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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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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남자 못 찾고 떠난 명기 한섬


이정보 묘 앞에서 통음한 의리의 예인, 숱한 호걸들 버리고 쓸쓸한 말년
등록 2009-03-12 16:47 수정 2020-05-03 04:25

18세기에는 명성이 자자한 기생들이 아주 많다. 제각기 뛰어난 가무와 인물로 명성을 남겼으나 그들 모두가 후대까지 명성을 전하지는 못했다. 특별한 그 무엇이 있는 자만이 운 좋게 존재를 뒤에 남겼다.
에는 그런 기생이 3명 등장하는데 제주도 기생 만덕과 정인을 따라 죽은 기생 금성월, 그리고 한섬(寒蟾)이다. 만덕과 금성월은 이미 소개했다. 한섬 역시 저 두 기생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명성이 있었다. 과연 어떤 행적을 보인 인물일까? 먼저 부터 살펴보자.

진정한 남자 못 찾고 떠난 명기 한섬.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진정한 남자 못 찾고 떠난 명기 한섬.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한섬은 전주 기생인데 황교(黃橋) 이판서(李判書)가 그를 집으로 데려다 가무를 가르쳐 온 나라에 명성이 자자하였다. 한섬이 나이가 들어 집으로 돌아간 지 한 해 남짓 지나 판서가 세상을 떴다. 한섬이 즉시 말을 달려 판서의 묘에 이르러 한 번 곡하고 술 한 잔 따르고 술 한 잔 마시고 노래 한 곡 불렀다. 다시 두 번째 곡하고 두 번째 잔을 따르고 두 번째 잔을 마시고 두 번째 노래를 불렀다. 이렇듯이 하루 종일 돌려가며 한 뒤 자리를 떴다.”

아주 간단한 기록이다. 나이가 든 전주 기생 한섬이 자신을 뛰어난 예인으로 길러준 후원자가 죽자 극진한 예를 다해 추모했다는 사연이다. 아무리 큰 은혜를 입었어도 배반하는 자 많은 것이 세상 형편이고 더욱이 사망한 뒤에는 못 들은 척하면 그만일 것을, 한섬은 지극 정성으로 고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것도 평범한 유교적 예법이 아니라 예인들의 독특한 방법으로 말이다.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아낸 것은 망자를 애도한 가기(歌妓)의 독특한 애도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런 정도의 사연만으로 한 시대 명사의 틈에 끼일 수 있을까? 디테일을 생략한 조수삼의 이야기 전개 때문에 의문이 들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이 줄거리에 비밀이 있다.

소실로 데려가 대가 없이 인정 베풀어

(試筆)이란 책에 실린 비슷한 사연을 보면 왜 그런지 다소 의문이 풀린다. 그 전문을 보자.

“전주 기생 한섬은 침선비(針線婢)로 뽑혀 서울에서 노닐었다. 뒷날 용모도 추레해지고 의지할 데가 없어지자 이정보 판서께서 불쌍히 여겨 자기 집에 살게 했다. 그러나 한 번도 관계를 맺지 않고 잘 대우했다가 만년에 재물을 많이 딸려서 고향으로 보내주었다. 이 판서가 죽은 뒤 소식을 들은 기생이 술을 싣고 판서의 무덤을 찾아갔다. 무덤에 이르러 술을 따라 무덤에 뿌리고 다시 큰 술잔에 술을 따라 스스로 마시고는 ‘대감께서 평생 술을 즐기시고 노래를 즐기셨지요!’라고 말한 뒤 마침내 노래를 길게 뽑았다. 노래를 마치고 통곡하고 곡을 마치고서 다시 술을 따라 무덤에 뿌렸다. 술이 다 떨어지자 애통해하다 기절하여 묘 앞에 거꾸러졌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바로 떠나갔다.”

