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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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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악사, 김성기 ‘라인업’


전설이 된 음악인 김성기, ‘스승과 제자’ 관계 더듬어보며 재조명한 그의 삶
등록 2009-01-23 14:40 수정 2020-05-03 04:25

각 시대에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 음악인이 있게 마련이다. 를 보면, “금객(琴客) 가객(歌客) 다 모였구나! 거문고 임종철이, 노래에 양사길이, 계면(界面)에 공득이며”라는 대목이 등장한다. 여기에 나오는 임종철·양사길·공득이는 이 가사가 만들어지던 시대에 내로라하는 인기 악사들이었다. 세월과 함께 그들의 명성은 씻은 듯이 사라졌지만…. 어떻게 보면, 음악인만큼 명성이 쉽게 사라지는 존재도 없으리라.

조선의 악사, 김성기 ‘라인업’.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조선의 악사, 김성기 ‘라인업’.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창밖에서 왕세기의 연주 엿들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도 명성이 남아 전설이 된 악사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김성기(金聖器·1649~1724)가 그런 악사다. 거문고와 퉁소, 그리고 작곡, 시조로 명성이 났다. 그가 죽은 지 100년 가까이 되는 조수삼의 시대에도 그의 음악과 행적을 두고 이야기할 만큼 그의 명성은 오래되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의 인생과 예술은 그만큼 아름답고 감동적인 대목이 많다.

그런 연유로 나는 그의 인생과 예술을 재구성해 이란 책에서 다룬 적이 있다. 제법 많은 자료를 동원해 자세히 살폈으므로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듯했다. 그러나 최근에 장유승 선생이 임상정(林象鼎·1681~1755)의 문집 (自娛錄)에서 김성기와 그 제자를 다룬 새 글을 찾아 에 발표했다. 그 글 덕분에 그의 삶에서 큰 의문이 남는 대목이자 깊은 인상을 던지는 대목인 스승과 제자 관계를 재조명할 근거가 생겼다. 그 점에 초점을 맞추어 그의 삶을 다시 한번 조명해보고픈 욕심이 들었다.

먼저 김성기가 어떤 인물인지를 간단하게 짚어보자. 그는 숙종 연종 연간의 저명한 음악이다. 조수삼이 활약하던 19세기 전반으로부터 거의 150년 전에 활동한 악사이다. 그는 과거 음악을 철저하게 공부한 바탕 위에서 새로운 음악을 창조해 그만의 악보를 만들었고, 현재 그 악보가 전해진다. 그는 숙종조 최고의 악사로 평가를 받았다. 장악원에 소속되어 음악을 연주했으나 장년기 이후에는 완전히 세상과 인연을 끊고서 현재의 서울 마포 강가에 숨어버렸다. 세상을 버리고 마포 강가에 숨어버린 행적조차 신비롭다.

그는 너무도 유명해서 그가 누구로부터 음악을 전수받았고, 또 누구에게 전해주었는지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관심을 표했다. 조수삼은 에서 그런 호기심을 극단적으로 표현했다.

“거문고 악사 김성기는 왕세기(王世基)로부터 거문고를 배웠다. 왕세기는 새 음악을 만날 때면 언제나 비밀에 부쳐두고 전수하려 하지 않았다. 김성기는 밤이면 밤마다 왕세기 집으로 가서 창 뒤에 바짝 붙어서 몰래 훔쳐 들었다. 다음날 아침이면 하나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연주하였다. 그런 사실을 너무 의심스럽게 생각한 왕세기가 어느 날 밤 거문고 곡을 연주하다 미처 반도 끝내지 않았을 때 별안간 냅다 창문을 열어젖혔다. 김성기가 깜짝 놀라서 땅바닥에 거꾸러졌다. 왕세기는 그제야 그를 크게 기이한 사람으로 여기고 그가 지은 것을 모조리 김성기에게 전수하였다.”

해당 내용의 전체 문장이다. 의 글치고는 변격이다. 다른 글은 대체로 인물의 집안·출신·지역을 설명하는 내용을 앞세우지만 이 글만은 그런 도입부가 없다. 새삼스럽게 그의 인생 내력이나 소소한 행적을 밝힐 필요가 없다고 작자는 본 듯하다. 그만큼 그에 관한 정보는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내용은 순전히 김성기가 스승인 왕세기로부터 음악을 전수받는 하나의 에피소드만을 다뤘다. 새 음악을 전수받기 위해 밤마다 스승의 집 창문 뒤에 숨어서 창틈으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고 공부하는 김성기! 음악의 비밀을 감추려는 왕세기가 낌새를 차리고 냅다 열어젖힌 창문 사이로 마주친 두 눈동자! 스승과 제자 사이에 음악을 매개로 교감이 이루어져 제자에게 자신의 모든 음악을 전해준다는 사연이다. 조선시대에 음악하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 음악의 전승이 얼마나 비밀스럽고 엄격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홍복원→이지윤→김성기’ 밝힌 남원군

