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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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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디테일하게 얘기를 해봐

등록 2008-08-04 15:00 수정 2020-05-02 19:25

‘이야기 욕망’ 터져나오는 광고, 노래, 출판… ‘구체적인’ 온라인 스토리텔링이 오프라인의 주도적인 흐름으로

▣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한없이 낮은 이의 중얼거림

이야기는 약한 자들의 것이다. 약(藥)한 자들도 많이 떠들어대긴 하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건 약(弱)한 자들이다. 약한 자들은 말이 많다. 어디 기댈 데가 없으니 자기밖에 믿을 사람이 없으니 혼자서 세상을 어깨에 진 듯이, 말이 끊어지면 세상이 무너질 듯이 쏟아낸다. 말씀 받는 자가 혹시 마음이 상할까봐 웃음도 가끔 추임새로 넣어준다. 그 말을 들은 자는 몇 마디면 족하다. 예스(Yes) 오어 노(No). 혹 말씀 받을 자가 듣지 않을 때는 농도 조금 곁들인다. 현실에 딱 붙는 언어가 사람 잡는 시대다. 공자 왈 맹자 왈 했다가는 프락치로 의심받는다. 그나저나 말귀 못 알아듣는 사람 앞에서 말할 때는 정말 복장 터진다.

어떤 남자, 스물일곱에 2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직장에 취직했고, 스물여덟에는 세 번째 이별을 했다. 그는 지금 ‘에스프레소의 맛을 아는’ 서른 살이 되었다. 커피 광고에 출연하는 원빈은 앨범식으로 넘어가는 사진 속에서 자신을 이렇게 프로필화한다. 송승헌은 어떤가. 자동차 광고에서 서른 살인 그는 ‘진정한 싱글’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혼자 요리를 하고,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여행을 떠난다. 잔잔한 내레이션과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차 속에서 들리지 않는 음악에 맞춰서 땀에 젖도록 헤드뱅잉을 해대는 장면에 이르면 ‘쩐다’. 이전에 보여준 적 없는 코믹 연기가 내레이션과 어울리면서 15초라는 짧은 시간 안에 송승헌은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낸다. 송승헌은 서른 살이 아니다. 원빈이 2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직장에 들어갔을 리도 없다. 이렇게 몇 개의 화면과 내레이션은 한 캐릭터를 탄생시킨다. ‘상품의 스토리를 보여주라’는 광고의 욕망은, 세련된 드라마로 재생되고 있다.

하늘 아래 계속 솟아나는 이야기들

광고뿐 아니다. 텔레비전을 켜면 ‘스토리 욕망’이 넘쳐난다. 그렇다고 드라마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TV 특종 놀라운 세상〉 〈TV는 사랑을 싣고〉의 놀라운 생명력은 이야기의 생명력에 줄을 대고 있다. 케이블 TV 프로그램들도 이야기를 원천으로 한다. 등은 조금씩 카테고리를 달리하면서 이야기에 골몰한다. 2000년대 초반 우후죽순처럼 생겼던 재연 프로그램의 하나로 등장한 는 질긴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하늘 아래 새로운 이야기는 하나도 없다’고 하는데 ‘신기하고도 신비한 이야기’가 7년 넘는 기간 동안, 1천 개가 넘는 이야기를 내보내고도 바닥이 나지 않는다. ‘서프라이즈’하다. 의 임태수 PD는 “3년 만에 프로그램을 다시 맡은 것인데, 그전에 옮겨갈 때 ‘이젠 못할 거야, 아이템이 없어서’라고 했다. 그런데도 아직 이야기는 많다”고 말한다. 한국방송의 는 일반인이 직접 나서서 이야기를 짓고 그것을 재연이나 애니메이션 형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이트 ‘브랜드스토리랜드’(www.brandstoryland.com)에는 브랜드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소비자가 직접 올린다. 소비자가 상품을 보고 만들어낸 독자 경험담도 있고, 브랜드가 등장하는 A4용지 5장 분량의 브랜드 드라마도 있다. 스토리에 민감한 20대 여성만이 가입할 수 있는 이 사이트는 ‘메드21’ 광고·마케팅 컨설팅 회사가 수익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었다. 김훈철 메드21 본부장은 “관련되는 스토리를 만들지 못하면 브랜드가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이 마케팅계의 오랜 금언”이라며 “사이트를 통해 소비자는 스토리를 제안하고, 브랜드는 이런 소비자의 마음을 읽어내게 된다”고 말한다.

