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에는 전국 각지에 유랑민들이 많았다. 농토에서 쫓겨난 유랑민들은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저곳 떠돌며 구걸해 먹고살았다. 자연재해가 발생할 때에는 그 수가 급격하게 불어났다. 유민들의 종류와 성격은 복잡해 그들 간에도 차이가 적지 않았는데, 일반적인 걸인과는 꽤 다른 성격의 유민들이 끼어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부류가 바로 약간의 재주와 기예를 보여주고 쌀과 돈을 대가로 받아챙기는 유랑 예인이다. 유사시에는 유민들 틈에 끼어 민란에 참여하기도 했다. 사당패나 솟대쟁이패, 그리고 초라니패와 풍각쟁이패 같은 부류는 상당히 전문적인 기예 집단이었고, 대를 이어 집단을 구성해 높은 수준의 공연을 했다. 이들은 전국을 떠돌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터와 마을에서 공연하고 사람들로부터 공연 사례금을 받아 생활했다.
이러한 직업적이고 전문화된 예인 집단 말고도 두세 명이 한패를 이루거나 혹은 단독으로 재주를 보여서 먹고사는 유랑 예인이 전국적으로 많이 분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대중의 관심을 끌 만한 기예를 보여주어 그들로부터 박수를 받아야만 먹고살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벌이는 재주는 철저하게 대중적 호기심을 유발하고 그들의 동정심을 자극하는 내용으로 짤 수밖에 없었다. 차원 높고 예술적 향기를 풍기는 사대부의 예술적 취향과는 애초부터 길이 달랐다. 이들은 사람들이 꾀는 장터와 골목을 떠돌았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이런 유랑 예인을 정식 예술가로 인정해 그들의 솜씨와 특징을 버젓이 기록해줄 식자는 없었다. 그들이 공연이라고 벌이는 기예를 예술의 차원에서 보기보다는 기이한 구경거리의 시각으로 보았다. 후에는 양반들의 다양한 잔치 자리에 그들이 불려가 공연을 할 만큼 대접을 받기도 했으나 그렇다고 예술성을 인정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장터와 거리에서 민중의 예술적 욕구를 달래주고 기예의 수준을 향상시킨 공연이 늘어나면서 일부 식자들이 그런 유랑 예인의 존재에 관심을 가졌다. 지식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18세기 말엽의 문인인 강이천(姜彛天)이다. 18세기 한양의 다양한 도시 경관을 묘사한 그의 연작시 ‘한경사’(漢京詞)에는 이런 시가 실려 있다.
어려서부터 고향 떠나
객지를 전전하는 부부는
노래와 연주를 배워 익혀
한스럽고 슬픈 사연 풀어놓네.
이리저리 달라고 해도
돈과 쌀은 주지 않고
거리나 가득 메우고
에워싼 사람들뿐.
당시의 대표적인 도시 풍경을 묘사한 ‘한경사’이므로 이 시에 나온 장면은 시장과 거리에서 흔하게 맞닥뜨릴 법한 구경거리였다. 본래 작자는 당시 서울의 대중예술에 깊은 관심을 지녔다. 탈춤놀이를 구경하고서 ‘서울 남쪽에서 탈춤을 구경하다’란 장편시를 짓기도 했다. 위 시에서는 거렁뱅이 부부 한 쌍이 장터에서 노래도 부르고 악기도 연주한다. 둘러싼 구경꾼들은 구경만 할 뿐 돈과 쌀을 던지는 데는 인색하다. 이들의 노래와 연주가 한이 서리고 구슬프다고 한 것으로 보아 악기는 해금이나 피리였을 것이다.
