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전 대중문화의 실상은 어떠했을까? 그런 의문을 품고 조선 후기 대중문화의 모습을 추적해보면, 현대와는 상당히 다르지만 독특한 예술문화를 향유한 정황이 속속 드러난다. 그 가운데 하나가 재담(才談)이다. 재담은 조선 후기 한양에서 독특한 대중예술의 하나로 인기를 누린 기예였다. 익살을 섞어가며 재치 있게 하는, 재미있는 이야기인 재담은 고담(古談) 또는 덕담(德談), 신소리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 재담은 말재간이 좋은 사람이 흥미 삼아 말하는 수준이 아니라, 전문적 직업으로 하나의 공연예술로 정착돼 인기를 누렸다. 재담은 20세기 들어와서도 재담과 만담(漫談)으로 큰 인기를 누렸다가 수십 년 전부터 개그나 코미디로 변신을 거듭했다. 직업적 대중예술로서 인기를 누린 재담은 한 사람이 대중 앞에 등장해 공연하거나, 고객의 초빙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풀어 즐겁게 함으로써 대가를 받는 식이었다. 지금은 그 존재 의의가 완전히 사라졌지만 100년 전에는 매우 인기 있는 대중예술의 하나로 도시공간에서 흔하게 공연되었다.
전문적으로 재담을 구연(口演)하는 직업인은 재담꾼이다. 사람들에게 허리가 부러지도록 웃음을 선사하고 그들로부터 금전을 받는 직업이다. 이들의 존재는 여러 문헌에 조금씩 나타나다가 18세기 들어 제법 그 수효가 늘어난다. 그렇다면 조선 후기 재담꾼으로 한 사람을 들라면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 우선 에는 ‘설낭’(說囊), 즉 이야기 주머니라는 별명으로 불린 김옹(金翁)이 등장한다.
뇌물 받은 형조 관리 풍자“이야기 주머니 김옹은 고담을 잘하여 듣는 사람들은 누구 할 것 없이 배꼽을 잡는다. 그는 한 대목 한 대목 이야기를 풀어나갈 때면 핵심을 꼭꼭 찔러서 이러쿵저러쿵 잘도 말한다. 말하는 재간이 뛰어나 귀신이 도와주듯 민첩하다. 그래서 우스개 이야기(滑稽)하는 사람들 가운데 우두머리라 할 만하다. 그 심중을 냉정하게 살펴보면, 또 모두가 세상을 가볍게 보고 풍속을 경계하는 말이다.”
고담을 잘한 김옹의 특징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모든 사람이 포복절도할 만큼 익살이 넘치는 우스개 이야기를 잘했고, 이야기는 단순한 우스개에 머물지 않고 주제가 선명하고 풍자적 의미가 담겨 있다고 했다. 그래서 재담 예술계의 우두머리로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이야기 주머니’는 그런 솜씨를 상징하는 별명으로 당시 사람들이 김옹을 부르는 말이거나 아니면 조수삼이 김옹을 지칭한 말이다. 이야기 주머니는 재미있는 고담을 많이 아는 사람을 지칭하는 ‘이야기 보따리’와 거의 유사한 의미이리라.
조수삼의 설명을 보면, 그 시대에는 우스개 이야기를 직업적으로 구연하는 전문가가 꽤 있었고, 그들 사이에 김옹이 최고수였음을 알 수 있다. 재담이 전문적인 공연물로 공연된 시대임을 감안하면, 김옹을 한 시대의 대표적 재담꾼으로 자리매김하려 한 조수삼의 태도를 짐작할 만하다. 그렇다면 그가 장기로 삼은 레퍼토리는 무엇이었을까? 답은 조수삼이 쓴 시에 담겨 있다.
지혜는 진주처럼 둥글둥글
어면순은 골계담의 으뜸이다.
꾀꼬리와 따오기는
소란스레 소송을 걸더니
황새란 벼슬아치
판결은 지극히 공정도 하다.
