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레드 기획] 추억을 팝니다, 설렘을 사세요

박수진 기자, 지극히 주관적인 ‘적정가’의 책 33권을 싸들고 ‘와우북페스티벌’ 헌책 판매에 뛰어들다
등록 2008-10-10 15:10 수정 2020-05-03 04:25
<font color="#006699">헌책의 새로운 기억
존 맥스웰 해밀턴은 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새 책이 더 많이 나올수록 서점에서 다룰 수 있는 새 책의 권수는 줄어든다. 얼른 팔려나가지 않는 책은 다른 책들의 물결에 밀려 출판사로 반품된다. …그리하여 오늘날 책의 유통기한은 요구르트의 유통기한과 같다.”
새책은 망각을 위해서 헌책은 기억을 위해서 존재한다. 책들이 대형 서점에서 빠르게 잊혀질 즈음, ‘헌책방’에서는 공평하게 쌓여서 ‘발견’을 기다린다. 헌책방은 책을 오래 살게 한다. 그리고 여러 삶을 살게 한다. 1년 전에 산 뒤 애물단지 같았던 책이 누군가에게는 보물과도 같다. 못하는 것이 없는 ‘랜선’이 헌책 유통에도 새 시대를 열었다. 사람들은 이제 랜선을 타고 ‘책’을 주고받는다. 온·오프라인 ‘책 시장’에서 책을 주고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font>
9월27일 서울 홍익대 주차장 거리에서 열린 와우북페스티벌의 ‘와우책시장’에서 판매자로 책을 팔았다. 책에 담긴 ‘나의 추억’도 함께 팔았다.

9월27일 서울 홍익대 주차장 거리에서 열린 와우북페스티벌의 ‘와우책시장’에서 판매자로 책을 팔았다. 책에 담긴 ‘나의 추억’도 함께 팔았다.

“이거 얼마예요?”

33살 한 여성이 물었다. 그가 집은 책은 . 머리털 나고 처음 바다를 건너는 비행기를 타고 도쿄로 갈 때, 보물단지처럼 끼고 갔던 책이다. 지도가 자세하지 않아 불편했지만 책장에 꽂혀 있는 걸 볼 때마다 도쿄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팔려고 꺼낼 때는 여행의 설렘이 재생됐다. 그 설렘을 팔고 싶었다. 그래서였나? 가격부터 말하지 않고, “도쿄 가실 거예요?”라고 물었다. “올해 3월에 오사카 자유여행 끊었다가 집안 반대로 포기했어요.” 그는 청각장애가 있고, 일본말을 하나도 모른다. 생계 수단으로 누드모델 일을 하는 그는 도쿄여행 자금으로 돈을 모으는 중이라고 했다. 내 가격 결정 기준에 따르면 5천원을 받고 싶었지만 3천원으로 결정했다.

기준은 ‘내 추억’ ‘책에 대한 나의 평가’

“이거 얼마예요?”라는 반가운 첫 질문을 들은 건 9월27일 오후 2시30분께. 서울 홍익대 앞 주차장 거리에 여행용 가방을 끌고 나와 그 안에 마구잡이로 담겨 있던 책을 꺼내 진열하려는 순간이었다. 사람들이 자기 책을 가져와 팔 수 있는 ‘책시장’이 열리는 서울와우북페스티벌에 도착한 지 5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한 권도 못 팔고 그대로 집으로 가져가는 건 아니겠지.’ 이날 아침에 했던 걱정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33권의 책이 든 여행용 가방을 끌고서 지하철을 타고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계단을 세 번이나 오르락내리락했던 괴로움은 ‘편도’로 끝내자. 암.

가격을 물은 이는 초록색 비니를 쓴 ‘옆집’(옆에서 자리를 펴고 책을 팔고 있는 집) 총각이었다. 그는 무질서하게 꽂혀 있는 책들 중에서 눈 밝게 이언 매큐언의 을 집어들었다. “제가 요즘 이언 매큐언을 모으거든요.”

‘역시 요즘은 매큐언이 대세군.’ 지난 설 처음으로 ‘나 홀로 여행’을 간 홍콩에서 짬짬이 읽은 책이었다. ‘우정은 잘난 척하는 인간들의 빛 좋은 장식품’ ‘개인주의의 구린내’. 읽으면서 이런 냉소적인 생각들을 했던 것 같다. 회상도 잠시, 질문에 답해야 하는데, 가격을 정하지 않았다. 출판사가 가격을 정할 때는 제작비, 유통비, 마케팅비, 저자에게 주는 인세, 번역료, 저작권료 등 1권의 책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유·무형의 비용을 고려한다. 나는 이와 무관하게 ‘내 추억’과 ‘책에 대한 나의 평가’ 등을 기준으로 가격을 매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대뜸 “4천원”을 불렀다. 9800원짜리 신간이지만, ‘나 홀로 여행’에서 읽기에는 적절하지 않았으므로 4천원이다. 옆집 총각 박상돈(31)씨는 두말 않고 선뜻 지갑을 열어 1천원짜리 지폐 네 장을 건넸다.

