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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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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고우영 패밀리입니다

등록 2008-07-15 00:00 수정 2020-05-03 04:25

‘고우영 만화 네버 엔딩 스토리’전에서 그의 만화 추억하기, 그 이상을 상상하기

▣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줄줄이 오너라, 고우영 고우영…
‘1970년대 대중문화사의 막다른 골목.’ 누구는 작고한 만화 거장 고우영(1938~2005)에게 그런 헌사를 붙여주었다. 옛 고전(古典)을 텃밭 삼아 대중만화의 고전을 쉼없이 출산했던 거장의 이름은 70~80년대 대중문화사를 논할 때 비켜갈 수 없는 물굽이가 됐다. 등 70년대에 나온 ‘고우영표 만화’ 덕분에 당시 어른들도 ‘폼 잡고’ 만화를 보는 성인극화의 시대가 열렸다. 뿐만 아니라 ‘불량’ ‘저질’의 주홍글씨가 찍혔던 만화 장르에도 재미와 더불어, 철학과 현실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깨달았다. 30년여 전 나온 고인의 만화들은 지금도 재간행되고, 신문에 다시 연재되며, TV 드라마, 영화로 재창작되고 있다. 미소년 의적 ‘일지매’, 처진 눈꼬리의 ‘쪼다’ 같은 유비, 좁쌀 같은 주인공 ‘무대’, 남성 ‘거시기’ 같은 몰골의 변강쇠 등등…. 30여년간 시대를 함께 한 고우영표 캐릭터들이 서울 대학로 아르코미술관에 모였다. 인간 고우영의 추억 보따리를 풀기 위해 공공미술관이 처음 회고전을 차렸다. 이름하여 ‘고우영 만화: 네버 엔딩 스토리’. 그 ‘끝나지 않은 이야기’ 속으로.

“나는 고우영 작가가 ‘쪼다’로 그려놓은 유비에게서 꼭 고종의 캐리커처 같은 느낌을 받는다. …착각인지는 모르겠으나, 턱 주위가 발달한 얼굴형, 넓은 이마, 짧은 눈썹, 처진 눈꼬리, 얼굴 아래쪽으로 내려온 귀, 수염 모양까지 흡사 고종을 보고 그린 것처럼 닮았다. 나는 고종 사진을 보았을 때 무척 낯이 익다고 느꼈는데, 아마도 고우영 를 열심히 본 때문이었던 것 같다.”

소장 역사학자 전우용씨는 서울의 시공간사를 다룬 란 책에서 고우영 만화의 추억을 이렇게 전한다. 비운의 조선 군주 고종과 유비의 흡사한 이미지에 대한 이 서술은 고인의 만화세계에 대한 가장 적실한 상찬일 듯하다. 그만큼 당대 지식인들에게 고우영의 만화는 고전·역사 편력의 산물로서 깊은 역사적 울림이 있었고, 그 캐릭터의 이미지에 많은 젊은이들은 알게 모르게 매혹됐던 추억이 있다. 고우영 만화가 지금도 공공 박물관의 전시 때 종종 설명 텍스트로 쓰이는 것은 이런 맥락일 것이다.

1953년 를 아십니까

아르코미술관에서 7월16일부터 9월12일까지 열리는 고우영 회고전은 이처럼 만화방 영역을 넘어 넓은 인문적 자장을 지녔던 고우영 만화를 미술의 시각에서 다각도로 뜯어본다. 단순한 회고 작품전 대신 체계적인 자료 전시의 시각으로 그의 30년 만화 이력이 얽힌 작품, 자료들을 집대성하고, 통념과 다른 재해석을 좇아간다. 국내 성인만화의 개척자로서 고우영 만화에 대한 기억이 하나의 날실을 이룬다면, 이후 여러 세대의 작가, 관객이 보여주는 상상력들은 씨실이 되어 서로 엇갈리도록 얼개를 짰다. 만화의 원본과 유품, 텍스트로 구성된 1층 영역과 고우영의 작품세계를 다른 작가들이 자기만의 시선으로 해석한 작품들로 구성된 2층 영역으로 전시를 가른 것은 이런 맥락이다.