김성기 사후 거의 100년 뒤 인물인 조수삼이 스승과 제자 사이의 일을 어떻게 이렇게 상세히 묘사할 수 있었을까? 어떤 기록을 보았거나 선배로부터 들어서 재생해놓았을 텐데 아쉽게도 그 종적을 찾을 수 없다. 더욱이 왕세기란 인물은 오로지 이 기록에만 등장한다. 과연 왕세기는 누구일까? 이 사연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적으로 신빙하기가 어렵다. 왕세기란 인물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으며, 다른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는 사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김성기의 삶과 음악에서 스승으로부터 음악을 전수받고 제자에게 다시 전수하는 것이 신비롭고 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의 음악 스승과 제자에 얽힌 사연의 진실은 무엇일까? 그 뒤를 추적해보자.

정래교는 만년의 김성기를 직접 만난 문인이다. 정래교는 그가 죽은 뒤에 그의 전기를 지었다. 본래는 상의원(尙衣院)에서 활을 만드는 장인인 김성기가 음악을 좋아해 일터에 나가 물건을 만들기는커녕 남의 뒤를 따라다니며 거문고를 배웠다고 전기에서 기록했다. 하지만 그가 거문고를 배운 인물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그런데 새로 발굴된 임상정의 에는 그의 스승을 언급한 대목이 나온다. 임상정은 장악원정(掌樂院正)까지 지낸 만큼 음악에도 조예와 관심이 깊었다. 그가 언젠가 김성기의 제자인 남원군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공은 거문고 솜씨를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았습니까?”

“맞네. 자네는 예전에 어은(漁隱) 김성기란 분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가? 그분이 바로 내 거문고 스승일세. 옛날 융경(隆慶) 만력(萬曆) 연간에 홍복원(洪復元)이라는 사람이 거문고로 유명하여 중국 사신으로부터 칭찬을 들었네. 홍복원은 이지윤(李志尹)에게 전수했고, 이지윤은 어은에게 전수했네. 이것이 내가 거문고 솜씨를 전수받은 유래일세.”

김성기가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는 시기에 그의 수제자인 남원군으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다. 김성기의 스승은 이지윤이고, 이지윤의 스승은 홍복원이 틀림없다. 그가 장악원 소속이었으므로 이지윤과 홍복원 모두 장악원 소속 악사였을 것이다.

남원군을 포함해서 4대째 이어지는 사승(師承) 계보가 명확하게 밝혀졌다. 끈끈한 사승 관계는 음악의 전승을 책임지는 악보 만들기로 표현되었다. 김성기는 속악(俗樂)이 갈수록 어지러워지는 현상을 염려해 홍복원과 이지윤 두 스승이 전해준 곡을 책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오류를 바로잡는 작업을 마치지 못한 채 세상을 떴고, 남원군이 뒤를 이어 악보를 완성했다. 현재 전해지는 김성기의 악보인 (浪翁新譜)에는 각각의 곡마다 누가 채보했는지를 밝혀놓았는데 대부분의 곡 하단에는 ‘원태전기’(原台傳記)라는 네 글자가 쓰여 있다. 여기서 ‘원태’는 남원군(南原君) 대감을 지칭하고, ‘전기’는 낭옹의 음악을 전해서 기록한다는 의미다.

맹인 악사 주세근에게 ‘묘법’ 남겨

이렇게 해서 김성기의 스승과 제자는 분명하게 밝혀진 셈이다. 물론 스승과 제자가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럿이 있을 수 있으므로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 임상정과 비슷한 시대의 학자인 이영유(李英裕)가 쓴 글에서 그런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가 쓴 에는 그의 또 다른 제자인 맹인 악사 주세근(朱世瑾·?~1749)이 등장한다. 스승이 죽은 해인 1724년 겨울의 기억을 되살려 주세근이 말한 내용이다. 죽기 직전 서강으로부터 성 안에 들어온 김성기는 주세근의 손을 붙잡고 빈집의 밀실로 데리고 들어가 쓸쓸히 마주 앉아 비파를 꺼내놓고 몇 곡 탔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는 고려의 옛 가락이다. 고려의 옛 가락은 오로지 이 곡만 남아 있다. 개성 기생 황진이로부터 나온 이 곡은 김성천(金成川) 댁의 여종이 악기를 탈 줄을 몰라 입으로 연주하여 내게 전해주었다.”

