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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 듣기까지 11년

대책위 결성·실태 조사·영화 제작·1023일의 천막농성… 반올림의 역사
등록 2019-03-05 02:12 수정 2020-05-02 19:29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제 딸 유미에게 했던 약속을 지키게 돼 기쁩니다.”

반올림 시즌1을 마무리 짓는 말이었다. 장장 11년이 걸렸다.

황상기씨는 2018년 11월23일 ‘삼성전자-반올림 중재판정 이행합의 협약식’ 자리에서 딸 황유미씨를 떠올렸다. 병의 원인을 밝히겠다는 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는 세상을 뒤바꿨다.

고 황유미씨는 2005년 급성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속초상고를 졸업한 뒤 삼성전자 기흥사업장의 반도체 라인에서 일하다 입사 2년 만에 병에 걸렸다. 황상기씨는 병원으로 찾아온 삼성의 과장이 딸의 사표를 받아 가며 500만원을 손에 쥐여주려 했다고 기억한다. 산업재해로 인정해달라는 황씨의 요구에 과장은 “반도체 공장에선 화학약품을 쓰지 않고 취급도 안 하는데 무슨 소리냐?”라고 했다. 황씨의 싸움이 시작된 순간이다.

림프조혈기계암 발생률 일반인보다 최고 5배

황씨는 현재 비영리단체인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반올림)의 대표를 맡고 있다. 반올림은 2007년 11월 건강한노동세상, 다산인권센터, 민주노총 경기본부 등 여러 시민사회단체가 연대해 만든 단체다. 처음엔 단체명이 ‘삼성반도체 집단 백혈병 진상규명과 노동기본권 확보를 위한 대책위원회’였는데, 반도체산업 전반의 산재 문제를 알리자는 취지로 나중에 반올림으로 바꾸었다.

황씨가 2007년 6월 근로복지공단에 산재보험 유족급여 신청을 하며 앞장서자 다른 피해자들도 차례로 나섰다. 2008년 4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백혈병 피해자 4명이 집단으로 산재 신청을 했고 그 뒤에도 꾸준히 이어졌다. 황씨와 딸의 이야기는 2014년 영화 으로 만들어졌는데, 시민 1만 명이 크라우드 펀딩에 참여해 제작비를 모아줬다.

‘반올림 시즌1’의 가장 큰 성과는 첨단 전자산업 노동자들의 작업환경에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이다. 실제 반올림의 요구로 상당한 조사가 이뤄졌다. 2008년 2월 노동부는 ‘반도체 제조업체 근로자 건강실태 일제조사’를 했다. 결과는 공개하지 않았다. 노동부 조사 자료는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으로 넘겨져 ‘반도체 제조공정 근로자의 건강실태 역학조사’로 이어졌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의 조사는 현재까지 국내에서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 상태를 조사한 최대 규모 연구다. 삼성전자, 하이닉스반도체 등 한국반도체협회 소속 6개 회원사와 29개 협력업체에서 1998년부터 2007년까지 근무한 전·현직 근로자 22만9천여 명의 고용보험 자료와 사업장 인사 자료를 바탕으로 조사했다.

결과는 2008년 12월29일 발표됐다. 반도체 제조업 여성 노동자의 경우 비호지킨림프종 등 림프조혈기계암 발생률이 일반인보다 최고 5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백혈병은 여성 노동자는 일반인과 비슷한 수준, 남성 노동자는 일반인보다 낮게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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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 자문 조사에서 벤젠 나와

당시 공단 직업병연구센터 박정선 소장은 “이번 역학조사는 발생률이 매우 낮은 질환인 림프조혈기계암의 위험도를 평가하기엔 추적 기간이 짧았고, 조사 대상자들의 과거 직업력이나 흡연 등 비직업적인 위험 요인에 대한 정보가 없어 한계가 있었다”면서 “암 발생의 원인 규명을 위한 역학 연구는 충분한 위험 요인 정보를 파악해 앞으로 장기적인 추적 관찰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2009년 삼성전자·하이닉스·엠코코리아 반도체 3사가 서울대학교 산학협력단에 의뢰한 ‘반도체 사업장 위험성 평가 자문’도 중요한 연구다. 백도명 서울대 환경보건대학원 교수가 이끈 연구진은 삼성전자 기흥공장에서 쓰는 화학물질에서 발암물질인 벤젠이 나왔다고 밝혔다. 발암물질을 쓴 적이 없다던 삼성의 주장을 정면으로 뒤집은 조사 결과였다. 이 내용은 참여연대가 2010년 9월 서울대 조사보고서 일부를 공개하며 밝혀졌다.

