새도록 를 암송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복홍은 한양의 유난스런 거지다. 아무 집이나 찾아가지 않고 꼭 일정한 룰에 따라 구걸할 집을 찾아갔다. 그는 이름만 있고 성이 없으며 식구도 없다. 자신의 내력을 철저하게 숨겼다. 그런 거지에게 사람들은 왜 호기심을 가졌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가 아무도 없는 괴기한 빈 관아 건물에 멍석을 깔고 덮은 채 밤새도록 를 암송하는 것 때문이다. 를 암송한다는 것이 숨겨진 그의 이력을 표현한다. 비록 시장과 골목을 돌아다니며 구걸하고 노숙하는 부랑자일망정 그의 품성에는 양반 사대부의 피가 흐르고 공부하던 사람의 지성이 보존되고 있음을 말한다. 그가 꼭 양반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를 암송할 정도인 것을 보면 그럴 가능성이 높다. 사람들은 그에게 일종의 연민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복홍처럼 드러내놓고 구걸하는 거지는 아니라 해도 생계를 해결하지 못하고 남에게 빌붙어 살거나 간헐적으로 구걸하는 부랑자가 제법 있었다. 송(宋) 생원이 그런 인물이다. 송 생원이 한양의 저잣거리에 모습을 나타냈을 때 생원이라고 불린 것을 보면 양반으로 보이지만 가난할 뿐만 아니라 돌아갈 가정도 없었다. 일부러 미친 척하면서 장난도 치는 떠돌이 부랑자인 그의 뒤를 철부지 동네 아이들이 졸졸 쫓아다녔다. 아마도 “송 생원, 송 생원!” 놀리면서 따라다녔을 것이다. 거지인 주제에 특이하게도 시를 잘 지은 것이 아이들을 몰고 다니는 이유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시를 지어보라고 운자(韻字)를 불러주면 그는 즉시 시를 지어냈다. 그리고 시 한 구절에 대가로 돈 한 푼을 달라고 했다. 동전 한 푼을 손바닥에 얹어 놓아주면 받았으나 땅에 던져서 주면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것을 보면 그는 시시한 거지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절대로 구절만을 지을 뿐 시 전체를 말해주는 법은 없었다. 그가 지은 시에는 아름다운 구절도 제법 있었다.
시 지어주고 돈 한 푼 받는‘ 낭만 거지’도“천리 타향에서 만난 벗을 만 리 멀리 보낼 때에
강으로 이어진 성곽에 꽃은 지고 비는 부슬부슬 내린다.”
떠돌이 부랑인이 지었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고운 시다. 고향의 역말 사람을 배웅하는 시인데 꽤 운치가 있다. 이런 멋진 시 한 구절 지어주고 돈 한 푼 받는 부랑인, 너무도 낭만적인 거지다. 그러나 그는 양반 신분을 지탱하지 못하고 시장 바닥을 떠도는 몰락한 신세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명문가인 은진 송씨라고 수군거렸다. 어느 날 갑자기 그가 시장에서 사라졌는데 그 집안에서 부끄럽게 여겨 그에게 가정을 꾸려주고 출입을 막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내 나무’나 복홍, 송 생원은 모두 당시 시장에서 꽤나 이름이 알려진 존재들로 보인다. 시장 사람들에게 그들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한편으로는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조선왕조를 지탱하던 양반들이 더 이상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지는 모습들이 하나둘씩 도시의 시장과 골목에서 발견되었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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