그는 몇 편의 단편영화를 찍은 영화감독이자 영상산업 전문지 기자다. 홍익대 근처에 살면서 3년간 ‘책 벼룩시장’이 벌어지는 와우북페스티벌을 구경했단다. 4회째인 올해는 직접 참여해보자고 결심했다. 그의 책방에는 등 전문서적이 많았다. 책을 팔기도 했지만 사기도 했다. 팀 버튼의 , 듀나의 , 시오노 나나미의 를 이미 산 상태에서, 내게서도 외에 폴 오스터와 소피 칼이 함께 지은 등 두 권을 더 사갔다. “물물교환도 하고 싶은데, 제가 사려는 책 주인들이 내 책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더라고요.” 박씨가 뒷머리를 긁었다. ‘책시장’은 단지 팔기만 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옆집에 뭐 좋은 책 없나’ 호시탐탐 살피면서 책의 공유가 이뤄지는 곳이다. 판매자와 구매자의 호환이 자유롭다.

매년 9월 또는 10월에 열리는 책잔치 와우북페스티벌 행사 중 하나인 ‘와우책시장’에서 책을 팔기 위해서는 마련된 온라인 홈페이지에 미리 신청하면 된다. 당일에는 여행용 가방이나 자동차 등을 이용해 팔고 싶은 책과 돗자리, 천 등 책을 전시하는 데 필요한 ‘깔개’만 가져오면 된다. 워낙 즉흥적인 인간인지라 책시장이 열리기 전날 새벽에야 ‘책을 팔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미리 예약을 못해 걱정하며 9월27일 아침 사무국에 전화를 했더니 구석에 한 자리 있으니 나오란다(나왔더니 빈 자리가 꽤 많았다). 이날 미리 예약하고 책을 팔러 나온 팀은 모두 40팀. 자동차를 밀어내고 생긴 약 50m쯤 되는 거리에 자신이 ‘소장하던’ 책들을 내놓고 팔았다.

초등학생과 그들의 엄마로 이뤄진 팀도 눈에 띄었다. 서울 시흥동 동광초등학교 2학년 3반 아이들이었다. 선생님이 “1명당 10권만 가져와서 팔라”고 했다는 아이들은 주로 서로의 책을 교환하느라 바빴다. “내 책 재밌어.” “이 볼래?” 황보연양의 어머니 이창령씨는 “보연이가 처음에는 다 본 책인데도 ‘왜 남을 줘야 돼냐’며 뚱해 있더니 막상 와서는 다른 책들에 눈이 팔려서 재미있어했다”고 말했다.

판매자 ‘감흥 없음’ 구매자 ‘심봤다’

중학교 국어 선생님이라는 ‘앞집’ 이종은(36)씨는 “두 권씩 있는 책, 한 번 읽었지만 다시는 안 볼 것 같은 책들을 필요한 사람, 보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싼값으로 주고 싶어서 가져왔다”고 말했다. 그는 “어떤 사람이 어떤 책을 사는지 사람 구경하는 재미, ‘뭘 살까’ 고민하는 이들에게 ‘이거’라고 골라주는 재미도 쏠쏠하다”고 말했다. 이씨는 이외에도 직접 만든 책갈피와 엽서, 손수 찍은 사진들을 프린트하고 제본한 여러 종류의 ‘북아트’ 작품들도 함께 전시해 지나가는 사람의 눈길을 붙들었다.

사람들은 이 책 저 책 보기보다 필요한 책을 딱 골라갔다. 값이 싸서인지 고민도 적었다. 철도노동조합에서 일한다는 한 노조 집행부원은 “요즘 성명서를 쓸 일이 많다”며 강준만 교수의 을 사갔다. 상대방을 효율적으로 설득하는 법에 대해 주제별로 설명한 책이다. 노동운동에 발전이 있길. 게임 원화 디자인을 한다는 주용남(25)씨는 눈을 반짝이며 프랭크 밀러의 그래픽 노블 1권과 채소 ‘무’ 캐릭터가 귀여운 야마자키 다케시의 만화책 를 사갔다. 시가 9천원의 를 4천원에 팔았다. 손자국도 없이 깨끗하게 딱 한 번 본 책이다. 영화 을 보고 그래픽 노블에 관심을 갖고 야심차게 구매했으나, 내 취향은 아니었다. 별 생각 없이 내놓은 책인데, ‘심봤다’는 표정으로 책을 사는 손님을 보니 9천원을 주고 산 책이 1만8천원이 되는 기분이었다. 가치의 무한증식이다.

