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에도 현대 대중문화계에서 볼 수 있는 스타가 존재했을까? 문화와 예술의 양상이 많이 다르기는 하지만 대중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린 스타가 존재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양반문화와는 달리 대중의 관심을 끌어모은 대중문화가 성장한 때문이다. 그런 스타들은 대중적 인기를 바탕으로 명성과 부를 거머쥐기도 했다. 가수와 악사, 바둑기사, 재담꾼, 판소리 광대와 같은 예술가들이 그런 축에 드는데, 이번에 살펴볼 광대 달문(達文·1707~?)도 그중 한 명이다. 달문은 거지, 광대, 사치품 거간꾼, 기생의 기둥서방, 재담꾼, 방랑자가 이력이다. 천하의 못생긴 남자로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인생 만년에는 역모 사건에 연루돼 귀양까지 간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다. 워낙 대중적 인기가 높아 그에 관한 이야기는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는 18세기 대중의 스타로서 손색이 없다. 그렇기에 연암 박지원이 그의 인생을 묘사한 (廣文傳)이란 전기를, 홍신유(洪愼猷)는 ‘달문가’(達文歌)라는 장편시를 써서 그의 독특한 인생을 묘사했다. 이규상·이옥·유재건·조수삼도 그의 인생을 다룬 글을 썼고, 과 같은 야담에도 그의 행적이 등장한다. 웬만한 고관대작은 이 정도로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도대체 그의 무엇이 대중의 마음을 파고들었을까?
먼저 그를 기억하고 묘사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극히 추악한 그의 외모를 떠올렸다. 그를 직접 만나본 박지원은 그가 정말 못생겼다고 말했다. 입이 아주 큰 것이 외모 가운데 두드러졌다. 얼마나 큰지 두 주먹이 들락날락했다. 달문은 툭하면 주먹을 쥐어 입에 넣어 사람들을 웃겼다. 당시에 아이들은 상대에게 욕을 퍼부을 때면 “네 형은 달문이다”라고 놀렸다 한다. 달문이 그 말을 듣게 되면 “달문이 보고 싶으냐?” 하고 불쑥 입을 벌리고 껄껄 웃고는 주먹을 쥐어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추악한 외모에 천한 일을 했으나 달문은 안평대군의 후손이라고 했다. 그 말을 믿을 수는 없으나 그의 성이 이(李)씨라는 사실은 말해준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성이 무언지도 몰랐다. 박지원은 그의 이름을 광문(廣文)이라고 불렀다. 그에게 성은 필요가 없었다.
달문은 평민 대접도 받지 못하는 거지로 살았다. 한평생 주거가 일정치 않았고, 결혼도 하지 않아 상투도 올리지 못하고 머리를 길게 땋고 살았다. 나이 들어 머리를 땋은 패션이니 기괴하기 짝이 없는 꼴로 보였다. 홍봉한(洪鳳漢)은 그 시대에 달문과 같은 꼴을 하고 다니는 파락호(破落戶)가 아주 많고, 괴상망측한 몸가짐이 풍속을 손상시킨다고 걱정했다. 남들이 결혼하라고 권하면, 그는 “누구나 잘생긴 얼굴을 좋아하지. 사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여자도 마찬가지야. 나는 본래 못생겨서 아예 용모를 꾸밀 생각도 하지 않아”라고 변명하곤 했다.
유명해지기 전에 달문은 거지 두목이었다. 종로 시장통에서 빌어먹고 다닐 때 거지 아이들이 그를 우두머리로 떠받들었다. 그때 한 사건이 벌어졌다. 눈이 오는 추운 겨울날 거지들이 모두 구걸하러 밖에 나가고 달문만이 아픈 아이와 움막에 남았다. 아이가 덜덜 떨며 끙끙대기에 달문이 잠깐 나가 밥을 빌어와 보니 아이는 벌써 죽어 있었다. 마침 돌아온 패거리들은 달문이 죽였다고 의심하고 달문을 패서 내쫓았다. 달문은 그날 수표교 다리로 가서 거지들이 버린 죽은 아이의 주검을 수습해 묻어주었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상인이 달문이 행한 의로운 행실을 소문냈다.
