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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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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명품·신상이 있었으니

자기·벼루·서화 등 명품 골동품 수집에 재산을 탕진한 사람들…
중인·서민에까지 유행 번지며 ‘짝퉁’도 판쳐
등록 2009-06-26 18:45 수정 2020-05-03 04:25

중국 송나라에 팽연재(彭淵材)란 명사가 있었다. 서울로 올라가 10여 년이나 머물며 유학하는 동안 고향에 있는 식구들은 죽도 배불리 먹지 못했다. 견디다 못한 식구들이 돌아오라는 편지를 보냈다. 팽연재는 나귀를 타고 일꾼에게 보따리를 단단하게 묶어서 지고 가게 했다. 고향에 도착했을 때 친지들은 보따리를 보고서 “이제야 춥고 배고픈 고생을 벗어나게 됐다”며 모두들 좋아했다. 팽연재도 만면에 희색을 머금고서 “나는 나라와도 견줄 만큼 부자야!”라고 말했다. 그리고 보따리를 풀자 이정규(李廷珪)가 만든 먹과 문여가(文與可)가 그린 묵죽(墨竹) 한 가지, 그리고 구양수(歐陽脩)가 쓴 (五代史) 초고 한 질이 들어 있을 뿐,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조선시대에도 명품·신상이 있었으니 /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조선시대에도 명품·신상이 있었으니 /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끼니 걱정하면서 골동품만 애지중지

명나라 문인 풍몽룡(馮夢龍)이 편찬한 (古今譚槪)란 책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른바 서화골동(書畵骨董)에 빠져 먹고사는 것을 나 몰라라 팽개쳐두는 외곬 인간의 전형을 보여주는 오래된 사연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자신을 포함해서 가족들이 끼니도 잇지 못할 형편임에도 고급 예술품과 희귀한 서적, 오래된 골동품을 소장하고 감상하는 유별난 호사 취미를 즐긴다. 범인들은 납득하기 어렵지만 그들만의 독특한 세계를 비난만 할 수도 없다. 위에 나온 팽연재의 경우처럼 극단적인 사례가 조선에도 적지 않다. 극도로 소비적이고 호사스러운 서화골동 애호가가 조선시대 후기에 등장했는데, 에 보이는 손(孫) 노인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서울에 손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 집안이 본래 부자였다. 유달리 골동품을 좋아하기는 했으나 골동품을 감정할 안목은 없었다. 당연히 그에게 가짜 물건을 가져다주고 비싼 값을 받아 챙기는 거간꾼이 많았다. 그렇게 골동품을 사다 보니 결국 노인은 그 많던 재산을 몽땅 거덜 내게 되었다. 그럼에도 노인은 그때까지도 자신이 속임을 당했다는 점을 눈치채지 못했다. 노인은 혼자서 쓸쓸히 방 안에 앉아 단계연(端溪硯)에 오래된 먹을 갈아 묵향을 맡았다. 또 한나라 시대의 자기에 품질이 좋기로 이름난 차를 다려 마시면서 “이것만으로도 굶주림과 추위를 몰아낼 수 있어”라고 말했다. 그런 그를 불쌍히 여겨 아침밥을 가져다주는 이웃 사람이 있었는데, 노인은 그때마다 손사래를 치면서 “나는 중생들이 주는 것은 받지 않아”라고 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손 노인은 결코 양반 사대부가 아니다. 그렇다고 중인 계층으로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평민인 것 같다. 그렇지만 부자였던 손 노인은 귀족이나 지식인 계층의 전유물이라 할 수 있는 서화골동 취미에 맛을 들였다. 재물이 많다고 해서 지식이나 안목까지 자동적으로 높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서화골동을 보는 안목이 뒷받침되지 않았으므로, 돈이 많은 수집가 손 노인은 서화골동품을 중개하는 장사치들의 좋은 표적이 될 수밖에 없다. 진품이 아닌 위조품은 끊임없이 손 노인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안타깝게도 손 노인은 그 사실을 끝까지 몰랐다.

재산을 탕진하여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면서도 저 유명한 명품 벼루 단계연에 낡은 먹을 갈아 향을 맡고, 한나라 때 자기에 이름난 차를 다려 마시는 손 노인의 모습은 바보 아니면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다. 밥을 굶는 주제에 자신을 불쌍히 여겨 밥을 가져다주는 사람에게 “나는 중생들이 주는 것은 받지 않는다”고 오만하게 말하기까지 한다. 손 노인의 사연은 서화골동에 맹목적으로 빠진 괴짜 마니아의 희화화된 모습이다. 그렇지만 이런 부류 사람의 의식구조가 또렷하게 보인다. 평범한 사람과 선을 긋는 극단적 우월감을 바로 값비싼 서화골동품의 소유와 감상이라는 행위를 통해 발산하고 있다.

손 노인의 우스꽝스러운 사연은 여러 가지 현상을 말해준다. 당시 서화골동품 수집 열기와 모조품의 횡행, 그리고 양반 사대부를 벗어나 중인과 서민들에게까지 퍼진 애호 현상이다. 그 현상을 차례로 살펴본다.