광고·마케팅 분야에서 스토리가 무성해진 것은 2000년대 들면서부터다. 광고회사 ‘이노션 월드와이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김진아씨는 “팩트에다 발을 디뎌야 하는데, 다른 경쟁업체와의 차별화가 없어지니까 사람들이 잘 기억하도록, 호감을 가지기 쉽도록 이미지 전략을 사용한다”고 말한다. 광고기획사 ‘TBWA코리아’의 이상규 부장은 “고관여(소비자가 상품을 구매하기 전에 많은 정보를 탐색하는 상품), 저관여 상품에 대한 구분이 없어졌다. 제품 정보가 워낙 많다 보니 광고에서 제품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는 당위성도 많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TBWA코리아의 윤성아 국장은 “어느 순간부터 제품에 대한 광고를 직설화법으로 푸는 것은 촌스러워졌다. 광고 측면에서 세련됐냐, 덜 세련됐냐의 차이일 뿐 요즘 광고는 거의 은유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떠오르는 것은 스타와 제품을 이야기로 잇는 감성 마케팅이다. 이야기가 마케팅의 주요한 저자가 되는 것이다.

한 장면에서 압축적으로 스토리를 보여라

스토리의 힘은 구체성의 힘이다. 유명한 예로 ‘원수를 사랑하라’란 말은 공허하게 들릴 뿐이지만 자신의 인생을 추적하던 경감을 용서하는 ‘장발장’의 이야기에서는 구체적으로 다가오게 된다. 출판계에서도 자기계발서의 ‘우화형으로 메시지 전달하기’ 기법은 베스트셀러로 가는 지름길이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메시지를 우화적으로 전하는 , ‘지금 실천하라’는 메시지를 간곡하게 전달한 , 칭찬의 힘을 다룬 등의 전통은 미국 시장을 넘어 국내에도 미치고 있다. 우화형 자기계발서는 2006년부터 한국형을 만들어내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의 저자 박현찬씨는 “지식은 분절적이고 추상적이다. 경험적 지식은 수용도가 높아진다. 지식은 많은데 통찰력이 부족한 세상이다. 전문화된 지식이 늘어나는데 삶은 통합성을 잃어간다. 이런 총체성과 통합성을 지닌 것이 이야기다”라고 말한다. ‘로빈손 시리즈’나 등의 베스트셀러 역시 이런 지식을 이야기에 꿰어서 전달한다는 면에서 맥을 같이한다.

‘구체성’의 맥락에서 광고의 스토리 변화도 감지된다. 예전이라면 연작이나 시리즈 등 ‘다음편 계속’으로 스토리를 중심 삼았다면 이제는 한 장면에 상황을 압축적으로 전달해가는 방식으로 진화해간다. 그럴수록 ‘구체성’은 디테일을 더해간다. 장동건은 ‘되고송’ 광고에서 ‘꽃미남 후배 점점 늘어나면 연기로 승부하면 되고’ 등으로 또박또박 예를 들어 고민을 ‘됐다’고 한다. 윤은혜는 대대로 풍성한 비법을 가진, 윤씨 가문 36대손이라는 설정의 구체성(‘한방샴푸 려’)만으로 광고의 내용을 끝낸다. 영상통화 서비스 SHOW 광고는 대통령 되면 탕수육 시켜준다고 말하는 아이의 심드렁한 표정과 아버지와 친구들의 들뜬 표정을 대조시키는 캐릭터의 ‘구체성’으로 웃음이 터져나오게 만든다(‘7살의 쇼’).

SHOW 광고의 초기 캐치프레이즈인 ‘쇼를 하라’ 자체가 구체성이 담긴 ‘막말’이다. 삶과 밀착한 구체성을 브랜드의 이름으로 가져온 것이다. 비슷하게 노래에서도 독한 말들과 구체적인 상황 묘사가 늘어간다. ‘나를 배신하지 마’ 같은 노랫말은 재미없다. 배신하는 상황을 리얼하게 그대로 표현해준다. 다비치는 에서 “누구랑 있었냐고!/ 야! 아니거든요, 나 집에 있었거든요!/ 엄마가 밥해줬거든요.” 그리고 대놓고 ‘바람피지 마’라고 말한다. 비속어도 남발한다. “화내지 마. 아주 잠깐 우린 너무 완소커플 킹왕짱, 도끼는 들지 마 후덜덜.” 일락의 는 독한 스토리에 독한 말이 섞였다. “오늘 낮에는 황당한 얘길 친구가 해줬어. 어떤 놈에게 안긴 널 봤다고. 헛걸 봤다며 욕을 섞어서 화를 냈었지만 맘 한구석이 꽤나 답답했어. 이미 벌써 넌 평판이 나빠, 헤픈 여자라며.” 드렁큰타이거는 가게에서 담배를 사다가 잘못 거슬러 받은 내용을 길게 이야기한다. “지갑엔 분명히 정확히 오천원이 있었는데 골목길 빵가게 들어가 담배 한 갑을 샀는데… 그 와중 내게 쥐어준 거스름돈 겨우 오백원짜리.”(‘오천원’ 부분)

