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가끔 짝 못 찾아 헤매는 청춘들을 보면 청군 백군 줄 쫙 세워서, 너하고 너 짝, 얘랑 쟤랑 짝, 이렇게 정해주고 싶다. 가장 좋을 때에 몸 굴릴 생각은 안 하고 머리만 굴리는 게 딱해서다. 최근 만난 그녀도 그랬다. 20대 후반인 그녀는 자기를 가르치고 깨우쳐줄 남자를 찾고 있었다. 주말에 같이 서점 가서 새로 나온 책을 보고, 도서관에 나란히 앉아 독서하고, 그가 감명 깊게 읽은 책을 추천하면 자기가 밤새워 읽고 다음날 토론하고, 하여간 그런 게 가능한 유식한 남자가 이상형이란다.
여보세요, 남자가 선생님이니? 그녀에게 물었다. “넌 학생이 아니잖아. 세일러문, 아니 샐러리우먼이잖아. 주중에 열심히 돈 벌었으면 주말에는 열심히 놀아야지, 왜 공부를 해? 황금 같은 시간을 왜 도서관에서 보내?” 그녀가 답했다. “유식하지 않은 남자랑은 스킨십도 하고 싶지 않다. 난 솔메이트를 만날 거다. 플라토닉 러브가 하고 싶다.”
소년들이 엄마 콤플렉스가 있다면 소녀들은 선생님 컴플렉스가 있는 것 같다. 이른바 두사부일체. 인생의 두목이자 배움의 스승이 되는 아빠든 오빠든. 유감스럽게도 내가 만났던 말 많고 아는 게 많은 척하던 남자들은 다른 게 내세울 게 없어서 그렇던데. 특히 그거.
그녀가 지금 만나는 동갑내기 남자애는 활기차고 씩씩한데 말도 별로 안 통하고 아는 것도 없고 그리하여 배울 게 없는 상대 같단다. 이어진 품평을 듣자 하니, 그는 멀쩡했다. 20대 후반 사회 초년 남자가 가질 법한 순진함과 객기를 고루 가졌다(아유, 이쁜 것). 그녀는 유식하기만 하면 된다고 했지만, 줄줄이 조건이 없진 않았다. “약간 살집이 있었으면 좋겠고, 나보다 좋은 대학 출신이면 더 좋겠고, 얼굴은 깎아놓은 밤톨처럼 생기면 되고, 유머 있으면 금상첨화고, 차는 당연히 있어야 하고, 키는 174cm만 넘으면 될 것 같다. 아, 여자를 무시하는 마초는 안 된다. 나를 존중해줘야 한다.”
조건은 중매시장 A급 남자인데(빼먹은 건지 개념이 없는 건지 돈 타령은 안 했다), 그런 남자랑 그래서 하고 싶은 게 공부라니. 꼭 통통한 밤톨에게 깨우침을 얻고 지도편달을 받아야 해?
그녀는 자존과 의존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유식한 남자를 만나고 싶다기보다는 유식한 여자가 되고 싶은 거 같았다. 그리고 그 유식함은 ‘아빠 혹은 오빠’가 인정해줄 만한 내용이어야 한다는 거. 이거야말로 지은이가 목놓아 외치고 내 주변의 킹콩들이 찬동하며 발광한 “온순하고 고상한 여성다움이라는, 소녀들에 대한 세상의 올가미” 아닌가.
더 딱한 건, 그녀는 플라스틱, 아니 플라토닉 러브를 찾느라 한창 때에 홀로 침대에 든다는 사실이다. 인생은 몸으로 깨우치는 거 아니야? 동서 고금의 지성인들이 다 그렇게 말했잖아. 아마 비트겐슈타인도 그랬…, 이 칼럼을 읽고 그녀가 도서관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책을 뒤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을걸?
나의 재능과 자원을 남들의 반응으로 확인하는 거, 내가 나를 인정하기 전에 ‘선생님’에게 인정받으려 하는 거, 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남자에게 얻으려 하는 거, 그거 변태다. 이쁘고 학구적이니 ‘뵨태’라 불러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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