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의식 넘치던 영화와는 달리 주문 그림 그려, 문인화의 이상 대신 그가 선택한 해학적 미감을 맛보라
▣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영화 장승업, 그림 장승업
“야, 이 개자식들아!”
폭우를 맞으며 한옥 지붕 용마루 위에 올라탄 천재화가 오원 장승업(1843~97)이 세상에 대고 외친다. 임권택 감독의 저 유명한 영화 (2002)에서 오원(최민식 분)은 예술혼을 짓누르는 시대에 맞서 불꽃처럼 광기를 내뿜었다. 겨우 100여 년 전 비틀거리는 이 땅의 그림판에 혜성처럼 나타나 혼불을 놓은 대가의 그림 인생은 정말 영화 같은 삶의 연속이었을까. 타고난 그림재주로 일자무식 천민에서 궁중화가로 벼락출세했다가 홀연 사라진, 이 거장의 신비스런 실체는 어떤 것일까. 역사 속 오원의 발자취를 오늘날 사람들이 직접 눈으로 더듬어볼 수 있는 드문 기회가 찾아왔다. 민족미술의 보고인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이 봄 기획전시로 최근 시작한 ‘오원화파’전. 근현대 한국화의 뿌리인 장승업과 제자들의 그림 계보를 알알이 간추려놓은 이 전시가 새삼 오원 열풍을 몰고 왔다. 의 오원과 그림 속 진짜 오원은 어떻게 다를까
“너무 많이 오는데요. 영화의 브랜드 파워가 이렇게 큰 건지….”
간송미술관의 백인산 상임연구위원은 인파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5월21일 낮 간송미술관 경내. ‘오원 장승업 화파전’이라는 한자 제목이 붙은 정문 안쪽으로 꾸역꾸역 인파가 밀려간다. 그들은 최완수 미술관 연구실장이 가꾼 화초들이 줄지어 자라는 외길을 걸어 서쪽으로 문이 난 미술관 안으로 들어간다. 관객은 맥고모자를 쓴 할아버지부터 계모임 온 듯한 주부들, 아이들 손을 잡고 온 젊은 아빠들, 대학생 모임과 연인들까지 다양하다. 정문 아래 성북초등학교 운동장은 30여 대의 자가용으로 가득하다. 고적하기만 했던 녹음 속 미술관은 지금 오원의 그림과 ‘한나절 데이트’를 하려는 관객의 열기로 차 있다. 건물 앞에 핀 핑크빛 작약꽃이 애피타이저처럼 흥취를 미리 북돋운다.
화파 집대성 전시 인기, 대겸재전 넘어설 기세
간송미술관의 오원 전시는 1975년과 97년의 탄생 100주년 특별전에 이어 세 번째다. 2002년 영화 개봉 이래 처음으로 오원 화파의 작품만 집대성한 전시여서 대중의 관심은 더욱 유난스러워 보인다. 비가 내린 전시 첫날만 3천 명 넘게 들었고, 평일에도 1천 명 이상이 찾아온다고 한다. 2004년 장안의 화제였던 대겸재전의 인기를 넘을 기세다.
10평 남짓한 1층 전시장 작품들은 ‘그림에 취한 신선’이란 뜻의 영화 제목에 일단 맞춤해 보인다. 일필휘지의 붓기운이 가득한 두 종류의 대작 병풍들이 시선을 압도했다. 말과 물고기, 매, 닭, 꽃 등을 그린 입구 쪽의 6폭짜리 병풍과 맞은쪽에 걸린 10폭짜리 대형 산수도 병풍이다. 전성기 절정의 기량을 발휘한 이 병풍 그림들은 이번 전시에서 처음 한자리에 모아 선보이는 것으로 오원의 필력을 더욱 핍진하게 전해준다. 그림 내력은 몰라도 갖가지 산세와 여러 동물들이 생동하는 모습에서 쾌감을 느낀다는 반응이 많았다. 10폭 병풍은 고대 중국의 시인 도연명의 유명한 시를 형상화한 (고향으로 돌아오는 그림)를 비롯해 (흰 구름과 맑은 시내), (푸른산 요란한 폭포), (시냇가 솔바람) 등으로 이어진다. 뱀처럼 꿈틀거리거나 벼락치듯 몰아치는 산세, 뭉게구름처럼 겹붓질로 표현한 바위의 꺼칠한 질감, 쓱쓱 내리그은 숲 선의 감각적 묘사 등이 눈을 어지럽힌다. 정성스레 칠한 색채와 선묘가 조화를 이루는 6폭 그림들은 ‘덕경 선생’이라는 정체불명의 후원자에게 바친 것. 꽃밭 아래 암탉 가족들의 정경이나 토끼를 덮치려는 매의 기세 등을 포착한 오원 동물 그림의 압권이다.