의로운 행실로 장안에 입소문달문은 그 덕분에 약국에서 일하게 되었다. 달문이 장안의 명사로 떠오르게 된 사건이 그때 발생했다. 그 사연을 는 이렇게 묘사했다.
“언젠가 달문이 어떤 약방을 갔는데, 주인이 값이 나가는 인삼 몇 뿌리를 내보이며 ‘이 물건 어떤가?’라고 물었다. 달문이 ‘정말 좋은 물건’이라고 대꾸했다. 주인이 마침 내실로 들어가고 달문은 등을 돌리고 앉아 문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주인이 나와 물었다. ‘달문이, 인삼은 어디 있는가?’ 달문이 고개를 돌려보니 인삼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자 웃으며 ‘때마침 사고 싶어하는 사람이 나타나 제가 벌써 넘겼습니다. 이제 바로 값을 보내드리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튿날 주인이 쥐를 잡으려다 세워놓은 약궤 뒤에서 종이로 싼 물건을 발견했다. 꺼내어 살펴보니 바로 어제의 그 인삼이었다. 주인이 깜짝 놀라 달문을 불러 ‘자네는 어째서 인삼을 보지 못했다고 말하지 않고 팔았다고 거짓말을 했는가?’라고 캐물었다. 달문이 ‘인삼은 제가 벌써 봤는데 갑자기 잃어버렸으니, 제가 모르는 일이라고 말씀드리면 주인께서 저를 도둑놈이라고 말하지 않을 도리가 있겠습니까?’라고 대꾸했다. 그 말을 듣고서 주인은 부끄러워하며 꾸벅꾸벅 머리를 조아리며 미안하다고 했다.”
약국 주인은 잘 아는 부자와 높은 벼슬아치들에게 달문을 칭찬했다. 달문의 행동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장안의 화젯거리가 됐고, 누구나 인정하는 의롭고 신의를 지키는 사람이 됐다. 그 때문에 달문이 빚보증을 서주면 담보를 묻지 않고 천금(千金)이라도 당장 내줄 만큼 달문은 신용 그 자체였다.
쾌남아 달문은 소싯적에 거지들과 어울리면서 당시 하층 사회에서 크게 유행했던 각종 연희를 골고루 배웠다. 각종 연희에서 누구나 인정하는 광대로 발돋움했다. 특기를 보인 연희는 만석중놀이와 철괴무, 팔풍무였다. 만석중놀이는 황진이의 미모에 빠져 파계했다는 지족(知足)선사를 조롱하는 내용의 탈춤으로 조선 후기에 널리 공연됐다. 철괴무(鐵拐舞)는 이철괴(李鐵拐)라는 기괴한 모습의 신선을 흉내내 추는 춤으로 산대놀이의 하나로 공연됐고, 팔풍무(八風舞)는 남사당놀이의 땅재주넘기와 유사한 놀이다.
홍신유는 그의 공연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팔풍무를 잘 추어 용이 꿈틀거리는 듯. 몸을 뒤로 젖혀 머리가 발에 닿으면 배꼽이 볼록 하늘로 솟네. 사지는 뼈가 없는 듯 어느새 몸을 돌려 뒤집더니 갑자기 가슴을 휙 바꿔 똑바로 섰다가 갑자기 거꾸러진다. 흘겨만 볼 뿐 똑바로 보는 법 없고, 비뚤어진 입에서는 온전한 발음 나오지 않네. 산대놀이 좌우(左右)부와 장안의 악소배(惡少輩)들이 달문이를 모셔다 상좌에 앉히고 귀신 모시듯 떠받드네.”