지난해 11월부터 본격 준비에 들어간 전시는 ‘끝나지 않은 이야기’라는 제목처럼 복잡다단한 수집 과정을 거쳤다. 고우영의 방대한 작화 자료, 친필 메모, 유품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원본을 보수하기도 하면서 고인의 작품세계에 새 이야기를 덧붙여나가는 수순이었다고 한다. 미술관 쪽은 유족들로부터 고인의 1960~80년대 주요 만화를 붙인 패널 액자와 직접 펜으로 그린 작화 원본 100여 장을 비롯해 몽당연필, 펜 등이 들어 있는 상자, 담배 파이프, 여권 사진 등 대형 상자 4~5개 분량의 유품과 각종 자료를 넘겨받아 갈무리했다. 그 결과 관객은 1층과 2층에서 고우영이 평생 그린 만화 50여 종의 주요 내용과 땀내 묻은 유품, 애장품 따위를 자세히 볼 수 있다.

1953년 미키마우스를 본떠 그린 16쪽짜리 단행본 만화 부터 2004년 작고 직전까지 스포츠지에 연재하다 중단한 까지 모든 고우영 만화가 펜화 원본 혹은 당시 신문 연재본을 확대 복제한 책자의 형태로 등장한다. 특히 70년대 인기가 높아 별도의 주간 간행물로 간추려 발행된 단행본 내용들을 직접 감상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진다. 기획자 김형미씨는 “그동안 고우영의 작품세계를 고전의 재해석 측면에서만 바라봤지만, 이번에 자료를 정리하면서 그림 필체 자체가 수준 높은 회화적 작품임을 알 수 있었다”며 “능란했던 그림체에 대한 시각적 재조명도 주목해야 할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옹녀가 장비 간호하다가 변강쇠가…

2층 전시장에서 펼쳐질 영화감독, 미술작가들의 고우영 오마주 작업은 고인의 작품 자체를 다시 현대미술의 소재로 삼는 틀거지가 흥미롭다. 특히 참여미술계의 노장인 주재환씨의 엽기 오마주가 눈을 끈다. 그는 2층 들머리에 고우영 에도 등장하는 명의사 화타를 기리는 기념 공모전이라는 가상 시상전을 차려놓고, 삼국지 인물들이 기괴한 몰골로 등장하는 전위 무대를 펼치면서 고우영의 익살과 해학을 자기 나름대로 변주해놓는다. 혀를 쏙 내민 티베트 탈에다 중국인 옷을 씌워 조조의 몰골로 차려놓은 풍자적 상이 벽에 걸린다. 주재환씨는 “한 수 높은 비틀기 수법으로 웃음을 제조했던 고우영의 만화 미학을 나름대로 다시금 비틀어보았다”고 했다. 영화감독 겸 프로듀서인 피아송은 다른 고우영 만화의 캐릭터 등장 장면을 막 짜깁기해 황당한 줄거리로 몽타주한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일지매랑 싸우다 부상을 입은 장비가 옹녀의 간호를 받지만, 이를 질투한 변강쇠가 화살을 쏘고 소동이 벌어진다. 이 몽타주 영상에 독특한 소리까지 덧붙여 만화를 애니메이션으로 재창작한 작업이다.