한섬의 동일한 사연을 다룬 기록으로 전하는 이에 따라 디테일이 약간 달라졌을 뿐이다. 조수삼의 건조한 기록보다는 인과관계가 훨씬 설득력 있게 묘사되어 이 사연이 사람들에게 호기심과 감동을 불러일으킨 이유를 수긍케 한다. 여기서는 나이가 든 한섬을 소실로 데려다가 대가 없이 인정을 베푼 측면과 한섬이 애통해하다가 기절하는 장면까지 등장하여 훨씬 더 감성적인 색채를 가미했다. 어쨌든 서로 다른 두 종의 기록에 등장할 만큼 이 사연은 유명세를 탄 이야기였다. 하지만 단순히 이 에피소드가 특이해서 이렇게 기록에 전해진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그만큼 화제의 당사자인 한섬이 나라 안에 명성이 자자한 대중적 인기인이었고, 그 상대역인 이 판서 역시 매우 유명했기에 그들의 시시콜콜한 일상조차도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저 한섬을 키웠다는 황교 이판서는 대체 누구일까? 그는 영조 때 대제학과 예조판서를 지낸 이정보(李鼎輔·1693~1766)다. 서울 종묘 동쪽에 있는 황교 다리 부근에 살았기에 조수삼은 그를 ‘황교 이판서’라고 불렀다. 이정구(李廷龜)·이명한(李明漢) 집안의 후손으로 대표적인 경화세족(京華世族) 출신이다. 특히 음악에 뛰어난 실력이 있어서 스스로 곡을 만들어 지금도 시조집에 그가 지은 시조가 80수 가까이 전한다. 그런 실력으로 고관을 지내는 중에도 가객과 가기들에게 노래를 가르쳤다. 시조를 유행시킨 당사자로 유명한 이세춘(李世春)과 거문고의 김철석(金哲石), 그리고 추월(秋月)·계섬(桂蟾)·매월(梅月) 등의 가기가 그 문하에 출인한 당대 최고의 음악인이었다. 이들의 모습은 에 ‘기생 추월이 늘그막에 옛일을 말하다’와 이옥(李鈺)의 ‘가객 송귀뚜라미 전기’에 문학적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므로 이정보는 곧 당대 최고 음악가들이 모여드는 살롱의 주도자였고, 한섬은 그에 의해 한 시대를 대표하는 가기로 양성된 셈이다. 한섬은 그런 이정보에게 끝까지 제자로서 신의와 도리를 다했기에 여성의 의리와 예인의 의리를 한꺼번에 보여준 ‘기특한’ 존재였다.

전주 출신 기생 한섬의 사연은 두 종의 기록 외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앞서 말한 에 이정보의 대표적인 제자 중 하나로 나오는 계섬(桂蟾)이 바로 한섬(寒蟾)과 동일인이라고 추정된다. 계섬을 심로숭(沈魯崇)은 계섬(桂纖)으로 썼다. 그런 추정의 이유는 이정보가 키운 대표적 제자로서 그 행적과 이름이 매우 유사한 데 있다. 그에 관한 사연이 기록에 의해 전해진 것이 아니라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기 때문에 이름과 행적이 기록자에 따라 구체적인 내용에서 차이가 있으나 큰 줄거리는 비슷하다.

심로숭이 전한 ‘계섬’과 동일인물 추정

대표적인 기록이 심로숭이 쓴 (桂纖傳)이다. 그는 늙은 계섬을 직접 만나 사연을 듣고 상세하게 전기를 썼다. 여기에도 앞서 한섬의 존재를 부각시킨 처신이 다시 등장한다. 이정보가 죽자 계섬은 아버지를 잃은 듯 날마다 곡을 했다. 마침 나라 잔치를 준비하느라 날마다 관아에 모여 연습해야 했지만 그는 아침저녁으로 상가에 가서 상식을 올렸다. 담당자가 곡하다 목이 쉴까 염려했기에 계섬은 곡도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드디어 장례를 마쳤을 때 계섬은 이렇게 행동했다.

