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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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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올림 시즌1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지난해 11월 중재안 발표 뒤 반올림으로 220건 제보 쏟아져…

병명, 사업장, 진단 시기 보상 범위 밖 62%, 14명 3월4일 집단 산재신청
등록 2019-03-05 11:00 수정 2020-05-03 04:29
“삼성-반올림 분쟁 11년 만에 마무리.”
2018년 11월, 대다수 언론은 주요 뉴스로 이 소식을 전했다. 2007년 반올림 결성부터 시작된 11년간의 싸움이 일단락됐다는 사실은 누군가에게 안도감을, 누군가에게 희망과 기대를 안겼다.
그런데 그 뒤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삼성-반올림 중재안이 발표된 직후부터 석 달 보름 동안 반올림 상임활동가들은 신규 제보 전화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지난 11년치 피해 제보의 절반에 육박하는 220건이 접수됐다. 과반수는 삼성으로부터 보상받지 못할 가능성이 큰 내용이었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반올림은 큰 산을 넘었지만, 더 큰 산이 앞에 놓여 있다. 첨단 전자산업 분야에선 여전히 새로운 피해자가 나오고 산업재해 인정은 더디며, 기업은 영업비밀을 핑계로 자료를 공개하지 않는다. 반올림은 11년 전 고 황유미씨로부터 시작된 ‘반올림 시즌1’을 힘겹게 마쳤을 뿐이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수많은 숙제를 안은 채.
은 중재안 발표 뒤 반올림에 들어온 신규 제보를 분석했다. 그 결과는 이제 막 시작되는 ‘반올림 시즌2’의 예고편이다. 은 앞으로 ‘반올림 시즌2’ 소식을 계속 기획연재로 보도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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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명이 떠났다. 1987년생, 서른두 살의 젊은이가.
설 연휴를 한 주 앞둔 1월29일. 삼성SDI 수원사업장 클린룸에서 일하던 황모(32)씨가 급성골수성백혈병으로 사망했다. 황씨는 2014년 5월부터 삼성SDI에서 삼성전자의 반도체 포토·식각 공정에 사용되는 화학물질을 개발하다 2017년 12월20일 병을 확인했다. 서울성모병원에서 골수 이식을 받았지만 부작용인 숙주반응으로 2019년 1월19일 중환자실에 입원했고, 열흘 뒤 숨졌다.

화학을 전공한 연구자, 직접 경위서 작성
황씨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화학을 전공한 연구자였다. 그는 살아 있을 때 산업재해보상보험을 신청하기 위해 재해경위서와 직업병 확인서를 직접 작성했다. 자신에게 노출됐을 것으로 보이는 화학물질과 작업환경을 매우 구체적으로 적었다.
“코팅 시에는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화학물질 탓에) 코를 찌르는 냄새가 엄청났으며, 화학물질이 테이블 외부에 쌓여 청소 시에 애를 먹곤 했다.”
“핫플레이트(보통 400℃)를 이용해 웨이퍼에 코팅된 샘플을 경화할 때 발생하는 유증기 및 탄화물을 막아줄 가림막 같은 것 없이 핫플레이트 바로 옆에 붙어서 일을 했다.”
“고온 경화 시 웨이퍼 위에 유리를 대고 있으면 각종 유기 용매와 탄화된 약품들이 고체화돼 빨갛게 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수준의 노출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황씨는 2018년 3월 근로복지공단 수원지사에 직접 산재 신청을 했다. 하지만 산재가 인정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떠났다. 비영리단체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이하 반올림)은 황씨가 삼성SDI에서 일하며 벤젠, 포름알데히드 등 발암물질에 노출됐다고 주장하며 2019년 1월31일 추모 성명을 발표했다.
“산재인정이 되어 치료비 지원 및 재발방지 대책으로 이어지도록 하고 싶은 절박하고 애타는 당사자의 마음과 달리, 근로복지공단은 10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역학조사(전문조사)를 할지조차 알려오지 않았습니다. (중략) 2007년 황유미씨의 백혈병 사망이 알려진 뒤로 12년의 세월이 지났건만 아직도 삼성의 전자계열사들이 노동자의 생명이 위태로운 방식으로 일을 시키는 현실에 분노합니다.”
삼성과 반올림의 싸움이 11년 만에 마무리됐다는데 여전히 누군가는 발암물질 가득한 환경에서 일하다 쓰러진다. 산업재해 인정은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이며 기업의 영업비밀은 노동자의 건강권보다 우선순위에 놓여 있다.
무엇이 마무리됐고, 무엇이 안 된 걸까.
2018년 11월1일로 돌아가보자. 이날 ‘삼성전자 반도체 등 사업장에서의 백혈병 등 질환 발병과 관련한 문제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이하 조정위)는 삼성전자와 반올림 사이에서 최종 중재판정을 내렸다. 핵심 내용은 1984년 5월17일(기흥사업장 1라인 준공 시점)부터 2028년 10월31일까지 삼성전자 반도체·LCD 라인에서 1년 이상 일한 삼성전자·사내협력업체 현직자와 퇴직자 가운데 산재를 겪은 노동자 전원에게 보상하라는 것이었다.
삼성전자와 반올림은 조정위의 중재안을 받아들였다. 현재 독립기구인 ‘삼성전자 반도체·LCD 산업보건 지원보상위원회’(이하 보상위)가 삼성전자로부터 지원보상 업무를 위탁받아 보상 신청을 받고 있다. 보상 대상 질병 목록을 보면 백혈병, 뇌종양 등 암 40종, 다발성경화증 등 희귀질환 10종, 선천성 기형 등 자녀 질환 8종, 유산 등 생식 질환 16종이다.