구경꾼들, 돈과 쌀 던지는 데 인색떠돌이 부부 예인은 거지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이렇게 기예로 먹고사는 존재를 강이천은 (梨花館叢話)란 기록에서 다시 언급했다. 어른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라면서 이런 사연을 기록했다. 즉, 전에 서울에 어떤 거지가 있었는데 그가 입으로 연주하는 기예를 잘했다. 입으로 크고 작은 피리와 해금, 젓대를 비롯한 온갖 소리를 함께 내서 (靈山會相) 한 곡을 장엄하고 기묘하게 연주했다. 악기도 없이 소리가 나와서 가만히 들어보면 그의 목구멍에서 온갖 소리가 나왔다. 노래를 부를 줄 아느냐고 물었더니 거지는 “못한다”고 대꾸했다. 피리를 불어보고 가야금을 타보라고 했으나 정작 그런 악기는 연주할 줄 몰랐다. 그저 사람들에게 돈만 구걸했다.
앞서 본 부부와 달리 이 사람은 입으로 악기를 흉내내는 재주를 이용해 구걸하는 거지였다. 그런 기이하고 특이한 재주를 보고 신기해하고 호기심을 보이며 사람들이 꾀는 당시의 정황을 이야기의 행간에서 충분히 엿볼 수 있다.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행인이 모이는 장터에서 이렇게 재주를 파는 유랑 예인이 즐겨 연주한 악기가 다름 아닌 해금이었다. 조수삼의 에 등장하는 유랑 예인도 바로 해금을 연주했다. ‘해금 켜는 노인’이란 제목에 나오는 유랑 예인은 작자가 직접 구경한 인물이다. 작자가 대여섯 살 때 해금을 켜면서 쌀을 구걸하는 걸인 노인을 보았다. 얼굴과 머리칼로 볼 때 대략 60여 살쯤 돼 보이는 걸인이었다. 한 곡을 연주할 때마다 그는 “해금아, 네가 노래 좀 연주하거라!”라는 말을 빠트리지 않고 했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해금은 마치 노인의 소리에 장단을 맞추듯이 연주를 시작했다.
이 걸인의 해금 연주에는 특별한 것이 있었다. 평범하게 음악을 연주하기보다는 해금과 노인이 짝이 되어 마치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연극을 하듯이 연주했다. 아니 음악의 연주가 아니라 이인극 재담 공연 같았다. 그 노인의 공연은 이런 것이었다. 하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콩죽을 배불리 먹은 뒤 갑자기 배탈이 크게 나서 소동이 난 장면을 세세하게 묘사했다. 또 하나는 쥐가 갑자기 나타나 장독대로 들어가자 다급한 목소리로 “저놈의 큰 쥐가 된장독 밑으로 들어간다!”고 냅다 소리를 지르는 장면을 묘사했다. 또 남한산성에 도적이 쳐들어와 사람들이 이리로 달아나고 저리로 숨는 소동 현장을 묘사했다. 조수삼이 가장 재미있게 본 장면은 이 세 가지였다. 여러 장면은 음향이 단조롭지 않고, 복잡하고 다채로우며, 등장인물이 여럿이기도 하다. 적어도 여럿이 있어야 할 장면을 걸인은 해금을 가지고 곡진하게 묘사했기 때문에 듣는 사람은 마치 자신이 그 현장에 있는 듯 착각할 정도였다.
악기로는 전혀 불가능할 것 같은 장면 묘사를 노인은 해금으로 공연해 그 대가로 한푼 두푼 얻어냈다. 노인의 장면 묘사는 묘사 이상의 또 다른 의도가 있다고 작자는 해석해냈다. 이 사연을 두고 조수삼은 이런 시를 지었다.
“늙은 부부는 콩죽을 먹고
배탈이 크게 나 아프다고 소리친다.
큰 쥐란 놈이
장독대에 쌓아놓은 것을
뚫게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해금과 더불어
주고받는 이런 대화는
가만히 듣고 보면 모두가
사람을 깨우치는 글이라네.
장면 묘사가 단순한 흥밋거리에 머물지 않고 사람들의 경각심을 일깨우는 내용이라고 해석했다. 콩죽을 많이 먹으면 배탈이 난다든지 장독대에 쥐가 다니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활의 지혜를 담고 있다고 보았다. 대여섯 살 어린아이를 신기하게 만들었던, 해금과 함께한 이 걸인의 공연에서 조수삼은 인생의 어떤 의의를 캐내고자 했다.