묘사된 것처럼 인기리에 공연되던 산대놀이나 남사당패 놀이에서 달문은 발군의 실력을 뽐냈다. 연희꾼들 사이에서 최고의 예능인으로 꼽혀 존경을 받았다. 이런 연희는 하층민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는데, 달문은 거지들과 어울리면서 빼어난 연희 재능을 습득할 수 있었다. 달문의 빼어난 실력은 한양을 벗어나 전국적인 명성을 누렸다. 달문이 호남과 영남의 여러 고을을 돌아다닐 때 가는 곳마다 인기를 얻었다. 달문의 경우를 놓고 보면, 당시 대중문화의 판이 결코 작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기둥서방 하며 명기 휘어잡아달문이 연희에서 최고라고 해도 그것이 바로 생계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달문에게 장사를 권했다. 달문은 일본과 중국에서 수입한 물건을 부잣집과 대갓집에 중개하고 흥정해 이문을 남기는 일을 했다. 그런 일을 하다 보니 몇 푼의 이문에 쫓아다니는 꼴이 서글퍼졌다. “사내 대장부가 마당에 노는 닭처럼 모이 한 알 다툴까보냐?” 하며 그 짓도 그만두고 유흥가로 진출했다. 달문은 기방에 들어가 기생의 기둥서방 노릇을 하며 살았다. 이른바 조방(助幇)꾼이다. 조방꾼으로 등장한 달문을 기생들은 크게 반가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달문은 이미 명성이 높은 사람이었다.
그런 달문에게 기생들은 처음에는 으스대다 나중에는 애교로 바뀌고, 그 다음에는 고분고분해졌다. 달문은 이 바닥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장안의 명기(名妓)들이 제아무리 곱고 아름다워도 달문이 인정해주지 않으면 한 푼어치 값도 나가지 않았다. 기방에서 달문이 지낸 모습을 에는 이렇게 소개했다.
“언젠가 한양의 논다 하는 자들이 당시 장안에서 검무와 미모로 이름난 운심(雲心)의 집을 찾았다. 마루 위에 술상을 차리고 가야금을 연주시키고 운심에게 춤을 추라고 했다. 그러나 도도한 운심은 일부러 지체하면서 좀체로 춤추려 하지 않았다. 그때 달문이 운심의 집에 들렀고, 술자리 상좌에 앉아 좌중을 압도하며 무릎장단을 맞추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러자 운심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광문을 위해 검무를 추었다. 좌중의 모든 사람이 한껏 즐기고 친구가 되어 헤어졌다.”
조방꾼 달문이 기방을 주도한 솜씨와 위세를 잘 보여주는 사연이다. 이렇게 달문은 조방꾼으로 새벽에는 장군의 연회에 불려가고, 저녁에는 왕손의 잔치에 나갔다. 그때 달문이 기생과 함께 모셨던 인물 가운데 유명한 암행어사 박문수와 명재상 조현명이 들어 있다. 하지만 달문은 잔치 자리에서 먹다 남은 술과 식은 안주를 걷어 먹는 일에 처량한 마음이 들었다.
전국 순회공연하며 명성 절정달문은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누구에게도 간다온다 말 없이 한강으로 나갔다. 배를 타고 충주로 가서 문경새재를 넘어 낙동강에 배를 띄우고 동래로 갔다. 때는 영조 23년(1747)이었다. 마침 통신사가 일본으로 떠나기 위해 동래에 도착했을 때였다. 통신사 행렬에는 수많은 예능인이 끼어 있는데 달문을 보고 모두 환영했다. 동래 사람들도 달문의 명성을 전부터 들었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몰려들어 자기들 집으로 데려가 안주를 잘 차려놓고 술을 대접했다. 그렇게 사람들과 어울려 익살과 해학의 솜씨를 발휘하며 반년을 즐겼다.
달문은 그런 생활에도 지루함과 싫증이 났다. 다시 방랑을 시작해 전라도와 충청도를 두루두루 노닐고 다시 대동강을 건너고 청천강을 거슬러 올라가 의주 통군정(統軍亭)에 올랐다. 통군정은 중국 사신이 왕래하는 요지라, 기생들이 늘 잔치를 벌이는 곳이었다. 달문은 또 장기를 발휘했다. ‘달문가’에는 의주에서 노는 모습을 “휘장 안에는 비단 치마 늘어앉고 촛불 아래 대피리 줄풍류 난만하다. 봉두난발에 귀밑머리 튀어나와 반절에 기운이 펄펄 넘치네. 뜰 앞에 온갖 춤 어우러지고 술잔을 받아 마셔 얼굴은 불그레하네”라고 묘사했다. 이후 백두산과 금강산까지 등반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구경꾼들로 북적였다.