어느 것 하나 보고 나서 눈 부르지 않는 것이 없다. 내용보다 그림의 장식적 효과와 번들거리면서도 활달한 감각에 눈이 아뜩해지는 작품들이다. 두 병풍 사이에 세 노인이 서로 나이 자랑을 하는 중국 고사 내용을 담은 대작 의 기암, 절벽, 망망대해가 어우러진 파노라마 선경이 끼어든다. 머리통 높은 백발 신선을 담은 , 사슴에게 신선의 경전을 가르치는 신선의 풍모를 담은 도 보인다. 은 주문화만 그렸던 오원답지 않게 그의 내면을 솔직하게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명품인데, 신선의 얼굴이 그의 자화상이란 해석도 있어 흥미롭다. 복잡기괴한 산수풍경, 튀어나올 듯한 동물들의 생동감이 물결치는 1층 전시장은 감각 지향적인 현대 한국화의 근원이 오원임을 새삼 깨닫게 하는 마당이다.
2층은 안중식과 조석진, 지운영 등 일제시대 화맥을 이은 제자뻘 화가들의 그림을 전시해 오원의 거대한 그늘을 보여준다. 특히 소박함과 해학미 깃든 산수와 인물 그림들이 유례없이 다수 출품된 지운영의 재발견이 새롭다. 관객은 대부분 경이로운 표정으로 대작 병풍 등을 주시하면서 수첩에 메모하거나 스케치를 한다. 호텔 요리사라는 황재희(26)씨는 “풍경의 섬세한 부분과 모호한 부분들이 절묘한 조화를 이뤄 보다 훨씬 실감나게 필력을 느낄 수 있었다”며 “자연스러운 필선의 느낌이 현대인의 감성에 딱 맞아 요리할 때도 영감을 줄 것 같다”고 했다. 간송 전시를 20년 이상 본 사진가 배병우씨도 “동감이 펄펄 살아 숨쉬는 오원의 화조도 그림은 언제 봐도 새롭다”고 거들었다. 대학원생 안희영(28)씨는 “옛 그림의 색감과 선이 이렇게 마음을 뒤흔들 줄 몰랐다”고 털어놓았다.
곳곳에서 오원 그림은 시대와 불화하는 자의식이 뜨겁게 표출되는 것처럼 묘사된다. 그런데 정작 전시실에서 기운생동하는 오원의 대작 병풍과 신선 그림들은 그다지 뜨겁지 않다. 어딘지 메마른 구석조차 보인다. 백인산 연구위원은 “단원이나 겸재가 풍경 속에 마음을 흠뻑 녹인 것과 달리 오원의 그림에는 마음이 녹아 있지 않다”고 말한다. ‘술과 여자 없이는 붓 들 힘조차 없는’ ‘불꽃처럼 예술혼을 소진한’ 영화 속 캐릭터와는 다르게 읽히는 대목이다. 미술사가들은 오원이 중국풍의 주문용 그림을 닥치는 대로 그리는 전업작가였던데다, 외세 앞에 국운이 쇠락해가던 당대에 주관적 자의식을 그림에 투영할 여지는 별로 없었다고 추정한다. 궁중화원으로 일했고, 서울 광통교 부근에 ‘육교화방’이란 개인 화실을 열었던 생활인으로서의 이력이 이를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마냥 중국 그림과 같지 않다
오원의 시대는 19세기 초 대석학이던 추사 김정희가 ‘완당 바람’으로 일으킨 중국풍의 그림, 글씨 유행이 도식적인 매너리즘으로 전락해가는 시기였다. 그림 수요자도 왕실·양반층에서 상인·평민들로 확대되고, 근대 화풍이 도입되면서 팔기 좋은 형식 위주의 감각적 그림이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직업화가인 그는 이런 문화 유행의 끝물에 생동감 넘치는 붓질로 수요에 딱 맞는 인기 그림을 그렸다는 얘기다. 강관식 한성대 교수는 “불우한 천재화가의 신화로만 치켜세우는 것은 지나친 감이 있다”며 “지식인 화가의 시대가 가고, 가게에서 그림을 팔아 연명하는 직업화가가 현실이 된 시대를 그는 타고난 재주로 충실하게 따랐을 뿐”이라고 했다. 실제로 오원에 대한 미술사학계의 평가는 영화나 대중의 생각처럼 우호적이지 않다. 탁월한 묘사력과 기법에도 불구하고, 중국풍이 너무 난다거나 추사의 문인화풍 유행을 흉내만 내면서 현대 화단을 정신적 측면보다 외형적·기능적 측면에 기울어지도록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다( 안휘준·김원룡 지음). ‘시대를 잘못 타고난 불세출의 테크니션’이란 평 또한 이런 관점에 바탕한다.
