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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퇴사 뒤 루푸스 발병, 두 달 차이로 보상 범위 밖

1988~1992년 삼성전자 부천 반도체 공장 홍경화씨

루푸스·유방암 | 질병 진단 시기 늦어서 보상 범위 밖
등록 2019-03-05 12:17 수정 2020-05-03 04:29
홍경화씨가 항암 치료를 받으려고 2월20일 서울성모병원으로 가고 있다. 박승화 기자

홍경화씨가 항암 치료를 받으려고 2월20일 서울성모병원으로 가고 있다. 박승화 기자

홍경화(53)씨는 온 손에 흉터와 주름이 가득했다. 그래도 다른 산업재해 피해자들과는 달리 쾌활하게 웃으며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홍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8년 삼성전자 부천 반도체 공장에 들어갔다. 주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이었다. 주로 반도체 불량품을 골라내는 일을 했다. 장갑을 끼면 반도체가 미끄러져 깨질 수 있기 때문에 맨손으로 만졌다. 한번은 사내 백일장에서 ‘손’이라는 수필을 써서 1등을 했다. ‘내 손은 못생겨서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지만 이 손으로 하는 일이 참 많다, 내 손이 자랑스럽다’는 내용이었다.

회사 생활은 재밌었으나 밤샘 근무를 포함한 3교대 일이 힘들어서인지 시름시름 앓다가 1992년 3월 퇴사했다. 퇴사 뒤에도 몸살과 고열이 자주 생겼다. 동네 병원에서 감기약을 처방받아 먹으면 열이 내렸다. 1997년 5월 약을 먹어도 열이 내리지 않아 대형병원에 갔다가 전신성 홍반루푸스(이하 루푸스) 진단을 받았다. 루푸스는 면역체계에 이상이 생겨 몸에 만성적인 염증이 생기는 희귀난치병이다. 당시는 국내에 루푸스라는 병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루푸스 환자는 염증이 나타나는 부위가 제각각 다르다. 홍씨는 손과 발의 피부와 손목 관절, 팔에 집중됐다. 손에 수시로 물집이 잡혔고 조금만 스쳐도 물집이 터져 상처가 생겼다. 손가락이 짓물러 서로 붙어버려서 물에 담가 불린 뒤 떼어내기도 했다. 아예 장갑을 끼고 잠에 들었다.

어려운 건 사회생활을 못한다는 점이었다. 삼성전자를 나온 뒤 유치원 교사로 직업을 바꿨으나 상처가 심해서 길게 일할 수 없었다. 몸이 안 좋아지면 곧 그만둬야 했다. 학부모들은 홍씨의 손을 보고 ‘혹시 전염되지 않냐, 일 안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루푸스는 전염병이 아니다. 1년에 길어야 서너 달 일할 수 있었다. 결혼도 포기해야 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그때는 루푸스로 임신이 어렵다고 생각해 결혼할 사람과 결국 헤어졌다. 홍씨는 신앙에 의지해 이겨냈다. 자기보다 힘든 희귀난치병 아이들에게 봉사하며 살았다. 치료비와 생활비는 가족들이 뒷바라지했다. 2018년 유방암도 생겼다.

2018년 11월. 한 지인이 삼성-반올림-조정위의 중재안을 보고 연락했다. 과거 함께 삼성전자에 다녔던 사람인데 ‘너도 혹시 연관이 있지 않겠냐’고 물었다. 홍씨는 반올림과 다른 피해자들이 그동안 치열하게 싸워왔다는 사실을 몰랐다. 평소 사회 분야 뉴스도 거의 보지 않고 살았다. 중재안이 마련되고 뒤늦게 연락한다는 사실에 미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홍씨는 중재안 보상 범위에 포함되지 않았다. 질병 진단 시기가 늦어서다. 퇴사 5년 2개월 뒤 루푸스를 진단받았고, 퇴사 26년 뒤 유방암에 걸렸다. 현재 중재안에 따르면 루푸스는 퇴사 뒤 5년 이내, 유방암은 퇴사 뒤 15년 이내까지만 보상 범위에 포함된다. 홍씨는 루푸스의 경우 발병부터 진단까지 긴 시간이 걸렸을 것으로 의심하지만, 이를 입증할 증거는 마땅치 않다.

홍씨는 삼성전자의 보상을 받는다면 유럽 여행을 꼭 한번 가보고 싶었다. 평생 여행 한번 제대로 가본 적이 없어서다. 보상 범위에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전까지 3일 동안 잠시 행복했다. 평생 신세 진 가족에게 보답하고 싶었다. 기대가 무너지니 가슴이 쓰려서 밥이 안 넘어갔다.

홍씨는 3월4일 반올림과 함께 집단 산재 신청을 한다. 그는 직업병 인정의 폭이 지금보다 넓어져 자기와 같은 이들이 살아갈 수 있는 기본 토대가 마련되길 바란다.

변지민 기자 d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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