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연정에 빠지면 모든 게 그것 중심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누군가의 메신저 창 사진을 보고 “이거 틀림없이 나 보라고 올려놓은 거”라고 여긴다거나, “이거 나 보라고 올려놓은 거?” 같은 메시지를 깜찍이 이모티콘을 곁들여 날리는 건, 약과다. 상태 심각해지면 누군가의 옷차림이나 미팅 장소 선정, 프레젠테이션 문구까지 나를 염두에 두고 고른 거라고 착각하게 된다. 주인공 콤플렉스다.

예전에 한 출입처에 나갈 때 어떤 아저씨가 틈만 나면 껄떡댔는데, 그 멘트가 유치찬란하기 그지없었다. “어? 내 옷이랑 색깔 맞췄네요” “어제 당신 이름으로 양주 킵 해놨어요” 등. 여보세요. 그런 멘트 백번 날려도 “그러게요” 혹은 “그러세요”라는 대꾸만 돌아오면, 그건 에둘러 말해 “당신 내 타입 아니세요”다. 솔직하게 덧붙이자면 “그러니까 꺼지세요”다. 교양 있고 상식 있는 내가 꼭 직설화법으로 얘기해야겠니?
후진 멘트 날리며 끈적거리는 사람들이 무엇보다 짜증나는 건, 비겁해서다. 에둘러 거절하는 것도 비겁하다고? 아니다. 왜 아무런 감정이 없는 상대에게 직설화법이라는 감정노동을 해야 하는가. 나처럼 겁 많은 ‘내추럴 본 소심녀’ 혹은 죄책감 많은 ‘길티 걸’은 ‘이런 말 했다가 저 사람이 상처받으면 어쩌지? 삐치면 어쩌지? 그래서 해코지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을 한다고.
응당 주인공이어야 할 사람이 역할을 망각할 때도 있다. 고백하건대, 나 한때 섹스리스 커플들을 게으름뱅이 취급한 적 있었다. 반성한다. 처지와 조건이 바뀌어보니, 주기적으로 원활한 섹스 라이프를 영위하는 것은 간단치 않은 일임을 알게 됐다. 대충 당길 때, 꼴릴 때, 시간 맞을 때 한다는 것은 하지 말자는 말이다.
‘재미있게 살자’를 ‘부훈’으로 불철주야 노는 한 부서의 구성원 3인방은 틈만 나면 팀워크를 빙자한 술자리를 도모하는데, 대선 날에도 찌질한 얘기로 점철된 단란한 한때를 보냈다. 언제나처럼 대화의 마무리는 ‘떡’이었다. ‘우리 이러지 말고 조만간 민속촌에 가서 진짜 떡 치는 걸 보고 그 음향과 강도와 집중력을 우리의 떡생활과 비교해보자’는 게 그날의 결론이었다. 그럼 조만간 언제 가지? 10년차 기혼녀 왈 “난 1년 안에는 (성관계가) 힘들 것 같은데”. 4년차 기혼녀 왈 “난 두 달은 있어야…”. 할 수 없이 싱글남이 나섰다. “알았어, 내가 먼저 할게.” 이 끔찍한 신자유주의 파고 속에서 먹고사느라 떡 한 번 제대로 못 치는 것도 억울한데, 법적 파트너조차 없는 비혼남에게도 밀려야 하는 거냐며, 두 기혼녀 심히 통탄했다는 후문이다. 4년차의 그녀는 텔레비전에 비친 당선자를 향해 “부디 우리 맘 편히 떡치게 해주세요”라고 부르짖다 그 멘트에 감동한 호프집 사장에게서 오징어를 서비스로 받았다.
젖먹이까지 끼고 자는 임금 노동자 커플은 비디오 한 편 빌려 보거나 세탁소에 가는 일조차 시간 안배를 해놓지 않으면 일상이 엉킨다. 왜 시간이 없냐고? 없다. 애 재우면 되지 않냐고? 그럼 나는 언제 자요. 섹스가 후순위로 밀리는 일상은 이미 빨간 불이다. ‘자기로부터의 혁명’ 수준의 각성과 투쟁이 필요하다.
새해를 맞아 섹스 계획표를 짜야겠다. 스스로 세운 계획을 잘 지키는 모범적인 어른이 돼보리라. 불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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