시의 전반부는 의미가 분명하게 파악되지 않는다. 다만 후반부는 꾀꼬리와 따오기와 황새가 등장하는 ‘황새결송’이란 이야기가 틀림없다. 이 이야기가 김옹이 장기로 삼은 대표작이었기에 시에서 거론했을 것이다. 한편, 이 이야기는 (三說記)란 단편소설집에 들어 있다. 한 시골 부자가 뇌물을 받은 형조 관리로 인해 패할 리가 없는 소송에서 지고 난 뒤 풍자적으로 해본 이야기다. 꾀꼬리와 뻐꾸기와 따오기가 목소리 자랑을 하다가 황새에게 우열을 부탁했다. 당연히 질 수밖에 없는 따오기가 미리 황새에게 뇌물을 주어 꽥 소리를 지르고서도 일등이 되었다. 새의 우열 다툼을 통해 뇌물로 송사의 승패가 정해진다는 당시 사법제도의 비리를 풍자했다.
‘황새결송’은 평이한 사건의 서술에 그치지 않고 웃음을 동반하는 묘사와 대화체가 흥미롭게 전개되어, 재담꾼의 사설이 소설로 정착되었음을 추정할 만하다.
조수삼이 골계의 우두머리(滑稽之雄)라고 칭송한 재담꾼이라면, 다른 기록에 다시 나타날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는 과연 누구일까? (素隱稿)에는 김중진(金仲眞)이란 유명한 재담꾼이 등장한다.
“정조 임금 때 김중진이란 사람이 있었다. 나이가 늙지 않았는데도 이가 모두 빠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조롱하여 ‘오이무름’(瓜濃)이라 불렀다. 그는 익살스런 농담(?諧)과 통속적인 이야기(俚談)를 잘했다. 세태와 인정을 곡진하고도 섬세하게 묘사해서 곧잘 들을 만했다.”
오물거리는 모습부터 우스꽝김중진은 ‘오이무름’이란 별명으로 불린 명성이 높았던 재담꾼이라고 했다. 이 기록은 여러 측면에서 중요하다. 우선 김중진이 정조 임금 때 사람임이 드러났다. 18세기 후반이 그의 전성기였다. 다음으로 늙지 않았을 나이에도 이가 모두 빠져 오이무름이란 별명으로 불렸다.
글의 저자는 오이무름이란 별명이 붙은 이유를 노인이 먹기 좋은 오이무름이란 음식을 그가 즐겨 먹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의 설명은 궁색하다. 내 추정으로는 이가 빠져 오물거리는 모습이 쭈글쭈글해진 오이와 비슷한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용모만으로도 사람을 웃겼으며, 웃음을 유발하는 용모가 그의 별명으로 굳어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오이무름은 그의 캐릭터 특징을 잘 드러낸 예명인 셈이다.
그런데 이 오이무름이란 직업적 재담꾼은 이 시대를 대표하는 재담꾼으로 여러 곳에 등장한다. 18~19세기 왈자 패거리의 문화를 잘 보여주는 ‘무숙이타령’에는 봄날 흥겹게 노는 곳에 당대 최고의 대중예술가들이 등장한다.
“노래 명창 황사진이, 가사 명창 백운학이, 이야기 일수 외무릅이, 거짓말 일수 허재순이, 거문고의 어진창이, 일금 일수 장계랑이, 퉁소 일수 서계수며, 장고 일수 김창옥이, 젓대 일수 박보안이, 피리 일수 □(원본 확인 불가)오랑이, 해금 일수 홍일등이, 선소리의 송흥록이 모흥갑이 다 가 있구나.”
18세기 말엽부터 19세기 전반기에 활동한 각 분야의 명인들이 줄줄이 나온다. 모두가 실제 활동했던 사람들이다. 그 가운데 송흥록·모흥갑이 판소리 명창으로 유명한 것을 비롯해 박보안을 비롯한 음악가는 당대의 각 악기 명인으로 유명하다. 그 가운데 재담꾼으로는 외무릅과 허재순이 등장한다. 외무릅은 이야기의 최고수로 끼어 있다.
