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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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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남자가 다 배필이라던 당찬 노처녀


규방에서 한숨만 짓던 이들과 달리 당당하게 독신 삶 개척한 떡장수 삼월이
등록 2009-07-30 17:24 수정 2020-05-03 04:25

인간의 생활에서 노처녀·노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특별한 시선으로 볼 일은 전혀 아니다. 적당한 배우자를 찾지 못해 홀로 사는 사람도 적지 않지만, 갈수록 자발적 선택에 따라 독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추세이다. 한국만이 아니라 경제가 발달한 나라일수록 그런 추세이다. 그렇기에 독신 문제는 점차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할 가능성이 높다.

세상 남자가 다 배필이라던 당찬 노처녀.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세상 남자가 다 배필이라던 당찬 노처녀.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15살 전후에 결혼, 20살 넘으면 노처녀 간주

그렇다면 100년 이전 사회에서는 어떠했을까? 독신으로 살아가는 노처녀·노총각 문제는 독특한 차원에서 사회문제의 하나였고, 그런 증거가 를 비롯한 여러 사료와 문학작품에 투영되었다. 그 시대에는 그들을 바라보는 독특한 시선이 존재했다.

당시에 노처녀·노총각으로 산다는 것은 꽤나 특별한 일이었다. 보통 15살을 전후해 결혼하는 조혼 풍습이 일반화해 20살을 넘기면 노처녀로 간주했다. 당시는 혼사를 부모가 좌우했고, 또 누구나 시집·장가를 가서 노처녀·노총각의 존재가 별로 없을 것만 같은 인상에 우리는 쉽게 사로잡힌다. 공교롭게 옛날 문헌에도 노처녀·노총각이 눈에 잘 뜨이지 않는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지 않기도 했고, 가정에서 쉬쉬하는 문제였기에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을 뿐이지 실제로는 적지 않은 남녀가 가정을 꾸리지 못한 채 늙어갔다. 또 문학에서 다룰 만한 보기 좋은 주제도 아니었기에 이슈로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다 조선 후기에는 자발적 독신주의자의 존재를 비롯해 독신자들의 실상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제법 많아진다. 그 가운데 남녀의 상이한 모습을 보여주는 사연이 야담에 등장한다. 먼저 노총각의 경우로 두 가지 사연이 있다. 충청도 홍성에 사는 30살이 넘은 박 도령이라는 평민은 일찍 부모를 잃고 너무 가난해 머슴살이를 하느라 혼인할 수 없었다. 마침 혼처가 나타났으나 빈털터리인 그는 사또에게 혼수를 애걸하는 호소문을 냈다. 그 혼수를 구걸하는 글이 아주 재미있어 에 전문이 실려 있다. 또 떳떳한 양반 총각으로 동네 부잣집 좌수에게 청혼했다가 가난뱅이가 청혼했다 하여 갖은 욕을 당하는 박 도령이 등장한다. 이 박 도령을 도와 혼사를 맺게 한 사람이 바로 어사 박문수다. 가난하면 혼인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는 냉혹한 현실을 이 이야기는 과장되게 반영했다.

다음으로 에 노처녀 다섯을 단번에 혼인시키는 암행어사 설화가 실려 있다. 암행어사가 우연히 산골을 암행하다가 어떤 집에서 장성한 처자 다섯 명이 원님 놀이를 하는 장면을 목도했다. 처녀들은 원님, 형방, 급창, 사령, 박 좌수 이렇게 다섯 인물의 역할을 제각기 맡아 박 좌수란 죄인을 문초하는 연극을 했다. 원님이 동헌에 박 좌수를 불러놓고 “당신은 과년한 딸이 다섯이나 되는데 시집보낼 생각을 하지 않으니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그 문초에 박 좌수의 답은 이랬다. “저도 가장인데 왜 시집보내고 싶은 생각이 없겠습니까? 가세가 빈한하니 누가 가난한 집 딸을 데려가겠습니까? 게다가 적합한 혼처도 없습니다.” 그러자 원님은 이 마을 이 좌수 집에 스무 살 난 수재가 있고, 저 마을 김 좌수 집에 열아홉 살 난 수재가 있으니 그리로 시집보내라고 일일이 분부했다. 그러자 박 좌수는 잘 알겠다고 하며 문초를 모면했다. 처녀들은 이 역할극을 하며 박장대소하고 웃었다.

그 내용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한 암행어사가 동네 사람에게 탐문해본 결과 그 처녀들은 박 좌수댁 딸들로 나이가 23살부터 17살인데 하나같이 시집을 못 갔다는 것이었다. 어사는 관아에 출두해 처녀들이 역할극에서 말한 이웃 동네의 다섯 수재들에게 한꺼번에 혼사를 치르도록 주선했다.