엄두가 안 나서, 안 될 거라… 제보 못했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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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재안 덕분에 많은 이들이 빠르게 보상받을 길이 열렸다. 삼성디스플레이 사내하청업체에서 클린룸 청정업무를 맡다가 1월3일 유방암 진단을 받은 손윤화(47)씨의 사례가 그렇다. 손씨는 2011년 4월부터 충남 아산 탕정공장에서 역한 냄새를 맡으며 바닥 미세먼지 닦는 일을 했다. 최근 휴직하고 항암 치료 중이다. 과거라면 산재 신청을 하고 보상받을 때까지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법정 싸움을 해야 했는데, 이제는 바로 보상받을 가능성이 있다. 보상위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더불어 삼성디스플레이가 보상 범위에 들어간다.
하지만 중재안은 보상 범위가 제한돼 있다. 앞서 황씨가 소속돼 있던 삼성SDI는 포함되지 않는다. 보상을 해주는 사업장과 질병 종류, 질병 진단 시기 등이 명확하다. 손씨가 ‘반올림 시즌1’의 마무리를 지었다면, 황씨는 ‘반올림 시즌2’의 출발선에 서 있다.
황씨처럼 중재안 바깥에 있는 이들의 숫자는 적지 않다. 중재안이 발표된 2018년 11월1일부터 2019년 2월13일까지 반올림은 신규 제보 220건을 받았다. 그전까지 반올림에 들어온 제보가 약 450건인데, 불과 석 달 반 만에 지난 11년간 파악한 양의 절반에 이르는 제보가 들어온 것이다. 그동안 삼성과 싸울 엄두가 나지 않아서, 어차피 안 될 거라 생각해서, 또는 겁이 나서 연락하지 못한 이들이 희망과 기대, 용기를 가지고 반올림의 문을 두드렸다(황씨는 2018년 11월1일 이전에 반올림에 제보한 경우로 220건에 포함되지는 않는다).
신규 제보 220명 중 삼성 관련 제보는 206명이다. 반올림 활동가들이 1차로 정리한 내용을 토대로 이 분석한 결과 206명 중 62%에 이르는 127명이 중재안 보상 범위 바깥에 있었다. 보상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병명 48명(38%), 사업장 35명(27%), 진단 시기 28명(22%), 기타 이유 16명(13%) 등이었다.
비율에서 보듯 ‘병명’ 때문에 보상받지 못하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조정위가 정한 병명에 포함되지 않는 호지킨림프종, 다발성신경병증, 뇌경색, 크론병, 식도암, 침샘암 등을 앓는 이들이었다. 사실 보상과 비보상을 나누는 기준은 명확하지 않다. 작업환경과 질병 사이의 과학적 인과관계를 따지기보다 그동안 논란이 됐던 질병 위주로 보상 범위를 설정했기 때문이다.
조정위가 2018년 11월1일 발표한 ‘최종 중재판정 및 권고의 요지’를 보면 이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정위는 “이번 중재의 기조는 반도체 및 LCD 작업환경과 질병과의 인과관계에서 어느 정도 불확실성을 전제로 하여, 피해자 구제를 최우선으로 하기 위해 개인별 보상액은 낮추되, 피해 가능성이 있는 자를 최대한 포함하기 위해 보상 범위를 대폭 확대하였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반도체나 LCD 관련 논란이 된 암 중에서 갑상샘암을 제외한 거의 모든 암을 포함”했다고 알렸다.
다시 말해 현재 보상 범위 바깥의 질병은 ‘삼성 직업병 관련해 논란이 되지 않았던 암’ 등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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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뒤 선천성 질환 아이를 낳았지만
보상 대상 범위 바깥인 사유 중 두 번째는 ‘사업장’이다. 삼성SDI·삼성전기 등 삼성 계열사, 삼성전자의 반도체·LCD 외 사업부서, 삼성전자 해외법인, 비사내상주 협력사 등이 여기에 들어간다. 최성관(43)씨는 1998년부터 2003년까지 삼성전자 시스템가전사업부에서 에어컨을 만들다 급성림프구성백혈병에 걸렸다. 에이컨 열교환기를 검사하는 챔버를 시너(유기용매)로 닦는 과정에서 발암물질에 노출됐을 가능성이 있지만, 에어컨 제작부서는 중재안 보상 범위 바깥이다.