중견 여성작가 이순종씨는 제갈량, 한신 같은 고우영 만화의 여성적 남성상을 부각시킨다. 이들 캐릭터를 통해 유연하게 성과 권력, 욕망의 세계를 빚어낸 고우영의 작품 이미지는 황금빛 잉어와 복숭아, 소나무 따위의 민화세계로 표현했다. 아울러 디지털 CD롬에 담긴 고우영의 전집의 이미지를 관객이 컴퓨터로 직접 뽑아 벽에 붙이거나 작가의 이미지와 나란히 그려 붙이는 대형 벽화 작업도 진행한다. 이씨는 “고우영 만화는 윤곽선이 꼬질꼬질하면서도 따뜻한 신파조 그림인데, 선이 매우 유연한 회화적 느낌이 강했다”고 털어놓았다. 한국화가 강경구씨는 고우영 고전만화의 한국화 같은 필선을 목탄 선 하나하나로 상세히 확대하면서 재현해 환상적 현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영화감독 김홍준씨도 고인이 감독했던 영화를 재구성한 단편 를 내놓는다. 이 밖에 고인이 참여했던 만화가 모임 ‘심수회’의 동료들인 박수동·이두호·이정문씨 등도 찬조 작품을 내놓는다. 만화 로 유명한 박수동씨는 “고우영은 항상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를 떠올리게 하는 재주꾼이었다”며 “급하면 펜에 잉크를 찍어 바로 도상을 쓱쓱 그릴 정도로 캐릭터, 작화 기법 등 모든 면에서 창작 능력이 발군이었다”고 회상했다.

피난길 쓰레기 뒤져 발견한 디즈니 만화

고우영은 일제 관리였던 부친 덕분에 만주에서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내지만 해방 뒤 가세가 몰락하면서 가난 속에 만화를 접했다. 1953년 피난간 부산 감만동 빈민촌 쓰레기 더미를 뒤져 발견한 디즈니 만화가 그를 만화 인생으로 이끌었다는 사실은 인간학 수집가로서 그의 행보를 예고하는 사건이 된다. 디즈니의 미키마우스를 보면서 한국판 미키마우스 ‘쥐돌이’를 그리고, 후일 그의 캐릭터들의 원형질을 만들었다는 회고는 극적인 연출 같다. 생계를 위해 진학을 포기하고 만화만 그렸던 그는 성공한 뒤에도 소재를 채집하기 위한 관찰자의 자세를 포기하지 않았다. 왼쪽 눈을 수술할 때도 머릿속에서 장비와 관운장이 골프장에서 라운딩하는 이미지 상상 게임을 했고, 암수술을 할 때도 수술대 위에서 정신차리고 자기 몸의 집도 장면을 지켜보려고 애썼다는 일화도 있다. 도덕적 윤리관을 벗어난 인간 이해관계의 냉혹한 대립과 욕망, 갈등을 만화의 구성으로 치밀하게 연출하고, 전형적인 인물 캐릭터를 만들어낸 것은 결국 집요한 관찰과 자료 수집으로 뒷받침되는 인간학에 대한 관심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했을 터다. 전시는 방대한 고우영의 비화가 숨겨진 엑스파일을 통해 그가 만화가임에 앞서 진정한 인간학의 대가였다는 사실을 입증할 참이다.

전시 기간 중 금·토요일에는 박재동·이두호·허영만씨 등 지인 만화가 5명이 관객과 더불어 고인을 추억하고 만화를 이야기하는 릴레이 대화가 펼쳐진다. 또 미술관 쪽은 영화주간지 과 함께 도록 격인 도 전시 기간 중 발간할 예정이다. 책은 박인하씨 등 대중문화 비평가들이 고우영의 작품세계를 심층 분석한, 국내 최초의 만화작가론 전문서가 될 것으로 보인다. 02-760-4724, www.arkoartcenter.or.kr


고우영 아들 고성언 인터뷰

“아버님은 저승에서 쑥스러워하실걸요”

▣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저승의 아버님은 여전히 쑥스러워하실걸요. 생전에도 작품 전시할라치면 ‘쪽팔린다’는 농을 던지셨거든요.”

만화가 고우영의 후속 출판사업과 저작권 관리 등을 도맡아온 작은아들 고성언(39)씨는 전시 소감을 묻자 먼저 웃었다. 고인이 자기 만화에 관한 한 유난히 수줍음을 탔다는 회상을 곁들였다. “1주기 추모전시 때는 가족 주도의 주관적 느낌이 강했는데, 이번 아르코 회고전은 제3의 객관적 시선으로 아버님의 자취를 뜯어본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른 것 같습니다.”