마주 보고 연극하는 듯한 재담이것 말고도 작자는 이 걸인의 특이점을 찾았다. 자신이 환갑이 된 해에 그 노인이 또 집에 찾아와 같은 공연을 하면서 쌀을 구걸했다. 이상해서 노인의 나이를 따져보니 100살을 거뜬히 넘겼다.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과연 조수삼의 추정이 옳은 것일까? 대여섯 살 때 한 번 본 사람을 다시 기억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내 판단으로는 그 걸인은 동일인이라기보다는 똑같은 레퍼토리의 공연을 하며 구걸하는 많은 유랑 예인 중 한 명으로 보는 것이 더 나을 듯하다. 그런 신기한 재능을 생계 수단으로 익힌 익명의 유랑 예인이 한둘이 아니라 제법 많다는 현실을 조수삼은 미처 깊이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도시와 시골 마을에 흔하게 나타나 작은 공연을 벌이고 약간의 돈을 대가로 받는 이 해금 연주자들은 이른바 ‘거지 깡깡이’라고 천하게 부르는 직업적 유랑 예인이었다. 여기서 깡깡이는 해금을 천시해 부르는 말이다. 당시부터 근대까지 해금을 연주하며 구걸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해금과 피리는 그런 민중이 애호하는 대표적인 악기였다.
흥밋거리 넘어 경각심 일깨워18세기 후반의 학자 유득공(柳得恭)이 쓴 에서는 해금이 유랑 예인의 악기로 이용된 상황을 우회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작자가 언젠가 해금을 얻어 연주했더니 친구인 서상수(徐常修)가 듣고는 깜짝 놀라 “좁쌀이나 한 그릇 퍼줘라. 이건 거렁뱅이 깡깡이다”라고 외쳤다. 어리둥절한 작자가 “무슨 말이냐?”고 묻자 서상수는 “자네는 음악을 전혀 모르는군. …유우춘과 호궁기는 나란히 해금으로 유명하네. 자네가 해금을 좋아한다면 어째서 그들을 찾아가 배우지 않고 어디서 이 따위 거렁뱅이 깡깡이 소리를 배워왔나? 거렁뱅이는 깡깡이를 들고 남의 문전에서 영감, 할멈, 어린애, 온갖 짐승, 닭, 오리, 풀벌레 소리를 내고는 좁쌀을 던져주면 자리를 뜬다네. 자네의 해금 연주가 바로 이런 꼴일세”라고 핀잔했다. 그 말을 듣고서 정말 부끄러워했다고 유득공은 기록했다.
