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광(35·가명)씨는 기자와 처음 만난 자리에서 갑자기 다리가 마비됐다. 뇌종양 제거 수술 뒤 찾아온 뇌전증 때문이다. 오른쪽 팔다리가 마비되거나 통제가 안 돼 휘어지곤 한다.
김씨는 2010년 5월 삼성전자 LCD부문으로 입사했다. 충남 천안공장과 삼성전자 중국 쑤저우공장(SSL), 충남 아산 탕정공장 등에서 PM 엔지니어로 생산장비를 수리하는 일을 맡았다. 반도체를 LCD 패널로 옮겨주는 장치인 ‘스토커’를 주로 담당했다. 2012년 LCD부문이 삼성디스플레이로 분사하며 소속이 바뀌었고 2016년 퇴사했다. 늘 잔업이 많았지만 군대 부사관 출신이라 육체적으로 아주 힘들지는 않았다. 워낙 일을 열심히 해서 선배 중에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입사 전부터 반올림 활동에 관심이 있었다. 2010년 김용철 변호사가 쓴 도 읽고 입사했다. 그래서인지 간혹 동료들 행동이 이상하다고 느꼈다. 이소프로필알코올(IPA)을 청소 봉지에 콸콸 부은 다음 거즈 수백 장을 적셔서 장비를 닦았다. IPA는 중추신경계에 유해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화학물질이다. 몸에 그리 좋은 게 아닌데 사람들이 왜 이렇게 청소를 할까 의문이 들었다. 김씨는 늘 방사선과 전자파가 나오는 대형 장비들 곁에서 일했다.
2014년 정기 건강검진 중 뇌종양 성상세포종이 발견됐다. 너무 경황이 없어서 ‘반올림에서 봤던 일이 나에게도 현실이 됐다’고 느끼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아기가 곧 태어나는데, 막막했다. 수술 2주 전 아내가 출산했다.
김씨는 당시 한시적으로 열렸던 ‘삼성전자 반도체 백혈병 보상위원회’를 찾았다. 삼성전자는 2015년 9월 자체 보상안을 발표하고 신청자들에게 보상했다. 반올림과 일부 피해자들이 반발하며 삼성전자 본관 앞에서 천막농성을 시작했고, 오래지 않아 위원회는 문을 닫았다. 당시에는 보상을 받으면 퇴직해야 했다. 김씨에겐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갓 태어난 딸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보상금을 받고 퇴사하기로 결심했다.
희망퇴직서에 ‘병으로 인한 퇴직’이라고 썼더니 인사담당자가 “이렇게 쓰면 안 된다, 희망퇴직금 못 받는다”고 했다. ‘희망퇴직’이라고 다시 썼다. 뒷장에는 ‘이 희망퇴직은 조정위원회 및 반올림과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라는 문서에 서명도 해야 했다. 삼성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지 않겠다는 각서도 썼다. 사진 찍고 싶었지만 당연히 거부당했다.
어떻게든 나아보려고 돈을 들였지만 쉽지 않았다. 2년을 “폐인처럼” 보냈다. 퇴직 뒤 재취업은 쉽지 않았다. 현재도 임시 일자리를 전전하고 있다. 자신의 책임도 있긴 하지만 사실상 퇴사를 강요한 삼성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이 있다.
김씨는 2017년 3월 반올림에 전자우편을 보낸 적이 있다. ‘나는 그만둬서 희망이 없지만 삼성 재직자도 보상받을 수 있게 협상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만두고보니 장애가 있으면 재취업하기 힘들고 보상금으로 평생을 살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의 바람대로 2018년 삼성전자-반올림-조정위가 발표한 중재안에 따르면 현직에 있는 노동자도 퇴직 조건 없이 신청할 수 있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거 좀더 일찍 재직자도 보상을 해줬으면….” 김씨는 말을 흐렸다.
중재안이 발표되자 반올림에 연락할 마음이 생겼다. 반올림의 활동이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모습을 보면서 작은 희망을 가졌다. 최근 뇌종양 한두 건이 법원에서 산재로 인정받게 된 점, 정권이 바뀐 점도 영향을 미쳤다. 김씨는 반올림과 함께 천천히 산재 신청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수없이 넘어졌다 일어나며 걸음마를 떼는 딸을 보며 재활 치료에 큰 힘을 얻고 있다.
변지민 기자 dr@hani.co.kr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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