올해 와우책시장은 9월27~28일 이틀간 열렸다. 27일 40팀, 28일 35팀이 참가했다. 와우책시장은 내년에도 계속된다.

올해 와우책시장은 9월27~28일 이틀간 열렸다. 27일 40팀, 28일 35팀이 참가했다. 와우책시장은 내년에도 계속된다.

취향도 눈에 보였다. 가게를 연 지 1시간쯤 지났을까. 잘 다린 베이지색 면바지를 입은, 40대 초반쯤 돼 보이는 남성이 내 책방으로 왔다. 유심히 책들을 들여다보더니 두 권을 집었다. 와 . 는 에너지 소비량을 줄이고 탄소 배출량을 줄이기 위한 세계 ‘착한 시민’들의 실천 방안을 소개하는 책이다. 누군가가 동참했으면 혹은 문제의식을 공유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트렁크에 집어넣었던 책이다. 책을 유심히 살펴보다 결국 사지는 않은 그분은, 다른 집을 돌아다니며 주로 등의 책을 꺼내봤다. 책시장에서 여유를 사려는 사람 같았다.

‘완판’ 비결은 밤잠 설친 선별작업?

등 마니아 시트콤 드라마의 작가 조진국씨도 가게에 들렀다. 헉, 유명인이! 그는 이지민의 소설 와 일본의 ‘김삼순’ 두 권 사이에서 서성거리더니 를 사갔다. 지나간 다음에야 그분이 그분임을 알고 ‘이번엔 여성 심리 드라마 한 편?’ 생각하며 내 마음대로 다음 작품을 예견했다.

이날 최대의 마케팅 실패는 이 한마디였다. “실연에 좋아요.” 를 집어든 한 여성에게 대뜸 던진 말이었다. 연애가 복잡하고 골 아픈 단계로 접어드는 상황, 그 어떤 황당하고 미묘한 상황에서도 딱 한마디로 ‘그건 그가 당신에게 반하지 않아서야’라고 정리해주는 이 책은 이별에 명약이다. 그러나 결국 손님은 ‘이별을 예고하는 나의 말’을 뒤로하고 사라져버렸다.

이날 30권의 책을 가져와 모두 팔아치운 만화잡지 편집자 김송은씨는 “뛰어난 아이템 선정과 책에 대한 야무진 설명”을 ‘완판’(모두 판매)의 비결로 꼽았다. 김씨는 유난히 수완이 좋았다. 그의 옆집에서 ‘판매자’로 놀고 있는 아이에게 “너 봤지? 이건 그 작가가 쓴 거야”라고 말하며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를 파는 식이었다. 김씨는 돌베개에서 나온 3만8600원짜리 양장본 , 들녘에서 나온 디트리히 슈바니츠의 등 내실 있는 책에서부터 같은 베스트셀러류, 신경숙의 처럼 팬을 확보한 작가의 오래된 소설까지 두루 판매목록에 넣어, 빛바랜 옛날 책을 100여 권 가져와 양으로 승부하는 다른 판매자들 사이에서 ‘시장성’을 확보했다. 김씨는 “내가 앞으로 절대 읽지는 않겠지만 나는 아니더라도 누군가에게는 가치 있을 만한 책들을 고르느라 밤잠을 설쳤다”고 말해 ‘완판’ 전의 고민을 살짝 비쳤다.

트렁크 속의 아우성

나는 이날 모두 19권의 책을 6만6400원을 받고 누군가에게 ‘분양’했다. 책에 담긴 나의 추억도, 설렘도 함께 분양했다. 미처 분양하지 못한 채 트렁크 안에 남아 있는 책이 14권. 지난해 표지이야기 기사의 소재를 제공하기도 했던 비르지니 데팡트의 , 프랑스의 역사청산을 잘 해석·전달하고 있는 이용우의 , 괜찮은 판타지 미스터리 작가 조너선 캐럴의 등이 아우성치고 있다.

책장을 잘 살펴보면, 옛날에 좋아했지만 한동안 펼치지 않았고 앞으로도 펼치지 않을 책, 좋아하지만 잘 기억하고 있어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책, 괜찮은 책이지만 보지 않을 것 같은 책들이 두루 아우성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런 책들이 돌고 돌면, 잠자고 있던 책의 가치가 사람들의 손을 타며 두 배, 세 배가 된다. 를 사간 여성이 나중에 전자우편으로 전해온 또 하나의 설렘처럼. “아직 도쿄에 가진 못했지만 책에 나와 있는 사진, 풍경, 아기자기한 소개글 때문에 간접적인 여행을 하는 기분이예요.”

또 다른 책 벼룩시장이 10월11일에 서울 신촌(참가신청 10월10일까지 bookoa@hanmail.net)에서, 10월25일에는 경남 김해(〃 10월20일까지 backlit@naver.com)에서 열린다.

글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