하지만 일부 연구자들이 지적하듯 마냥 중국 그림과 똑같이 그린 것도 아니라는 데, 오원 회화를 보는 참재미가 있다. 기본적으로는 명나라·청나라의 대가들 그림이나 19세기 중국 상해파 화가들의 감각적 그림풍을 본떴지만, 인물·풍경 등의 세부 구도는 훨씬 자연스럽고 익살이 밴 18세기 조선의 회화 양식이 미묘하게 어우러진 흔적도 보인다는 말이다. 전시 도록 에 논문을 쓴 미술사연구자 김현권씨는 “오원의 화파는 전통회화가 빛을 잃는 상황 속에서 궁중 화풍을 민간에게 선보여, 색다른 화풍이 펼쳐지는 계기를 만들었다”며 “고고한 문인화의 이상을 포기하는 대신, 해학적 미감과 화려하고 장식적인 회화를 선보였다”고 평했다.
에서 오원은 도자기 속 신선이 되려고 불타는 가마 속에 기어들어가 최후를 마친다. 그러나 실제로 몰년 외에 그의 최후는 알려진 것이 없다. 오원의 천재 신화를 처음 전파시켰던 월북작가 근원 김용준(1904~67)은 그 일화를 담은 의 ‘오원일사’ 말미에 이렇게 썼다.
“…오원은 생전 생사란 뜬구름과 같은 것이니 경개 좋은 곳을 찾아 숨어버리는 것이 낫다고 했다. …그와 친했다는 청일전쟁 당시 일본 종군기자 고 우미우라 아츠야의 말로는 매일같이 만나던 오원이 수년래로 거처가 불명하게 되었으니, 그는 필연코 신선이 된 것이라고 하더라….”
그의 전기는 영화보다 훨씬 싱거울 수도
언젠가 오원의 숨겨진 사료들이 무더기로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의 전기는 영화보다 훨씬 싱겁게 쓰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배우지 않은 붓질의 천재성과 끼로 당대 화단을 휘감고 지금도 영향력을 미치는 오원의 그림들은 사실과는 별개로 대중에게 마르지 않는 억측과 상상의 샘이 될 것으로 보인다. “오원 그림은 관객 각자의 그릇에 따라 보는 것”이란 최완수 실장의 말처럼, 그림은 그림일 뿐이고,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6월1일까지, 문의 02-760-0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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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조선 수장가들을 매혹시켰던 오원 장승업의 그림은 지금도 미술시장에서 인기 만점의 ‘블루칩’이다. 근현대 한국화의 원조라는 명성과 고답적인 문인화의 격식을 벗어던지고 활달하고 현란한 감각을 전면에 내세운 그림풍 자체가 현대인의 시각 취향에도 들어맞기 때문이다. 특히 오원의 개성이 가장 도드라지게 표출되는 화조도(꽃과 새 그림), 영모도(동물 그림) 등의 인기가 높다. 학고재 화랑의 우찬규 대표는 “고미술계에서 오원은 단원 김홍도와 겸재 정선 다음가는 위상을 차지한다”며 “물량이 많지는 않지만, 나오기만 하면 순식간에 팔린다”고 귀띔했다.
국내 최대 경매사인 서울옥션 쪽의 설명을 들어보면, 경매에서는 보통 화조·영모도 1폭이 1500만원대, 8~10폭 병풍이 5천만원~1억원대의 낙찰 시세를 보인다고 한다. 하지만 경매 출품작보다 좀더 수준 높은 상품이 거래되는 화랑 거래에서는 단폭 그림도 최소 1억원 이상을 호가하며, 10폭 병풍의 경우 10억원대를 넘는 경우도 종종 있다는 게 화랑가 사람들의 말이다. 최근 간송미술관의 오원 전시가 관심을 모으면서 화랑 쪽에 오원의 작품 구입을 타진하는 문의 전화도 부쩍 늘었다는 전언이다.
오원의 그림은 인기만큼 가짜도 많다. 20세기 초부터 이미 위작이 많이 돌았고, 지금도 인사동 화랑가에 나오는 작품들 가운데 절반 가까이는 위작일 것이라는 추정도 나온다. 오원이 한문을 잘 몰랐던 탓에 작품에 붙은 그림 제목이나 내력글(제문) 등을 대개 후대 제자나 감상가들이 붙였다는 사실도 비슷한 유형의 위작을 양산하는 요인이 된다. 실제로 2000년 11~12월 서울대박물관에서 열렸던 ‘오원 장승업 특별전’의 경우 인물화와 일부 영모 병풍이 오원의 그림풍과 다르다는 지적이 학계 일각에서 제기돼 뒷말을 낳은 적도 있다. 우찬규 대표는 “천품을 타고난 필력을 지닌 오원의 그림은 선 하나하나의 필치가 개성적이고 노련해서 비슷하게 베껴 그리기 어렵다”며 “안목과 감각만 있다면, 진위 가리기는 되레 쉬운 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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