영·정조가 직접 나설 만큼 사회문제화

이들 사연은 야담집에 실린 허구임에는 분명하다. 그나 허구로만 치부할 수 없을 만큼 사회 현실을 충실하게 재현했다. 당시에 이런저런 사유로 결혼하지 못하거나 안 하는 남녀가 제법 존재했다는 사실은 많은 자료와 정황으로 밝혀진다.

결혼할 의사를 강하게 가지고 있음에도 나이만 먹어가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혼수였다. 혼사를 논하면서 재물의 유무를 말하는 것은 오랑캐 짓이라고 입버릇처럼 양반들은 말했으나 현실은 달랐다. 혼수가 마련되지 못하면 남자도 여자도 결혼하기에 쉽지 않은 것은 조선시대 사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극심한 가난은 본인들의 의사와는 반대로 이렇게 젊은 남녀의 혼사를 방해했다. 위에서 본 사연은 혼수를 마련하지 못해 결혼하지 못하는 청춘남녀의 현실을 폭로한다는 점에서 매우 사실적이다.

그렇다면 이런 이야기가 과연 실상을 얼마나 제대로 반영한 것일까? 앞서 야담에 등장하는 인물인 암행어사 박문수도 영조에게 20~30살을 넘긴 노처녀를 시집보내야 한다고 진언했고, 1749년 우의정 조현명은 36~37살이 되도록 결혼하지 못하는 사대부 집안의 처녀와 남자가 있다고 보고했고, 1750년 이종성은 “처녀가 나이가 많아도 시집가지 못한 자는 대개 양반의 딸이라”고 말할 만큼 노처녀의 존재는 사회문제로 거듭 조정에서 제기되었다. 영조와 정조는 간헐적으로 서울과 지방의 노처녀·노총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정 차원에서 노력을 기울였고, 지방관들 역시 자체적으로 결혼을 권장하고 가난한 자를 위해 혼사 비용을 마련해주는 시책을 펼쳤다. 결혼 적령기에 혼인하지 못하는 것은 자연의 화기(和氣)를 해치고 사회의 안전망을 훼손시킨다는 문제의식에서 나온 대책이기는 하나, 실제로는 그것이 직접적으로 인구 감소로 이어질 수 있기에 조정에서도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말해 단순히 한 집안, 한 개인의 사적 문제를 넘어선, 중대한 국가·사회의 문제로 파악했다. 그래서 지방관이 할 일을 규정한 법전에서 대책을 마련해놓았고, 다산 정약용도 에서 남자는 30살, 여자는 25살까지 결혼하지 못하면 관에서 주선해 결혼시켜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러한 조정의 노처녀·노총각 결혼시키기 정책을 문학으로 승화시킨 작품이 바로 이덕무의 산문 (金申夫婦傳)이요, 이옥의 희곡 (東床記)다. 두 작품은 1791년 결혼 적령기를 넘긴 한양의 가난한 남녀를 정조의 왕명에 따라 결혼시키는 과정을 묘사했다. 주로 노총각의 입장에서 장가를 가게 된 즐거움을 묘사했다.

이들 작품은 일종의 정부 주도형 혼사시키기를 다루었고, 노처녀·노총각 문제를 공개적이면서도 지나치게 외면적으로 다룬 당시 사대부 의식을 반영했다. 여기에는 노처녀·노총각은 비록 가난으로, 신체적 결함으로 결혼하지 못하지만 결혼하고 싶어한다는 전제를 바탕에 깔고 있다. 노처녀·노총각의 내밀하고도 인간적인 감정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

50살 넘겨도 처녀 복장에 화장 잊지 않아

이와는 달리 조선 후기에서 일제 시기까지 이른바 노처녀 담론을 주도한 가사 작품 는 노처녀의 처지와 심리를 묘사하고, 당시 대중의 노처녀를 바라보는 시선을 잘 드러냈다. 사실 노처녀를 바라보는 시선은 연민이 주를 이루었다. 다음 사설시조에 그런 대중의 시선이 잘 드러난다.

달바자는 쨍쨍 울고 잔디잔디 속잎 난다.

삼년 묵은 말가죽은 오용지용 우짖는데 노처녀의 거동 보소. 함박 쪽박 드던지며 역정내어 이른 말이 바다에도 섬이 있고 콩밭에도 눈이 있지 봄꿈자리 사오나와 동뢰연(同牢宴)을 보기를 밤마다 하여 뵈니,

두어라 월노승인연인지 일락배락하여라.