세 번째로 질병의 ‘진단 시기’ 역시 주요한 보상불가 사유다. 이번에 반올림에 연락한 한 노동자는 2002년 삼성전자를 퇴사한 뒤 2004년 선천성 질환을 가진 아이를 낳았다. 이후 3번이나 유산했다. 하지만 중재안에 자녀 질환은 여성이 ‘임신 전 3개월부터 출산까지 1개월 이상 근무’해야 인정받을 수 있다. 현재 법적으로 2세 질환은 산재로 인정되지 않는다. 산재는 노동자 본인의 질병만 인정해주기 때문이다.
홍경화(53)씨도 진단 시기 제한에 걸렸다. 홍씨는 1988년 삼성전자 부천 반도체공장에 입사해 1992년 3월 퇴사했다. 퇴사 5년2개월 뒤 전신성 홍반루푸스(이하 루푸스)를 진단받았고, 퇴사 26년 뒤 유방암에 걸렸다. 현재 중재안에 따르면 루푸스는 퇴사 뒤 5년 이내, 유방암은 퇴사 뒤 15년 이내까지만 보상 범위에 포함된다. 홍씨는 루푸스의 경우 발병부터 진단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것으로 의심하지만, 이를 입증할 증거는 마땅치 않다.
황씨도, 최성관씨도, 홍경화씨도 기업 보상 범위 밖에 있다. 이들이 지원받을 방법은 없을까. 11년 만에 어렵게 나온 중재안을 흔드는 것은 삼성과 반올림 모두에 큰 부담이다. 반올림의 공유정옥 활동가는 “중재안 변경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절충안이므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대신 다른 방식으로 보상 범위 바깥에 있는 피해자들을 도울 계획이라고 했다.
공유정옥 활동가는 “신규 제보 중엔 반올림에서 그동안 파악하지 못한 직업병도 있다”며 “신규 제보자들의 산재 신청을 돕고 이를 세상에 알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궁극적으로는 “정부가 산재 인정의 문턱을 낮추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반올림 시즌1’의 활동이 삼성의 책임을 묻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면, ‘반올림 시즌2’에서는 입법 활동 등으로 다변화될 것으로 보인다. 황상기 반올림 대표는 인터뷰에서 “중대재해법을 만들어서 노동자들이 사망하는 기업을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 그래야 기업이 무서워서 예방 대책을 세울 것”이라고 했다. 이종란 반올림 활동가는 “반도체 노동자 직업병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선 공장에서 사용하는 화학물질 등을 알아야 하는데 여전히 영업비밀로 묶여 있다”며 ‘반올림 시즌1’에서 해왔던 알 권리 투쟁도 계속될 것임을 시사했다.
중재안에 포함되지 않는 이들의 산재 신청도 활발해질 전망이다. 조승규 반올림 상임활동가는 “최근 연락 온 제보자 중 먼저 준비된 14명이 3월4일 집단 산재 신청을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홍경화씨 등도 여기 포함된다. 중재안 발표 뒤 일정 기간 쉬면서 앞으로 방향을 고민하려던 반올림 활동가들의 계획도 틀어졌다.

삼성 “계열사 독립 경영, 보상위에 전권 위임”
삼성 계열사에서 삼성전자에 준하는 자체 보상안이 나올 가능성은 없을까. 은 삼성SDI에 사망자 황씨 등 전·현직 임직원의 질병에 대한 보상안을 고민하고 있는지 물었으나 “사실관계를 파악 중”이라는 말밖에 들을 수 없었다. 다른 답변은 거부했다. 보상안이 나올 가능성이 현재로선 낮다고 볼 수 있다. 삼성전자 관계자 역시 “그룹 개념이 사라진 뒤 계열사별로 독립 경영을 하고 있어 다른 회사의 보상안에 대해 말하기 힘들다”고 밝혔다. 중재안에 포함된 보상 범위 확대에 대해서도 “보상위에 전권을 위임했으며 추가 보상이 필요하다면 보상위에서 결정할 일”이라고 선을 그었다.

변지민 기자 dr@hani.co.kr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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