“공의 장례가 끝난 뒤 계섬은 제수와 술을 장만해서 공의 묘로 달려갔다. 한 잔 올리고 한 번 노래하고 한 번 곡하기를 하루 종일하고 돌아갔다. 그런 사연을 들은 공의 자제들이 묘지기를 책망하자 계섬은 몹시 한스럽게 여기고 다시는 가지 않았다. 그러나 한량들과 노닐다가 술이 거나해져 노래를 하고 나면 왕왕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다소 차이가 나지만 줄거리는 비슷하다. 이정보의 묘는 지금 경기 이천시 율면 신추리에 잘 보전되고 있다. 계섬과 한섬이 혼동된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동일한 행위를 다른 제자가 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심로숭은 이 계섬의 인생을 어떻게 묘사했을까?

계섬은 전주 출신이 아니라 황해도 송화(松禾)의 노비 출신이다. 심로숭이 글을 쓴 1797년에 나이가 62살이라고 했으므로 1736생이다. 어려서부터 노래를 잘해 한양 귀족들의 잔치 자리와 한량패의 술판에 계섬이 없으면 부끄러운 일이었다. 참판 원의손(元義孫)이 그 명성을 흠모하여 계섬을 데리고 10년을 살았으나 말 한마디 어긋나자 바로 그 곁을 떠나버렸다. 그 이후 당대의 이름난 가객이 모여든 이정보 문하에 들어가 노래를 익혔다. 이정보는 계섬을 가장 아꼈는데 사적 호감에서가 아니라 재능을 아꼈기 때문이다. 악보에 맞춰 몇 년을 배운 뒤로 계섬은 온 나라에 명성이 자자하여 지방에서 올라온 기생들이 그로부터 노래를 배울 정도였다.

1766년 이정보가 죽었을 때 계섬의 나이 31살이었다. 기생의 나이로는 늙었다고 할 때이다. 다른 기록에 ‘계섬이 나이가 들었다’고 할 법하다. 그 뒤로 한양의 큰 부자 상인 한상찬(韓尙贊)과 살았으나 그도 마음에 차지 않아 버리고 떠났다. 40살 무렵 불도에 귀의하여 정선군 산중에 전답과 집을 마련하여 떠났다. 산에 들어간 뒤로는 짧은 베치마를 걷어붙이고 광주리를 끼고 나물과 버섯을 따러 산이며 강을 오갔다. 그런 생활을 하며 밤낮으로 불경을 외우며 살았다.

“홍국영은 귀신도 모르게 죽을 것”

그 뒤에 다시 세상에 나왔다가 당대의 풍류남아 심용(沈鏞·1711∼88)과 어울렸다. 경기 파주군 시곡촌(柴谷村)에 있는 심용의 시골집 뒤에 거처를 정해 살았다. 거처가 심로숭이 사는 미륵산과 5리밖에 떨어지지 않아 어울려 지냈다. 산중에 나무를 엮어 울타리를 삼고, 바위를 깎아 섬돌을 만들었다. 대여섯 칸 되는 초가에 둥근 창을 냈고, 병풍·서안·술동이·그릇 등이 가지런히 놓여 화사하면서도 깔끔했다. 집 앞에 작은 밭을 가꿔 채소를 심었고, 논 몇 마지기를 소작을 맡겨 먹고살았다. 날마다 불경을 송독하며 보살로 살아갔다. 그런 노년 생활을 심로숭은 제법 상세하게 그렸다.

한편, 정선으로 은퇴했던 계섬이 잠깐 다시 세상으로 나온 일도 언급했다. 정조가 등극하고 난 뒤 홍국영(洪國榮·1748~81)이 권력을 잡았다가 지나치게 극성하자 정조가 물러가게 했다. 그때 정조는 그에게 많은 노비를 하사했는데 계섬도 그중에 끼어 있었다. 홍국영이 부르자 할 수 없이 산중에서 나온 계섬은 고관들의 잔치에 나가 노래를 불렀다. 곧이어 홍국영이 완전히 실각하자 계섬은 기생명부에서 빠져나와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한다. 나이가 들어서도 명성을 유지한 계섬의 행적이 약간 보인다.