그 와중에 산재 인정 투쟁은 조금씩 진척되고 있었다. 2011~2012년 근로복지공단과 서울행정법원 등은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노동자들의 백혈병, 재생불량성빈혈, 유방암 등을 차례로 산재로 인정했다. 2018년까지 법원은 반도체·엘시디(LCD) 노동자 13명의 질병을 산업재해로 판단했다. 근로복지공단도 2011년 이후 반도체 노동자 15명의 산업재해 피해를 인정했다.

사회적 책임을 느낀 삼성전자는 2012년 9월 반올림에 대화 의사를 전했다. 2013년 12월 삼성전자와 반올림은 직접 협상을 시작했다. 양쪽은 협상에서 팽팽히 부딪쳤다. 당시 삼성전자는 협상에 참여하는 피해자와 가족 8명의 보상을 먼저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반올림은 진정성 있는 사과, 배제 없는 보상, 철저한 재발 방지 대책 등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위기는 내부에서 찾아왔다. 반올림 소속 일부 피해자와 가족들이 ‘반올림이 우리 입장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는다’며 갈라져 나왔다. 2014년 9월 반올림 교섭단 8명 중 피해자와 가족 등 6명이 따로 나와 삼성직업병가족대책위원회(가족대책위)를 구성했다. ‘반올림 시즌1’에서 가장 큰 고비였던 순간이다.

반올림 활동가들이 2018년 7월25일 서울 강남 삼성전자 본관 앞에서 천막농성 해단식을 열고 긴 시간 동안 연대해온 이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반올림 활동가들이 2018년 7월25일 서울 강남 삼성전자 본관 앞에서 천막농성 해단식을 열고 긴 시간 동안 연대해온 이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배제 없는 배상’ 1023일간의 천막농성

협상이 교착되자 2014년 10월 김지형 전 대법관을 위원장으로 ‘삼성전자 반도체 등 사업장에서의 백혈병 등 질환 발병과 관련한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조정위)가 구성됐다. 2015년 7월 조정위는 삼성전자가 1천억원 규모의 기금을 조성해 공익법인을 설립하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삼성전자와 가족대책위는 공익법인 설립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며 반대했다. 삼성전자는 결국 2015년 9월 자체 보상을 시작했다.

반올림은 삼성전자 자체 보상안을 거부했다. 배제 없는 보상을 요구하며 2015년 10월7일 서울 강남역 8번 출구 삼성전자 본관 앞에서 천막농성을 시작했다. 장장 1023일간 진행된 끝이 보이지 않는 대장정의 시작이었다. 두 번의 여름과 세 번의 겨울이 지나갔다. 기둥도 없이 우산과 얇은 비닐로 둘러친 천막을 반올림 활동가들은 ‘5성급 호텔’이라 했다.

그 사이 많은 일이 있었다. 시민들은 촛불을 들고 광화문에 모였고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당했다. 2017년 2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뇌물 혐의로 구속되고, 정권이 바뀌었다. 사회적 분위기가 바뀐 가운데 2018년 1월 삼성전자와 반올림은 다시 대화를 시작했고 조정위에 2차 조정을 요청했다. 조정위는 2018년 7월18일 삼성전자와 반올림에 공개제안서를 보냈고, 양쪽은 조정위가 만드는 중재안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7월25일 반올림은 농성장을 철거하고 해단식을 했다.

2018년 11월23일 ‘삼성전자-반올림 중재판정 이행합의 협약식’은 그 마무리였다. 삼성전자는 회사 누리집에 사과문과 함께 지원 보상 안내문을 올리고 피해자에게 대표이사 명의의 사과문을 전달하겠다고 밝혔다. 또 사태 재발 방지와 사회 공헌의 하나로 500억원의 산업안전보건 발전기금을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에 기탁하기로 했다. 이 돈은 전자산업안전보건센터 건립 등 여러 산재 예방 사업에 쓰인다.

반올림이 밝힌 삼성전자 반도체와 LCD 부문 피해 제보자는 230여 명, 이 중 사망자는 80명이다. 그 외 삼성전자 반도체·LCD 외 사업장과 삼성SDI, 삼성전기 등 계열사, 협력업체와 삼성 외 첨단 전자산업체 노동자까지 합치면 제보자가 450여 명에 이른다.

해피엔딩 마무리 그리고…

김기남 삼성전자 대표이사(사장)는 2018년 11월23일 협약식에서 “삼성전자는 과거 반도체와 LCD 사업장에 있는 건강 유해인자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며 “병으로 고통받은 직원들과 가족분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로써 공식적으로 반올림 시즌1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됐다. 딸과 한 약속을 지킨 황씨 앞에는 더 많은 이의 산재 인정과 보상을 위한 반올림 시즌2가 기다리고 있다.

변지민 기자 d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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