고씨는 현재 ‘고우영 화실’이란 이름으로 경기 일산에 사무실을 내고, 작품의 재출간·기념사업과 판권 재활용 업무 등을 하고 있다. 에 지난 6월부터 재연재를 시작한 1970년대작 도 그가 디지털 작업으로 컬러 색깔을 입혀 제공하고 있다. 그는 수개월 전 찾아온 미술관 기획진에게 화실을 홀랑 뒤집어놓을 정도로 아낌없이 자료를 건네주었다고 했다.

“원화, 패널, 친필 스케치는 물론 펜대, 붓 같은 유품이나 70~80년대 기사 스크랩까지 샅샅이 조사해갔어요. 작품별 에피소드, 제작 연도 등은 제가 일일이 설명했지요. 한 작가의 일생이 담긴 방대한 자료를 미술관에서 체계적으로 정리까지 해주니 감사할 뿐입니다.”

고씨는 원래 일러스트 삽화를 전공한 디자이너다. 2002년 부친에게 암이 발병하자 유학을 접고 돌아와 작고 때까지 수발을 했다. 투병의 고통도 농담과 허허로운 웃음으로 잊으며 계속 만화를 그리는 부친의 모습을 보면서 디자이너가 꿈이던 자신의 인생 행로를 돌려놓았다고 그는 털어놓았다.

“항암 주사를 2주마다 맞았는데, 구역질나고 머리카락 빠지고 고통스럽거든요. 정신적으로 힘든데도 끝까지 작업하시더라고요. 2002년 를 필두로 과거 만화본의 무삭제판 복간 작업이 시작됐는데, 일일이 검토하고 일부는 새로 그리는 등 강행군을 하셨지요. 투병 중에도 일주일마다 서너 차례 새 만화를 부탁하는 청탁 전화가 올 정도로 일감이 항상 투병 생활을 따라다녔지요. 정부에서 의뢰한 10권 중 3권을 만들고서 작고하셨지요. ‘하늘이 데려가면 따라가는 거지’라고 농담하시던 모습이 선합니다.”

그는 “아버님이 만화는 재미 못지않게 철학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터뷰 때마다 역설하시곤 했다”며 “그게 다른 만화와 차별되는 배경이 아닐까 싶다”고 했다.

“아버님은 만주에서 태어나, 일본 교육을 받고 성장한 한국인이죠. 따지고 보면 동아시아 3국을 거치며 살았던 유년시대가 고우영표 만화의 뿌리가 아니었나 싶어요. 중국, 일본 얘기가 많이 나오는 것도 그렇고. 고인은 평생 어린 시절 부유하고 이색적이던 만주의 삶을 그리워했지요. ”

전시에서 보이듯 50년대부터 이어진 고인의 작업 자료들이 잘 보존돼 있는 건 유족들이 지속적으로 보존·관리에 애써온 데서 힘입은 바 크다. 고씨는 “처럼 나온 지 30년 넘은 만화의 유머나 텍스트가 지금 독자들에게 먹힌다는 게 신기하다”며 “시공을 초월한 고우영 만화의 매력을 젊은 세대들에게 알리는 것이 사명이 아닐까 싶다”고 했다. 그는 “부친의 창작품인 의 경우 문화방송 쪽에 내년 초 드라마화를 위한 원작 판권을 판매했고, 캐릭터·애니메이션 등 후속 사업도 논의 중”이라고 덧붙였다.

“유족 손으로 고우영 만화박물관을 짓는 것이 소망이죠. 아버님의 주요 자료는 다 소장하고 있으니까, 시설만 있다면 콘텐츠 운용은 어렵지 않을 듯싶어요. 이번 기획전은 이 소망을 실현하기 위한 소중한 계기가 될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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