서상수가 핀잔한 것처럼 해금 연주자는 수준 높은 전문 악사도 있는 반면 대충 연주해 문전걸식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부류도 있었다. 그가 한 말의 행간에서 그런 부류의 연주가 도시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의 하나였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런 거렁뱅이가 연주하는 것은 정통의 고아한 음악이 아니라 영감과 할멈과 어린애를 비롯한 온갖 짐승의 소리를 흉내내는 것이었다. 여기서 영감과 할멈을 흉내낸다는 것은 앞서 해금 켜는 노인이 콩죽 먹고 설사하는 늙은 부부를 흉내낸 것도 포함될 것이다. 해금으로 흉내내기 좋은 레퍼토리가 많았고, 연주자의 능력과 기호에 따라 선택해 장기로 삼았을 것이다. 마치 신라 때 백결 선생이 거문고로 방아 찢는 소리를 모사했듯이, 악기로 현실 생활의 다양한 장면을 모사해 재미있게 재현하는 공연은 당시에 대중의 호기심에 부응하는 대중적 예술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해금은 그런 장면의 모사에 아주 적합한 악기로 애용되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해금으로 장면을 모사하는 기예가 성행했을까? 예전에 구기(口技) 전문가 박뱁새의 사연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조선 후기 대중사회에서 흉내내기는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단순한 성대모사의 수준에 머물지 않고 고난도의 장면을 모사하는 단계를 공연으로 연출했다. 주로는 입으로 모사했으나 악기를 이용해 모사하는 기예도 상당히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 그 방법이 일정하게 표준화해 거지들도 그런 재주를 활용해 구걸을 한 것으로 보인다. 조수삼이 직접 구경한 노인은 그들 가운데서도 솜씨가 좋은 축에 속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눈을 돌려보면, 이러한 장면 모사 기예는 당시 동아시아 각국에서 대중적인 문화로 널리 퍼져 있었다. 조선과 밀접한 명나라 말엽에는 대도시에 악기를 이용한 모사의 기예가 성행했다. 조선에서는 해금이 이용됐으나 중국에서는 비파가 이용됐다. 사례를 한 번 보자. 명말 청초의 학자가 쓴 (寄園寄所寄)란 필기(筆記)에는 이근루(李近樓)라는 북경의 유명한 맹인 악사의 재능이 소개됐다. 비파를 절묘하게 연주하는 그는 특히 장면 모사에 뛰어났다. 한평생 쌓인 나그네의 설움과 같은 감정을 절묘하게 표현했는데, 얼마나 잘 연주하는지 사람의 머리털을 위로 솟구치게도 하고 눈물이 마구 흐르도록 만들기도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소리를 바꿔 범패 소리를 냈고, 다시 손오공이 서역으로 떠나는 장면을 시원스럽게 묘사했다. 사냥할 때 온갖 짐승들이 울부짖는 을씨년한 장면도 비파 하나로 곡진하게 잘 나타냈다. 이 책에는 얼마나 장면 묘사에 뛰어난 재능을 지녔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일화가 소개되었다.
명나라에선 모사 악기로 비파 이용“시어(侍御) 벼슬을 하는 아무개가 언젠가 소납암(蘇納菴)이란 분에게 ‘내가 여러 해 서울에 머물면서도 이근루의 비파 연주를 듣지 못했으니 유감’이라고 말했다. 얼마 뒤 그가 황명을 받들어 사천성으로 가야 했다. 소납암이 사천성 사람이라 홀로 그를 배웅했다. 술이 거나해지자 ‘미인이 술 한잔 권해도 좋겠지요?’라고 물었더니 시어가 그러면 안 된다고 거절했다. 그때 문득 병풍 안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는데 소납암이 방금 말한 그 미인인 듯했다. 또 늙은 기생이 나타나 그 미인이 웃는 것에 화를 내면서 길게 소리를 지르며 혼냈다. 조금 이따가 미인이 말을 듣지 않고 욕지거리를 하며 그릇을 바닥에 내동댕이쳐서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들렸는데 하나하나 실제와 똑같았다.
몹시 겁이 난 시어가 일어나 도망하려고 하자 소납암이 웃고서 ‘괜찮습니다!’라며 병풍을 치우라고 했더니 장님 하나가 비파를 안고 앉아 있을 뿐 다른 물건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모든 소리가 비파에서 나온 것이었다. 시어가 깜짝 놀라며 ‘오늘에야 이근루를 만났구려!’라고 했다. 그 뒤 밤새도록 비파를 듣고 길을 떠나지 않았다.”
신기에 가까운 장님 악사의 비파 솜씨를 묘사했다. 젊은 기생과 늙은 기생이 그릇을 던지며 싸우는 장면을 비파만을 이용해 그야말로 리얼하게 묘사한 능력이 사연만으로도 경탄을 자아낸다. 이 저작의 저자는 청나라 당시에 북경을 비롯해 큰 도시에는 이 기예를 잘하는 이가 제법 있다고 전했다. 이런 정도라면 그야말로 예술이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안대회의 조선의 비주류 인생’은 이번호로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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