이 ‘외무릅’이 에 실린 오이무름과 동일인임은 불문가지다. 또 에는 “인색한 양반을 풍자한 오물음(吳物音)은 재담을 잘한다”(諷吝客吳物音善諧)는 야담이 한 편 실려 있다. 야담은 “서울에는 오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다. 고담(古談)을 잘해 세상에 명성이 나서 정승 판서 집을 두루 다녔다. 성품이 오이를 익힌 나물을 좋아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오이물음이라고 불렀다”라는 사연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오씨 성은 ‘오이물음’의 ‘오’를 성으로 착각하여 추정한 것이다. 김중진이란 본명보다 별명으로 더 많이 불렸기 때문이다. 결국 외물읍이 김중진과 동일인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에서도 오이를 삶은 나물을 좋아했기 때문에 오이물음이라고 불렸다고 했으나 역시 그릇된 추정이다. 정리하여 말하면, 서너 곳에 동일하게 등장하는 오이물음 곧 ‘외무릅’은 동일인이며, 정조 임금 시절 최고의 재담꾼으로 명성이 있었던 인물이다.
그렇다면 에서 골계의 우두머리라고 말한 이야기 주머니 김옹과는 어떠한 관계일까? 나는 김옹 역시 외무릅과 동일인이 틀림없다고 판단한다. 당시에 재담꾼을 전문직업으로 한 사람들 가운데 외무릅만큼 지명도가 높은 재담꾼이 많지는 않다. 연암 박지원이 에서 묘사한 광문도 유명한 재담꾼의 한 사람이고, ‘무숙이타령’에 등장하는 거짓말 최고수 허재순이도 그중 한 사람이다. 그런 무리들 가운데 재담꾼 집단의 대표는 외무릅이다. 당대 최고의 대중예술가 집단을 집중적으로 조명한 조수삼은 재담꾼 최고수로 외무릅 김중진을 꼽았을 가능성이 높다.
‘세 선비 소원담’ 인생 진실 담겨그리고 이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다. 외무릅의 가장 뚜렷한 이미지는 노인이 아닌데도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수삼이 ‘김씨 늙은이’라고 부른 것은 노인임을 표현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노인처럼 이 빠진 김중진의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를 표현한 말로 보인다. 이렇게 볼 때 정조 임금 시절 최고의 재담꾼 외무릅의 존재는 뚜렷하게 부각된다. ‘이야기 주머니 김옹’ ‘오물음’ ‘외무릅’ ‘김중진’으로 제각기 표현된 재담꾼이 동일인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가 장기로 한 재담의 내용과 특징을 찾아보면 그 사실은 더 분명해진다. 그는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데 천부적 재능을 가졌던 것으로 묘사되고, 특히 그의 구연의 특징은 대중을 웃기기에만 애쓰는 저차원의 우스개 재담을 넘어 세태와 인정을 유달리 곡진하게 잘 표현했고, 흥미만을 추구하지 않고 풍자의 기능과 주제의 선명성도 추구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매우 수준 높은 재담의 미학을 추구한 예술가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한 미학의 실례가 바로 ‘세 선비 소원담’(三士發願說)이다. 우선 이 이야기는 에 실려 있다. 세 선비가 하늘에 올라가 옥황상제에게 각자의 소원을 말한다. 첫 번째 선비는 큰 벼슬아치가 되는 소원을, 두 번째 선비는 큰 부자가 되는 소원을 말했다. 옥황상제는 모두 들어주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선비는 부귀도 공명도 싫다면서 시골에 묻혀 편안히 살다가 천수를 누리고 죽기 바란다는 평범한 소원을 말했다. 이 뜻밖의 소원에 옥황상제는 그가 소원한 것은 이른바 청복(淸福)으로서 그런 청복은 하늘도 정말 아껴서 아무에게나 주지 않는다면서 자기도 옥황상제 노릇을 벗어던지고 그런 삶을 살고 싶노라고 했다. 평범하게 사는 행복의 가치를 말한 이 이야기는 줄거리 자체도 긴장미와 흥미가 있다. 또 사람의 의중을 절묘하게 뒤집으면서도 가만히 되뇌어보면 인생의 진실이 담겨 있다.