하지만 심로숭은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으나 계섬과 홍국영 사이에는 제법 복잡한 인연이 있다. 친아들이 일찍 죽은 이정보는 이건원(李建源)을 양자로 들였고, 이 무렵 그 친동생 이관원(李觀源)이 역모 사건에 연루되었다. 1777년 홍계희(洪啓禧)의 손자 홍상범(洪相範)이 강용휘(姜龍輝) 등을 사주하여 막 등극한 정조를 시해하려고 궁궐 담을 넘은 역모 사건이 발생했다. 이관원의 장인 홍계능(洪啓能)이 그 주모자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관원도 연루되어 처형되어야 했으나 “아비가 왕가의 신하였으니 살려두어 후사가 끊어지지 않도록 해달라”고 애걸하여 겨우 살아나 섬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홍국영은 이정보와도 가까운 인척 관계가 있어 어릴 적부터 그 집을 왕래했다. 홍국영에게 계섬이 노비로 하사되었다는 기록이 올바른 정보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렇다면 이러한 사유 때문이리라.

에 이 사건과 관련한 내용이 나온다. 이정보의 첩은 전주 기생으로서 홍국영이 어렸을 때 이 기생이 머리를 빗기고 세수를 시켜주었다. 이관원 집안이 풍비박산되었을 때 그의 집에 머물던 기생이 홍국영을 찾아가 이관원을 살려달라고 빌려 했으나 문전박대를 당했다. 아침을 기다려 입궐하는 수레를 막고서 “우리 대감 집안을 왜 멸망시키느냐?”고 하소연했으나 그대로 쫓겨났다. 기생은 통곡하며 “하늘이 아시리라. 홍국영은 귀신도 모르게 죽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관원이라면 앞서 무덤에서 통곡하는 계섬을 쫓아낸 자제 중 한 사람일 것이다. 그런 그를 도우려 한 의기를 보인 전주 기생이라면 아무래도 한섬 또는 계섬일 것이다. 심로숭의 기록과 이 서로 차이가 나지만 홍국영과 계섬의 이야기라는 점을 놓고 보면 동일한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계섬은 이정보 집안과 밀접하게 이어진다. 이렇게 사후에도 계섬은 이정보 집안과 사연이 이어진다. 그리고 모두 계섬의 의리와 관련된다.

이상적인 남성상은 이정보였을까?

언젠가 계섬은 심로숭에게 지나온 인생 이야기를 풀어놓은 적이 있다. 소싯적부터 명성이 나서 당대의 영웅호걸을 수없이 만났다. 그들은 호화스런 저택과 휘황찬란한 비단으로 자신의 비위를 맞추려고 했다. 그런 사람이 많아지고 화려한 생활이 이어질수록 이상하게도 마음속은 채워지지 않았다. 세상이 우러러보는 영웅호걸 속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채워줄 진정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그런 계섬의 속마음을 읽었는지 언젠가 이정보가 이런 말을 했다.

“지금 세상에는 너만 한 남자가 없으므로 너는 끝내 그런 남자를 만나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노년의 삶을 보면 계섬은 진정한 지기를 만나지 못한 회한을 쓸쓸히 지니고 있다. 그런 그에게 “당신의 전기를 내가 써주었으니 내가 당신의 진정한 남자가 아니냐”고 심로숭은 농담을 던졌다. 대중적 인기를 한 몸에 받는 여인에게 진정한 지기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일 듯하다. 그 쓸쓸한 바람을 계섬은 분명 알았을 것만 같다. 그런 진정한 남자까지는 아니라도 자신의 재능을 인정하고 키워준 이정보를 그런 남자에 가깝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한 시대의 이름난 가기 계섬은 오로지 한 수의 시조를 남겼다. 그의 본색과 직접 연결되는 내용은 아니지만 쓸쓸한 마음자리는 보여주는 듯하다. 그 시조는 이렇다.

청춘은 언제 가며 백발은 언제 온고

오고 가는 길을 알았다면 막을 것을

알고도 못 막는 길이니 그를 슬퍼하노라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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