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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지쿠호오 탄광 잔혹사를 아십니까

등록 2007-06-01 00:00 수정 2020-05-03 04:24

한 지역을 통해 근대의 상처를 보여주는 그림책

▣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 일본 지쿠호오. 기근을 맞아 농민의 삶은 참혹한데, 영주들의 수탈은 더 가혹해졌다. 마을마다 회합을 열어 영주에게 바치는 ‘연공미’ 문제를 토론했다. 대책이 없어 한숨만 늘어가던 때, 도모사쿠라는 젊은이가 일어났다. “강물이 넘쳐서 농사를 망치는 경우가 많으니 얕은 강을 하나 더 파보자.” 도모사쿠는 아침마다 일찍 나와 땅을 팠다. 그러던 어느 날, 검은 돌이 괭이에 부딪혀 불똥을 튀기더니 이슬 젖은 땅에서도 빨갛게 타올랐다. 세상에, 희한한 일도 다 있지. 돌에 불이 붙다니. 그때부터 지쿠호오 마을 사람들은 검은 돌을 쌀 대신 영주에게 바치기 시작했다.

(오오노 세츠코 글·그림, 김병진 옮김, 커뮤니티 펴냄)는 탄광으로 유명한 일본 한 지역의 ‘민중사’를 다룬 아주 재미있는 그림책이다. 오랫동안 지쿠후오 지역에 살면서 탄광의 영광과 몰락을 목격한 오오노 세츠코 할머니(81)가 정겨운 그림과 구수한 입담을 풀어놓는다. 그는 지금 징용자들의 인권을 고민하는 ‘강제연행을 생각하는 모임’의 대표로 있다. 는 쉽지만 가볍지 않다. 이 탄광 지역의 역사에는 일본 제국주의 아래 신음하는 민중과, 조선인들의 고난이 배어 있다. 즉, 동아시아 근대사의 문제가 농축돼 있는 것이다.

메이지유신 이후 지쿠호오 탄광은 일본 근대화의 상징이 되었다. 신식 기계가 들어오고 철도가 개통되면서 탄광은 제국주의의 에너지원으로 자리잡았다. 패전 뒤 일본 전역이 굶주리고 있는 상황에서 “지쿠호오의 ‘붉은 굴뚝’을 찾아가면 흰 쌀밥을 먹을 수 있다”는 말이 널리 퍼져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12만~13만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고 탄광 수도 260개를 넘어섰다. 그러나 1960년대 중화학공업이 육성되면서 일본의 산업구조는 급격하게 변했고, 석탄보다 석유가 각광받기 시작했다. 탄광 마을 공동체는 파괴되고, 일자리를 잃은 광부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이 기간에 노동자들의 삶은 어땠을까? 허술한 안전관리 때문에 끊임없이 화재와 폭발 등이 일어났다. 부모의 조수로 일하다가 탄광에서 사고를 당한 어린이들도 많았다. 허름한 사택에서 저임금을 견디며 살았다. 이 중에서도 가장 지옥 같은 상황에 처해 있었던 사람들이 조선인이다. 지쿠호오 탄광은 농지를 빼앗기고 일본으로 건너온 조선인들을 탐욕스럽게 빨아들였다.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징용자들이 합세했다. 노동력이 부족하던 시절, 조선인은 싸고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나야 제도’(자본가가 ‘나야’라는 합숙소에 노동자들을 재우며 착취한 제도) 속에서 노예노동에 내몰렸다. “조선인은 때리고 부려라”가 탄광 쪽의 구호였다. 1936년 1월 요시쿠마 제2갱에서 화재가 일어나자, 탄광 쪽은 폭발을 막기 위해 조선인 광부들이 갱도 안에 있는데도 입구를 점토로 막아버렸다. 사흘째 되는 날, 갱도를 열어보니 손톱이 다 벗겨져버린 광부들이 겹쳐져 죽어 있었다.

노동자들은 투쟁을 통해 연대를 배워가기 시작했다. 1922년 일본의 피차별 부락민의 해방을 위해 ‘수평사’가 결성됐다. 1932년 조선인 광부들 최초의 쟁의인 ‘아소오쟁의’가 일어났다. 1953년에는 석탄 수요가 감소하면서 미쓰이광산이 희망퇴직을 모집하자, 광부들이 파업을 일으켜 승리했다. 이후 60년대까지 지쿠호오 지역의 파업은 ‘총자본 대 총노동의 대결’ 양상을 띠었다. 결국 싸움은 자본의 승리로 끝나고, 광부들은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들을 데리고 지쿠호오를 떠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쿠호오를 지켜내기 위한 시민들의 노력도 결실을 맺었다. 폐교 직전이던 게이센히가시 초등학교에는 사친회가 결성됐다. 지역 문화를 위한 ‘최후의 보루’를 아직까지 지켜오고 있다. 오오노 세츠코 할머니는 이곳에서 일본과 아시아 시민들의 평화·우호를 꿈꾸고 있다. 상처받은 땅에서 상처를 기억하고 치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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