여기서 동뢰연은 혼례에서 신랑과 신부가 교배를 마치고 마주 앉아 술잔을 나누는 잔치다. 결혼 장면을 꿈꾸며 히스테리를 부리는 노처녀의 모습이다. 이러한 시선에 바탕을 둔 는 2종이 있다. 하나는 양반집 딸로서 반편인 아버지와 처사가 불민해 숙맥불변인 어머니가 딸을 시집보내는 데 무관심해 40살이 넘도록 시집가지 못한 답답함을 노래했고, 또 하나는 평민 처녀로 갖가지 불구에 못생겼기 때문에 시집가지 못한 설움을 묘사했다.

두 노래는 아주 인기가 있었는데 그 이유는 노처녀의 형상을 과장되게 묘사한 데 있다. 과장되었다고 한 것은 두 편 모두 가난이라는 현실적 장애보다는 판서를 지낸 아버지의 지나친 무관심, 천하박색으로서 40살을 넘겼다는 설정 때문이다. 시집을 가고 싶은데 처녀 스스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소극적이고 히스테리컬한 노처녀의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했다. 대중이 노처녀를 바라보는 비딱한 시선이다.

반면에 에는 히스테리컬하기는 하지만 당당한 노처녀 삼월이가 등장한다. 삼월이는 가공의 인물이 아니라 당시 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있던 실제 인물이다. 조수삼이 작품을 썼을 당시에 삼월이는 50살을 넘긴 노처녀였다. 언제나 처녀 복장을 하고서 떡과 엿을 팔러다녔다. 앞서 본 노처녀들은 하나같이 집에 들어앉아 부모 탓, 팔자 탓만 하고 있는데 삼월이는 본인 스스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당찬 노처녀였다.

삼월이는 특이하게도 50살인데도 언제나 처녀 복장을 하고 골목과 시장을 돌아다니며 떡과 엿을 팔았다. 50살 할머니로서 그 차림새는 사람들 눈에 확 띄지 않을 수 없었다. 삼월이는 장사를 해서 번 돈으로 화장품을 사서 아침저녁으로 화장을 했다. 남편도 없는데 늘 화장을 하는 이유는 온 세상 남자들이 모두 그녀의 남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모습과 행동은 사람들 눈에 특이하게 보였을 테고,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잘 아는 특이한 떡장수로 유명했을 것이다. 그래서 조수삼의 눈과 귀까지 사로잡았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그 나이면 당시에는 벌써 할머니 소리를 듣고도 남았다. 그런 삼월이의 독특한 인간됨은 너무도 특이해 민요로까지 불렸다. “배필이 많다는 처녀는 동네 입구 사는 삼월이라네.” 당시 한양에서 불린 민요로서 바로 노처녀 삼월이를 노래했다. 대중은 그만큼 삼월이를 특별하게 보았던 것이다.

다른 노처녀들과 다르게 삼월이가 이렇게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앞에서 본 대부분의 노처녀들은 경제적으로 자립할 능력이 없어 오로지 모든 권한이 부모에게 있었다. 당연히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다. 반면에 삼월이는 스스로 떡과 엿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온 세상 남자를 남편 삼아 할머니임에도 나름대로 멋을 내고 다녔다.

매 같은 성미 노처녀의 인간승리

그런 노처녀 삼월이의 당당한 행동을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도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언젠가 삼월이가 술에 취해 거리를 가다가 죄수를 참수형에 처해 목을 매달아놓은 장소를 지나갔다. 술기운 때문인지 그 흉측한 모습을 피하기는커녕 다가가서 손바닥으로 목만 달린 자의 뺨을 올려치면서 말했다. “삼간초옥(三間草屋)일지라도 침탈을 금하는 법이 있거늘 구중궁궐이야 말해 무엇하겠느냐? 네놈은 도적이라기보다는 진짜 바보다.” 좀 희한한 장면 묘사이기는 하나 삼월이의 성격을 또렷하게 보여준다. 이런 행동을 노처녀의 히스테리로 돌리기는 힘들다. 조수삼은 삼월이를 이렇게 시로 묘사했다.

매 같은 성미로 눈썹을 그리고

매달아놓은 목이 앞에 있자 그 뺨을 치네.

“부서진 삼간초옥도 침탈을 금하거늘

감히 구중궁궐을 엿보려 하다니!”

조수삼은 삼월이의 매서운 성격을 포착했다. 할머니가 돼서도, 노처녀로 살면서도 당당하고 다부지게 거리를 활보하는 여성으로 파악했다. 단순히 특이한 인물이기에 묘사하는 것은 아니다. 수동적이고 소극적으로 규방에 앉아 구시렁대는 여성과는 달리, 시장과 골목의 거리를 목 뻣뻣하게 세우고 활보하며 “세상 남자가 다 내 배필이야!”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노처녀 삼월이의 인간 승리를 표현한 듯하다. 수많은 현대 노처녀들의 선구자로서 그녀 인생의 의의를 말하면 좀 지나친 것일까?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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