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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몸부림치는 시대의 부랑아들

등록 2008-07-04 00:00 수정 2020-05-03 04:25

88만원 세대의 일상을 정직한 시선으로 그린 단편만화집

▣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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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영신 지음, 팝툰 펴냄, 8천원)는 21세기 초 20대들에 대한 단편만화집이다. 20대인 지은이는 정직한 시선으로 자신과 친구들의 삶을 응시한다. 정직함으로 인해 만화는 우울하고 지리멸렬하다. 그러나 이 정직함은, 너무나 매력적인 출사표다. 지금 20대는 ‘88만원 세대’로 호명된다. 이것이 얼마나 끔찍한 이름인지는 20년 전 ‘386’이나 100년 전 ‘청년’과의 아득한 거리감을 보면 된다.

주인공은 돈 안 되는 만화를 그리며 어머니의 집에 빌붙어 산다. 어머니는 돈 되는 애니메이션을 하라거나 전기를 아끼라고 잔소리를 하고, 그는 “문 닫어!”를 외친다. 어머니는 외환위기 때 실직한 아버지에게 돈 벌어오라고 소리칠 정도로 사나워졌다. 8년 전 아버지는 난데없이 가족들 앞에서 이혼하겠다고 선포했다. “십대가 얼마나 무서운 줄 알아?” 차를 부수겠다고 협박해도 아버지는 웃을 뿐이었다. 어머니는 엉엉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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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의 친구들 중에 제대로 취직한 이는 거의 없다. 늘 학자금, 카드, 월세 때문에 빚에 쪼들려 산다. 어느 날 비슷한 처지의 친구와 “뭐 없나?”를 중얼거리며 배회하다 성인오락실에 들어간다. 5천원으로 한 시간에 10만원을 땄다. “하하, 아 웃겨.” 다음날엔 각각 15만원씩 ‘꼴았고’ 아는 형에게 돈을 빌려 또 도박을 하고, 장비 살 돈을 잃고, 엄마 지갑에서 빼온 돈을 잃는다. “우리 당분간 만나지 말자”고 한 다음날 또 오락실에서 만난다.

사랑도 소비자본주의의 경계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다. 나이트클럽에서 귀여운 여자를 만나 전화번호를 받은 뒤, 다음날 퇴짜를 맞자 “나이트는 결국 원나잇스탠드뿐일까?”라고 묻는다. 난생처음 ‘방석집’에 가서 옷벗기 게임을 하다 접대부에게 전화번호를 받는다. 다음날 친구들이 술집에서 옆자리 여자들이 “왠지 술집 다니는 것 같다”느니 얘기꽃을 피울 때 그는 망설이다 여자의 전화번호를 지운다. 이런 사랑은 항상 닿을 듯하면서 신기하게 닿지 않는다.

주인공이 제대로 된 노동을 경험한 것은 병역특례 업체에 근무했을 때뿐이다. 사장 동생인 김 실장은 형의 권력을 등에 업고 안하무인이다. 가뜩이나 힘든 작업공정에서 김 실장은 자기 일을 남에게 미루고 직원들을 감시한다. 자르고 남은 철을 팔아 뒷돈을 챙기기까지 한다. 직원들은 몰래 칸막이 뒤에 숨어 커피를 마신다. 간부들이 위에서 내려다보기 때문이다. 정치는 운전면허보다 중요하지 않다. 기능 10수에 도전하기 전날 밤의 중얼거림. “이번 딴나라당 후보 생긴 것도 마음에 안 들던데… 내일은 기능 붙으려나… 민영화… 도로주행… 대운하….” 그는 다음날 시험에 붙었고 투표는 잊어버렸다.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살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21세기의 ‘부랑청년’들이 시대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종종 잊는다. 그들은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도 꿈을 꾸고 삶의 의지를 불태운다. “잘 살고 있냐(시발놈아)… 요샌 굴삭기 자격증 공부하냐? 돈도 잘 벌면서 미래를 위해서 열심히 사는구만. 나는 돈도 안 되는 만화를 그리며 행복해질 거라 믿으며 살고 있다.”(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88만원 세대의 일상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들은 갈수록 비정상적인 삶으로 범주화될 것이다. 사회의 은밀한 상처이고 미래의 불안이기 때문이다. 88만원 세대는 상실의 기호이자 공포의 기호다. 이들은 갑자기 불려나왔으나, 이내 경계 바깥으로 내쫓긴다. 그래서 이들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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