그는 성천부사를 지낸 김아무개 집의 여종으로부터 고려의 옛 가락을 배웠다고 했다. 그 곡이 저 유명한 개성 기생 황진이로부터 전해졌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진실성은 차치하고라도 신비스럽게 꾸며진 느낌이 든다. 황진이에 얽힌 사연은 너무나 세속화돼서 그녀를 거론하면 진실성이 사라질 듯하다. 하지만 황진이는 거문고 연주에서 최고라는 평을 받은 악사였고, 그녀가 소장한 거문고는 귀중한 물건으로 취급되어 19세기까지 전해졌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공교롭게도 김성기가 복원해놓았다고 하는 옛 음악인 (數大葉 平調 第一)의 곡은 황진이의 시조로 널리 알려진 “어져 내 일이냐 그릴 줄을 모르더냐/ 있으라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이다. 그가 황진이로부터 전승됐다고 하는 고려의 옛 가락이 이 시조를 직접 가리키는지는 알 수 없으나 황진이가 전래한 음악과 관련성이 있을 법하다.

이야기가 옆으로 흘렀으나 어쨌든 김성기의 음악에는 고려 음악의 전통이 담겨 있다는 말이 된다. 왕세기도 옛 음악을 되살리려는 그의 노력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온 인물은 아닐까? 더욱이 왕세기의 성에서 알 수 있듯 그가 고려 유민이라는 점도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다.

그는 주세근에게 “나만이 이 곡을 연주하여 묘법(妙法)을 터득했다. 끔찍이 아껴서 남에게 가르쳐주지 않았던 곡이다. 이제 나는 늙었다. 네게 전해줄 테니, 남에게 가볍게 전하지 않는 것이 옳다”라고 말했다. 어렵게 배운 기량과 곡을 함부로 남에게 가르쳐주지 않는 전통을 따르라고 당부했다. 제자들도 자신이 배운 것처럼 따라 하기를 바랐다.

실상 이러한 방식은 음악만이 아니라 전통사회에서는 어떤 분야든 공통이다. 스승으로부터 전수받는 방식이 그대로 제자한테 전수하는 방식이 되었다. 한번 스승과 제자로 인정하면 부자간의 관계처럼 모든 것을 전해주었다.

임상정의 글로 돌아가 이제는 김성기를 스승으로 모시고 배운 제자들의 행적을 보자. 앞서 주세근도 그렇지만 제자들에게 김성기는 카리스마가 강한 스승이었다. 그 가운데 종친인 남원군은 신분이 천한 악공을 스승으로 깍듯이 모셨다. 천한 자를 스승으로 모실 수 있느냐고 누군가 문제제기를 했을 때 남원군은 “재능이 있는 곳이 바로 스승이 있는 곳이다. 나는 재능을 스승으로 삼을 뿐 귀천이 있고 없고는 모른다”라고 말했다.

남원군은 스승이 죽은 뒤에도 사모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다. 그가 스승의 무덤을 찾아가 추모의 의식을 치르는 모습은 음악하는 스승과 제자 사이가 얼마나 끈끈하고 절실한 정으로 연결되었는지를 인상 깊게 보여준다.

스승의 무덤에서 연주하는 제자들

남원군과 이현정을 비롯한 제자들이 스승을 그리워해 가기(歌妓) 대여섯 명을 데리고 무덤을 찾아가 술과 안주를 올렸다. 술을 붓고 나서 남원군이 직접 몇 곡을 연주하고, 다른 제자들은 각자 익힌 곡을 연주해 하루 종일 마음을 위로하다가 연주를 마치자 대성통곡하고 돌아왔다. 이때의 일을 신익은 장례를 치를 때의 사연으로 비장한 파토스를 담아 묘사했다.

“김성기가 죽자 이현정은 남원군과 함께 시신을 지고 광릉(廣陵)의 산에 가서 장사를 지냈다. 그때 하늘의 구름은 빛을 바꾸었고, 산골짜기에는 어둠이 몰려왔다. 새와 짐승들은 모여들어 구슬프게 울면서 오르내렸다. 둘은 큰 잔에 술을 따라 무덤 위에 뿌리고 서로 마주 보고 통곡하였다. 통곡을 마치자 거문고를 안고서 제각기 자기가 배운 것을 연주하였다. 연주를 채 마치지도 않았는데 백양나무에서 처량한 바람이 일어나 우수수 소리를 내었다. 둘은 거문고를 던지고 다시 대성통곡하였다. 길가를 지나던 사람들은 누구도 그들이 왜 그러는지를 몰랐다.”

남원군은 스승의 장례를 치르고서 이런 시를 지었다.

백아(伯牙)의 거문고를 막 청산에 묻었으니

천하에는 이제부터 옛 음악이 끊어졌네.

필마로 홀로 왔다 다시 홀로 떠나면서

몇 줄기 눈물만을 가을 하늘에 뿌리노라.

거장을 잃고 난 세상의 적막감과 위대한 스승을 보낸 제자의 고독감이 필마 타고 홀로 왔다 홀로 간다는 표현에 스며 있다. 김성기의 스승과 제자들의 사연에는 그 시대 음악인의 열정과 순정이 느껴진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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