현대적인 표현으로 바꾼다면, 달문은 전국 순회공연을 한 셈이다. 그러면서 더욱 전국적인 명성을 쌓았다. 명성이 높아지자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일이 발생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역모 사건에 그가 연루된 것이다. 영조 40년(1764) 달문이 58살 되던 해에 그는 역모 사건에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등장한다. 역모와 관련된 중죄인의 사건만을 기록한 (推案及鞫案)과 에 사건의 과정과 처리가 기록돼 있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이태정(李太丁)이란 자가 경상도에서 중과 노비, 점쟁이 등 나라에 불만이 있는 사람들을 모아 역모를 꾀했는데 역모에 가담했던 자근만(者斤萬)이란 자가 관에 밀고했다. 주모자인 이태정이 달문의 동생이고, 자근만은 달문의 아들이라 자처해 사람들을 끌어모았기에 달문이 함께 체포됐다.
자근만이 달문의 아들을 사칭한 이유는 이렇다. 경상도 개녕에 있는 수다사에서 밥을 빌어먹던 자근만이 절의 스님들이 달문을 화제로 올려 이야기하면서 모두 그를 칭찬하고 그리워하는 것을 보게 됐다. 자근만은 더 잘 얻어먹기 위해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자기가 바로 달문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스님들이 깜짝 놀라 자근만을 후하게 대접했다. 역모를 꾀하던 이태정은 달문의 동생을 사칭한 자근만이 후한 대접을 받는 것을 보고 자기를 작은아버지라고 불러주면 함께 부귀를 누릴 수 있다고 꾀어 달문의 동생을 사칭했다. 박지원도 이 사건의 내막을 기록하면서, 평생 총각으로 산 달문에게 동생과 아들이 나타나자 수상하게 여긴 자가 관에 고발해 사건이 드러났는데 나중에 대질심문을 하여 거짓임이 드러났다고 했다.
동생과 아들 사칭해 역모 꾀해
그해 4월17일 영조는 이태정을 사형에 처하고 달문은 “승려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데 인심을 미혹시켜 역적 이태정이 그 모습을 본뜨고 그 말투를 본뜨게 했다. 비록 본건에는 연루된 일이 없으나 사람 자체를 말하자면 난리의 근본이므로 변방에 유배 보낸다”고 하여 함경도 경성(鏡城)으로 귀양 보냈다. 에는 “달문이란 자는 무뢰한으로서 세상에 알려졌는데 머리가 반백인데도 총각의 모습을 꾸며 인심을 현혹하고 풍속을 어지럽혔다”고 기록돼 있다. 이에 나이가 많은데도 머리를 땋아 내린 자는 적발되는 대로 무겁게 다스리라고 전국에 공포했다고 한다. 달문의 인기를 노리고 달문의 스타일을 흉내내어 역모에 이용한 이 사건을 통해 달문의 인기가 어느 정도이고 얼마나 유행을 선도했는지를 짐작할 만하다.
달문은 경성에 유배갔다가 다음해 9월5일에 방면됐다. 달문이 유배에서 풀려 한양으로 돌아오자 늙은이며 젊은이 모두 구경하는 바람에 한양의 저잣거리가 며칠 동안 텅 비었다고 한다. 달문의 인기는 그 사이에도 식지 않았다. 그러나 달문은 더 이상 옛날의 화려한 명성을 이어가지 못했다. 이후 그는 갑자기 한양에서 종적을 감췄다. 온 나라를 들썩이게 한 명성을 뒤로한 채 사라진 그를 사람들은 추억했다. 18세기 시정 사회에서 인기를 누리던 광대 달문의 인생은 시작도 끝도 종적을 알기 어렵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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