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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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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자의 방

등록 2007-11-16 00:00 수정 2020-05-03 04:25

▣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어느 기관의 기관장 방에 갈 일이 있었는데 깔끔하게 정리된 햇볕 가득한 그 방에서 문득 하고 싶어졌다. 맑은 공기와 청량한 바람에 몸이 풀려서일까. 그 기관장이 아니라 그 방의 주인과 하고 싶었다는 게 정확하다. 일종의 ‘권력’이 주는 성적 자극일 텐데…, 나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여성 맞아?

파워풀한 수컷과 그와 친하고 싶은 암컷 얘기는 시대착오적이나, 내 안에 원시 시대의 속성이 일부 남아 있나 보다. 한번은 파트너가 뒤에서 머리채를 잡아끄는 식으로 거칠게 군 적이 있는데, 솔직히 죽여줬다(그렇다고 목이 꺾일 정도는 아니고 두피 마사지를 세게 받는 정도). 복종 의식이 작용한 것인지 야생 본능인지는 잘 모르겠다.

‘권력자의 방’에 대한 ‘심오한’ 느낌을 갖고 돌아온 날 밤, 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한 대선 출마자가 밤새 나한테 껄떡댄 것이다. 으악. 꿈이었기에 망정이지. 나의 ‘동지들’은 ‘정치적 배반’이 아니라 ‘정치적 문란’을 문제 삼겠지만, 안 그래도 성격 나빠 친구도 없고 가족도 등 돌린 마당에 그들까지 잃고 싶지는 않다.

‘권력=섹시함’은 모든 상황에 맞는 등식은 아니다. 꿈에서 나에게 껄떡댄(엄밀히 말해 껄떡댔으면 하는) 상대도 1등 주자는 아니었다. 권력자라고 해서 아무한테나 침 흘리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이 얘기를 들은 친구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걱정 마. 권력자들도 다 너하고 하고 싶지는 않을 거니까.” 친구는 이어 “그런 생각을 하는 시간에, 몸이나 더 만들어서 대중적으로 꼴리렴”이라고 충고했다.

전혀 아닌, 때론 경원하는 사람과의 섹스가 가능할까? 권력에 기댄 상상과 심리적·육체적 상태가 우연히 맞았을 때 성적 쾌감이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단발성이다. 그러니 한번 ‘정복’ 했다고 어깨에 힘주고 “오빠가 말이야~”를 남발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

여성 고객에 어필하는 1등 자동차 세일즈맨은 카사노바의 철학을 이어받은 자라고 한다. 몸 로비를 하거나, 반쯤 벗고 보닛에 기대어 서 있으라는 얘기가 아니다. (토네이도 펴냄)에서도 지적하듯이, 여성은 자동차를 살 때 남성보다 훨씬 더 복합적이고 이성적이다. 여성 고객이 들어섰을 때 동행한 남자에게 “무슨 차를 찾으십니까”라고 묻거나, 여성이 구매자임을 밝히자 “새로 출시된 여성용 소형차를 보여드리죠”라고 하거나, 세부사항을 설명하면서 “기계를 못 다뤄도 불편하지 않고 트렁크가 넓어 쇼핑에도 좋다”고 떠든다면, 쌩하니 돌아나가는 여성을 잡을 수 없다. 이 세일즈맨의 잘못은 선입견만이 아니다. 그는 ‘여성 스스로 바람과 욕구를 말하게’ 하지 못했다. 반라의 모델에 눈을 팔며 “200마력 엔진이 시속 280km로 주행할 때, 좌석이 마치 로켓 안에 앉아 있는 것처럼 뒤로 살짝 젖혀진다”는 멘트에, 권력과 섹스를 상상하는 이는 남성뿐이다. 여성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카사노바가 그 많은 여성에게 사랑받고 그 많은 여성을 떠나고도 욕먹지 않은 것은 섹스를 잘해서가 아니었다. 권력을 가져서도 아니었다. 대화를 잘해서다. 그의 매력은 잘 듣고 깊이 공감하는 것이었다.

앞서 그 방의 주인이 나에게 따뜻한 차를 권하며 다정하게 내 의견을 묻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다. 사고 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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