에서는 이 이야기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사연을 전개했으나 큰 진리를 비유한다”고 평가했다. ‘세 선비 소원담’은 외무릅의 유명한 레퍼토리로서 매우 인기가 있었다. 그 인기는 후대에 란 단편소설집에 ‘삼사횡입황천기’(三士橫入黃泉記)라는 단편소설로 각색되어 실린 것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저승차사의 실수로 인해 생사치부책에 기록된 수명보다 빨리 저승에 끌려간 세 선비가 염라대왕으로부터 보상조로 각자의 소원을 말한다는 내용이다. 줄거리는 동일하고 사설이 흥미롭게 불어났다.
또 서유구는 ‘이운지’(怡雲志) 서문에서도 똑같은 줄거리를 설명하며 평범하게 살아가는 청복을 희구하는 심경을 표현했다. 다만 그는 선비를 넷으로 설정하여 문장을 잘하는 문인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첨가했다. 서유구는 이야기에 앞서 “세상에 떠도는 속된 이야기 가운데에는 그럴듯한 이치가 담긴 것이 없지 않다”고 했다. 이 레퍼토리가 당시 얼마나 큰 유명세를 탔고, 더욱이 그의 재담 특징인 그럴듯한 이치를 담는 미학이 살아 있음을 짐작할 만하다. 그런 이야기 전개의 특징은 에서 대표적 레퍼토리로 든 ‘황새결송’에도 똑같이 나타난다.
“관에 구멍 뚫어 ‘공수거’ 인생”
한편, 에도 외무릅의 재담 한 편이 구연 상황과 함께 실려 있다. 재산이 매우 많지만 인색하기 짝이 없는 종실(宗室) 노인이 서울에 살았다. 그는 재물을 터럭 끝만큼도 남에게 주는 법이 없고 심지어는 아들 넷에게도 분배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 그가 하루는 외무릅을 불러다 고담을 시켰다. 외무릅은 그 기회에 멋진 재담 하나를 떠올렸다.
그는 서울 장안에 사는 천하 구두쇠 이동지(李同知) 사연을 구연했다. 팔자가 좋아 부자로 사는 이동지는 임종할 때까지 재물 재(財) 한 글자를 가슴에서 벗어던지지 못했다. 그가 임종을 앞두고 아들들을 모아놓고 유언을 남겼다. “죽음을 앞두고 보니 그 많은 돈을 가져가지 못해 한이다. 평생 재물에 인색한 것이 후회스럽다. 그러니 내가 죽은 뒤엘랑 양손을 좍 펴고 쥐게 하지 마라. 관 좌우에 구멍을 뚫어 편 손을 내놓아 행인들로 하여금 내가 산처럼 재물을 쌓아놓고도 빈손으로 간다는 것을 보여줘라!” 자식들이 유언을 거역하지 못해 시키는 대로 하여 운구했다. 외무릅이 종실 노인집에 오는 길에 관 밖에 손이 나와 있는 것을 목도하고 이상하게 여겨 물었더니 그런 사연을 말해주더라고 했다. 종실 노인이 바보가 아닌 이상 자신을 조롱하는 이야기인 줄 알았지만 이치가 그럴듯해서 후한 상을 내리고 모든 재산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었다.
줄거리만으로는 흥미성이 떨어지지만 외무릅 재담의 특징이 그대로 살아 있다. 외무릅 같은 뛰어난 재담꾼은 이렇게 많은 사람을 앞이나 특별히 초청하는 부귀한 사람들 앞에서 구연을 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재담의 기예는 다른 대중적 연예에 자리를 물려주고 사라졌다. 하지만 그들의 공연은 조선 후기 도시적 시정문화의 전성시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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