“스토리가 좋으면 죽지 않는다”

그간 이야기의 축을 담당하던 출판계도 ‘이야기’에 따라 명암이 크게 엇갈린다.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 장르소설의 요구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장르소설에서는 출간 종수도 성장세다(표1). 출판평론가 한미화씨는 “2000년대 초 ‘장르가 출판계에 자리잡을 것인가’란 화두로 이야기를 전개하던 때와 많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황금가지 출판사에서 양장본으로 내며 고급화를 시도했던 스티븐 킹의 저작들이 이제 자리를 잡으면서, 나오기만 하면 2만~3만 부가 꾸준히 팔린다. 이 출간된 2006년부터다. 올해 나온 의 경우 발간된 지 2주 만에 3쇄 인쇄에 들어갔다. 황금가지 직원 김준혁씨는 “광고도 마케팅도 별로 하지 않았는데 반응이 좋다. 2~3년 사이에 장르소설을 향한 독자가 2배 정도 늘어난 것 같다”고 말한다. 스토리가 좋은 경우 실패하는 일이 거의 없다는 이야기다. “편집자가 먼저 보면서 스토리가 좋다, 이야기가 좋다고 하면 죽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점점 주목받는다.”

광고와 기사, 인터넷 글, 구호, 표어, 명명법 등도 이제 ‘구체적인 이야기’ 들려주기에 골몰한다. 광화문 촛불집회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구체성이다. 집회 참가자들은 “고시 철회 명박 퇴진”이라는 구호 대신 발랄하게 외친다. “민주경찰 퇴근해라/ 주인 말 안 듣는 머슴은 필요 없다/ 100일 지났다, 이제 그만 헤어지자/ 미친 소들이여, 청와대로 고고씽!/ 불법주차, 차 빼라/ 불 꺼라 전기세가 아깝다/ 수도세는 니가 내라(물대포에 대고)/ 물대포 안전하면 니네 집 비데로 써라/ (중고생들) 우리 이제 방학이다/ 미친 소 싫소/ 삽질은 밭에서.”

이런 스토리의 구체성은 온라인에 자극적으로 자신을 호소하는 글들과 닮은꼴이다. “‘스토리’는 허구로 구조화되기 전의 전체 줄거리란 의미로 서사학자들 사이에서 많이 논의돼왔다. 즉, 기본 골격으로 스토리가 있고 이를 플롯으로 꾸민 것을 ‘담론’이라고 흔히 불렀다. 반면 스토리텔링은 디지털 매체를 기반으로 하는 이야기 장르에서 흔히 쓰이는 말이다. ‘이야기하기’, 즉 이야기에 참여하는 현재성·현장성을 강조한 말이다.”( 최혜실 지음, 삼성경제연구소 펴냄) 온라인의 특징으로 거론되던 ‘스토리텔링’이 오프라인으로 곧장 나타나는 것이다.

현재성·현장성을 강조하는 스토리텔링

최혜실 경희대 교수(국문학)는 2002년 ‘붉은악마-촛불집회-노무현 당선’에서 보였던 온·오프라인의 연계 스토리텔링이 2008년의 촛불집회에서 더욱 극적으로 타올랐다고 말한다. “악마라는 아이디를 가진 아이가, 붉은 악마가 놀았던 데서 집회를 하자고 해서 제안한 것이 촛불집회였다. 이번에도 비슷하다. 대통령이 대운하의 물길로 인터넷의 말길을 막으려고 하니까 충돌이 생겨난 것이다.” 이제 영상세대의 주요한 특성(표2)이 오프라인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현우 동의대 교수(광고홍보학)는 말한다. “현재는 마음속으로 들어가서 설득이 되느냐가 관건이다. 그렇게만 되면 이야기는 바이러스처럼 퍼져나간다. SHOW 광고나 ‘되고송’처럼 온·오프라인의 경계를 넘어 즐기는 것이다.”

스토리텔링 곧, ‘이야기하기’가 ‘커뮤니케이션’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을 군중을 인터넷에서 무수히 만난다. 걸러지지 않은 이야기도 ‘문자’로 기록되는 것이 무섭지 않게 되었다. 온라인의 ‘이야기하기’ 욕망은 이제 오프라인의 지배적 담론으로 등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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