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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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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리스트

등록 2007-08-31 00:00 수정 2020-05-03 04:25

▣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이번 편은 ‘독자 초대석’이다. 소개한다.
“이 일은 제 개인의 문제를 넘어 관계 보편의 문제이기에 용기를 내어 편지를 씁니다.
오늘 산부인과에 다녀왔습니다. ‘콘딜로마’(성병의 일종)라더군요. 사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건 1년 전 모씨와 마지막 관계를 가진 뒤였는데, 병원에 갈 엄두가 나지 않아 미루다 일이 커졌습니다. 모씨는 큰일 낼 사람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콘돔을 죽어도 안 쓰려고 해요. 감이 떨어진다나요. ‘우주복 입고 마라톤하는 기분’이랍니다. 게다가 자기는 정자 함량이 치명적으로 적어서 병원에서 이대로 가다간 불임이 될 거라 했답니다. ‘그래도 꼭 콘돔을 써야 돼!’ 다짐하면 ‘응, 알았어’ 어물쩍 넘어갑니다. 삽입 직전에 ‘아, 저기’ 했더니 덥석 키스를 하데요. 제 말을 막으려고 그랬다는 혐의가 지워지지 않네요.

그간 제 성생활에 죄의식을 느낀 적은 없습니다. 강요한 적도, 내 의지를 거슬러 한 적도 없습니다. ‘능동적 주체로서 즐거움을 누린다’가 모토였는데, 그 핑크빛 기대가 진흙탕에 처박히는 기분입니다. 병원 접수를 하고 간호사의 묘한 시선을 견디고 진료대에 다리를 벌리고 누워 금속성 물질들이 그곳을 헤집고 찌르는 것을 참아냈습니다. 임신이 아니고 이 정도인 게 다행이라 자위하기도 했습니다. ‘서로 필요에 따라 즐겼다’는 명제 아래 깔린 무책임함과 남은 책임을 혼자 뒤집어써야 하는 이 더럽고 치사한 상황이라니요. 아, 돈도 무지막지 깨지고. 그놈은 이걸 알까요?

어이없는 사례가 또 떠오르는데, 어떤 남자는 ‘원나이트’ 하는 여자에게 병원 진단서를 보여준대요. ‘정관수술 했고, 성병 검사 결과 이상 없음. 그러니 콘돔 쓰지 맙시다.’ 검사 날짜 뒤로 또 누구랑 잤는지 어떻게 알겠어요? 진단서 떼어 보여주는 그 갸륵한 정성으로 ‘오리지널 사가미’ 같은 고급 콘돔 좀 찾아보라지요. 제 사촌언니의 미국인 남친도 ‘너 같으면 광랜 쓰다가 전화 모뎀으로 돌아가고 싶냐’면서 끝까지 버틴다니 이 개념 상실은 국제적인 문제인가 봅니다.

이런 놈 한둘이 아니에요. 모씨도 박식하고 글 잘 쓰고 여자들이 혹할 만한 남자인데(그래서 저도 혹했…), 그 사람 블로그의 수많은 찬양성 댓글에다 ‘이놈 섹스할 때 콘돔 안 쓰려고 발악하는 색히예요’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도 아니고…. 아, 당나귀 귀는 짧지는 않죠. 이 인간 그러면서 섹스 칼럼도 씁니다. 말이 됩니까?

세이프 섹스. 이거 백만 번 천만 번을 강조해도 모자랍니다. ‘콘돔 안 쓰는 넘들은 매장해야 한다’고 으름장 좀 놓아주세요. 이 바닥에서 퇴출시켜야 합니다. 저는 거금을 투자해 이놈의 콘딜로마를 박멸하고 당분간 정숙하게 살렵니다. 앞으로 ‘나의 쾌락’보다 ‘너의 안전’을 더 신경쓰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모를까요. 수업료 내고 공부했다 생각하기로 맘먹었지만, 병원 영수증을 보니 다시 화딱지가 납니다.”

이 독자께 보낸 답메일이다. “비용 청구하세요. 앞으로 발생할 비용까지. 모씨가 개전의 정을 안 보이면 가까운 사돈의 팔촌 범위 안에서 실명 까세요.”

이로써 장안의 여성들이 공유할 블랙리스트를 한 번 더 ‘업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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