서화골동 수집과 감상의 열기는 17세기 이후 18세기와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부유층에 널리 퍼졌다. 당연히 여유가 있는 계층이 이런 열기를 선도했으나 신분이 아니라 경제적 부가 관건이었다. 18세기 전반기에 수집과 감상을 선도한 인물은 바로 상고당(尙古堂) 김광수(金光遂·1699∼1770)였다. 이조판서를 지낸 김동필(金東弼)의 아들로 태어나 벼슬길을 포기하고 오로지 희귀한 서화골동을 수집하고 감상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는 고대의 비석이나 종정(鍾鼎)을 소장했고, 천하의 희귀한 서적을 수집했으며, 서재에서 유명한 향을 피우고, 중국에서 수입해온 고저(顧渚)의 우전차(雨前茶)를 다려 마시며, 단계(端溪)와 흡계(歙溪)의 벼루에 휘주산(徽州産) 먹을 갈아 호주산(湖州産) 붓으로 글씨를 썼다. 온갖 천하 명품으로 사치를 하면서 서화골동의 멋을 누렸다. 하지만 스스로는 “가난으로 끼니가 끊기고 방 안에 아무것이 없어도 금석문과 서책으로 아침저녁을 대신했고, 기이한 물건이 손에 이르면 가진 돈을 당장 주어버리므로 벗들은 등 뒤에서 손가락질하고 식구들은 화를 냈다”고 변명했다. 가난에도 불구하고 서화골동을 즐겼다고 했으나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가산을 탕진하면서까지 수집에 열을 올렸던 것은 사실이다.

이렇듯이 그의 서화골동 취미는 최고급품 소비 지향과 맞닿아 있다. 그가 집을 살 때 뜰에 서 있는 소나무가 아름답다고 하여 소나무값으로 집값보다 더 많은 돈을 치렀다는 일화도 전한다. 괴벽해 보이는 이러한 행위는 고상한 귀족적 취미와 상관이 있다. 이 시기에는 옛 서화를 많이 소장한 것을 고상한 취미로 여기는 풍토가 형성됐다. 마음에 드는 물건이 나타나면, 입고 있던 옷을 벗어주고 곳간의 재물을 다 주고 사는 것을 멋으로 알았다.

극단적 우월감이 호사스러운 취미로 이어져

김광수는 단순한 수집가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수집품을 예술가들에게 제공해 화가 이인상(李麟祥)과 심사정(沈師正), 문인 신유한(申維翰), 서예가 이광사(李匡師)에게 열람을 허락했다. 그의 수집품은 저명한 예술가의 창작에 적지 않게 기여했다. 그러나 그의 서화골동 수집도 만년까지 지속되지는 못했다. 노경에 이르러 “눈이 어두워졌으니 이제는 평생 눈에 갖다 바쳤던 것을 입에 갖다 바쳐야겠다”며 수집한 물건을 내놓았다. 그러나 팔리는 값은 산 값의 10분의 2에 불과했다. 게다가 이까지 몽땅 빠져서 입으로는 국물과 가루음식밖에 들어가지 않았다. 사치스러운 수집가의 말로가 의 손 노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박지원의 ‘관재가 소장한 청명상하도 발문’에 나오는 그의 사연을 보면, 자존심이 강한 성격도 손 노인과 비슷하다.

김광수는 임종할 때 명의 유명한 화가인 구영(仇英)이 그린 (淸明上河圖)를 묘지에 부장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바람과는 달리 그림은 묘에 순장되지 않고 역시 유명한 소장가인 서상수(徐常修)의 소장품이 되었다. 이처럼 김광수는 서화골동 수집의 대명사로 불렸다.

서화골동의 수집과 감상이 유행하자 위조품도 많이 돌아다녔다. 저 손 노인처럼 안목이 없는 사람이 속기 쉬운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감식안이 높다고 하는 사람들도 속는 일이 많았다. 감상안이 높기로 유명한 김광수조차도 가짜 물건에 많이 속았다고 한다. 그의 제자로서 저명한 중인 계층 수집가인 석농(石農) 김광국(金光國·1727~97)이 있는데, 그는 감식안이 높음에도 가짜 물건에 속았다. 그가 소장했던 김부귀(金富貴)의 (駱駝圖)는 중국에서 들어온 가짜 그림이었다. 김광국이 쓴 그림의 발문에 따르면, 김부귀는 그림에 뛰어난 재주를 지닌 조선 출신 화원으로 내각화사(內閣畵士)라고 하였다. 그러나 중국 쪽 자료에는 그런 인물이 없으므로 는 위작인 셈이다. 중국 상인이 비싼 값을 받고 조선의 수집가를 속여 가짜 작품을 판 것이다. 김광국조차도 이렇게 위작에 속았으니 손 노인 같은 부류가 가짜에 속아 넘어가는 것은 일도 아니다. 미술사가인 장진성 서울대 교수가 분석한 결과이다. 현재도 간혹 위조한 고서화를 비싼 값에 사서 애지중지하며 보관하는 사람을 간혹 보게 된다.

