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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지옥을 겪었구나, 레비도 나처럼

등록 2006-12-14 00:00 수정 2020-05-03 04:24

재일학자 서경식의 >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우리 시대에 지옥이란 이런 것이다….”

1919년 이탈리아의 토리노에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난 프리모 레비는 2차 대전 말기 반파시즘 저항운동에 뛰어들었다 체포돼, 악명 높은 ‘절멸 수용소’인 아우슈비츠로 강제 이송된다. 그곳, 지옥의 한가운데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즉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체험을 하고 싶다는 가슴 찌르는 희망”을 품었던 청년은 “죽음보다도 나쁜 테러의 목격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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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그는 살아남았다. “가장 괴롭고 힘든 나날에도 친구와 나는 사물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생각을 집요하게 계속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향으로 돌아간 그는 수용소 시절 새겨진 수인번호 문신을 지우지 않고,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른 잔혹한 폭력을 고발하는 작품을 여럿 남겼다. 무엇보다 레비는 항상 삶을 긍정하던 조용한 낙관주의자였고, “죽음이 아니라 삶의, 또 인간성의 패배가 아니라 승리의 상징”이었다. 그런 그가 귀향한 지 40년도 더 지난 1987년 어느 날, 그 어떤 설명도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무엇이 그를 죽음으로 이끌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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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현 옮김, 창비 펴냄)는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재일학자 서경식의 사색적 기행이자, 일종의 자기 고백서다. 1996년 1월1일 밀라노에서 토리노로 향하는 보통열차 안에서 시작된 글쓴이의 여정은 레비가 사랑한 토리노의 산을 둘러보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반파시즘 투쟁과 나치의 유대인 학살, 와 등 레비가 남긴 작품들을 넘나드는 사이 레비의 삶은 자연스럽게 글쓴이 자신의 삶에 고스란히 투영된다.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젊음을 감옥에서 보낸 글쓴이의 친형 서승·서준식의 반유신 투쟁과 재일 조선인에 대한 일제의 만행은 레비의 반파시즘 투쟁과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파시즘의 광풍이 휘몰아쳐오기 전 유대인이란 사실을 ‘주근깨 정도의 사소한 차이’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레비는 “반유대주의라는 ‘촉매’가 일으킨 화학반응에 의해 이탈리아 사회라는 유기체에서 ‘불순물’로 추출돼”갔다. 일본에서 나서 자란 글쓴이 역시 ‘차별’이란 거대한 벽에 맞닥뜨리기 전까지 재일 조선인이란 사실에 대해 “특별히 부끄러워하거나 자랑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을 법하다.

유대인이란 낙인이 찍히고 공통의 고난에 던져짐으로써 레비가 ‘유대인’이 돼갔던 것처럼, 글쓴이 또한 ‘재일’이란 차별의 공유를 통해 재일 조선인이란 자기 정체성에 다가갔을 것이다. 그러니 ‘파리아(차별받는 자)로서 유대인’의 운명을 글쓴이가 일본 사회에서 재일 조선인이 겪고 있는 가혹한 운명과 묘하게 등치시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를테면 레비의 아우슈비츠 생환 23년 만에 편지를 보내 “아우슈비츠에서 일어난 일은, 불특정한 ‘인간’ 전체의 책임”이라고 말한 독일인 뮐러는, 글쓴이가 자주 마주치는 ‘뮐러와 같은 일본인’을 떠올리게 한다. “그때는 ‘시대’가 좋지 않았고 ‘전쟁’은 그런 것이며, 일부의 ‘광신적 군인’이 폭주한 것이지 국민도 천황도 이 ‘사실’을 몰랐다”고 말하는 타입만이 아니다. 그들은 “대개 자신을 휴머니스트이며 평화 애호가라고 굳게” 믿고 있으며 스스로를 ‘재일일본인’이라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 주장’을 내놓곤 한다. 그러곤 어느 순간 “도대체 언제까지 사죄하면 되느냐”고 묻고는, ‘미래’를 얘기하기 시작한다. 이들 ‘괴상한 비교문화론’자들에게 세계는 여전히 ‘단절된 그대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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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는 한글판 서문에서 이 책이 “내 사유 활동의 핵심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며, “한국 사람들에게 읽히기를 염원한다”고 썼다. 이유는 분명하다. 그에게 한국은 “식민지 지배의 비애와 굴욕을 경험한 사람들, 냉전체제에 의한 민족 분단으로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 전쟁과 학살의 공포를 한없이 경험한 사람들”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글쓴이가 이 책을 통해 들려주고 싶은 것은 뭘까? 레비의 증언처럼 “죽어가는 증인들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고, 모든 불길한 징조에 최대한 민감하게 반응해 방죽이 무너지는 것을 막지 못하는 한 홍수는 반드시 일어날 것”이란 경고는 아닐까? 그는 서문에서 “조선반도의 근대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이 평화와 민주주의의 시대에 벌써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음을 느낀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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