위조품에 속아 큰 돈 들이는 경우도

한편, 상류층 사회에 불어닥친 서화골동 수집과 감상 열기는 부유한 중인과 평민들 사회에까지 퍼졌다. 이들 신분까지 열기에 가세한 이유는 사대부 사회의 눈에 뜨이는 호사 취미가 일부 아랫계층 사람들의 모방심리를 자극한 때문이라 할 수 있다. 18세기 이후 부유한 중인이나 평민들이 서화골동 취미에 젖어 들어간 정황은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박지원이 쓴 ‘발승암기’(髮僧菴記)란 글에 등장하는 김홍연(金弘淵)이란 왈자(曰者)가 있다. 그의 신분은 양반이 아니다. 큰 부자인 그가 가산을 탕진해가며 무분별하게 소비하는 물품에는 골동서화가 빠지지 않았다. 그는 집이 본래 부유해서 돈을 물 쓰듯 했고, 고금의 법서와 명화, 칼과 거문고, 골동과 기이한 화초를 널리 수집했으며, 마음에 드는 것을 한 번 보면 천금을 아끼지 않았고, 좋은 말과 이름난 매를 늘 좌우에 두었다.

김홍연처럼 중인과 평민 부유층의 소비생활에는 서화골동을 수집해 집안을 꾸미는 것이 빠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서화골동 수집은 상류문화의 표지가 되어 상류층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이하 계층이 모방하는 대상으로 자리잡았다. 그 때문에 서화를 구입하는 층이 늘어나 유명한 화가들의 경우에는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서화골동의 수집과 감상이 전 계층에 퍼져간 현상은 김홍도가 그린 그림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김홍도 자신이 김홍연처럼 고급 명품과 서화골동의 향유층에 속했다. 누군가 기이한 매화를 팔자 그는 그림값 30냥을 받아 20냥으로 매화 값을 치르고 8냥으로 술을 사서 동인(同人)들을 불러모아 매화 감상 술자리를 열었다. 생활비는 바로 바닥이 났다. 생활감각은 무디고 예술적 취향은 민감하게 발달한 사람의 광적인 행태이다. 서화골동을 수집하고 감상하는 김홍도의 취향은 그림에 자연스럽게 반영됐다. 를 비롯한 몇몇 그림에는 서재 안의 풍경에 값비싼 외국 기호품과 서화골동과 명품 문방구가 자리를 잡고 있다.

19세기 들어 서화골동 취향은 더 확산됐다. 대표적인 사례로 자하(紫霞) 신위(申緯)를 들 수 있다. 신위는 자신의 서재에 놓인 물건 30종을 시로 읊은 적이 있는데, 그가 읊은 물건은 흔한 문방도구에 그치지 않고 대체로 골동품이었다. 조선을 비롯하여 중국과 일본에서 전해진, 오래되고 희귀한 물건이 많이 포함됐다. 중국 고대의 솥과 자기, 옥기를 비롯한 각종 골동품과 문방구가 들어 있고, 조선 골동품으로는 백제 때의 와연(瓦硯)과 고려 때의 비색(秘色) 청자 술잔, 고려 때의 검은 흙으로 만든 들병, 작천석연(鵲川石硯)이 있고, 일본 것으로는 왜척홍창금산수배(倭剔紅創金山水杯), 적간관연(赤間關硯)이 있었다. 그가 소장한 백제 와연에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쓴 “기와는 천년 묵었건마는 벼루는 천연 그대로다”(瓦千年, 硯天然)라는 멋진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었다. 특히 비색 고려청자 술잔은 개성에 있었던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의 고택에서 출토된 물건이라며 다음 시를 지었다.

중인·평민에까지 확산된 ‘명품’ 열기

“고려의 비색 자기는/ 서긍(徐兢)부터 기록에 올랐네./ 분청에 흰 꽃을 품었으니/ 격이 높다고 평한 문헌이 있네.”

고려의 비색 자기를 골동품이나 예술품으로 감상한 분위기가 형성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그런데 신위는 분명하게 고려청자를 예술품으로 보고 이렇게 감상하는 시를 남겼다. 신위는 조선과 일본의 골동품과 문방구까지 차별 없이 사랑한 애호가였다. 신위는 경기도 장단의 옛 무덤에서 출토된 자기에 장편의 시를 남기고, 고려 비색 청자를 예찬한 시를 여러 편 남겼다.

신위는 고려청자 술잔을 얻고서 친구인 성해응에게 아예 사연과 미학을 논한 글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그 글이 바로 ‘안문성자준기’(安文成瓷尊記)다. 이런 사실을 보면, 당시 지식인들의 골동서화 애호 분위기를 얼추 짐작할 만하다. 김정희와 성해응, 유본학 등을 비롯하여 이 시기 문사들의 서화골동 애호는 전 시대 사람들에 비해 더 한층 높아진 안목을 드러낸다. 손 노인의 경우도 그렇지만 위에서 살펴본 사례를 보면, 규모는 작지만 서화골동을 향유하고 매매하는 예술품 시장이 성장해가는 과정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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