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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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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인권, 자녀 건강까지 넓고 깊게

한국 사회가 간과해온 노동안전 중요성

각성시켜온 반올림 시즌2의 각오
등록 2019-03-05 12:23 수정 2020-05-03 04:29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구성원들이 2월20일 <한겨레21>과 만나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하고 있다. 왼쪽부터 조승규 노무사, 권영은 활동가, 이종란 노무사, 황상기 대표, 이상수 활동가. 박승화 기자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구성원들이 2월20일 <한겨레21>과 만나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하고 있다. 왼쪽부터 조승규 노무사, 권영은 활동가, 이종란 노무사, 황상기 대표, 이상수 활동가. 박승화 기자

“약자의 유일한 무기는 논증이다.”

리영희 선생은 말했다. 군부독재와 언론 탄압에 맞섰던 선생이 쥘 수 있었던 한 가지는 이성적 추론을 통한 지식뿐이었다고. 리 선생은 평전에서 “이성의 신봉자들이 종교적 권위나 세속적 권력의 본질인 무지, 편견, 폭력, 아집 등과 싸워온 기록은 눈물겨울 만큼 감동적”이라고 했다.

2007년 11월 반도체 노동자의 직업병 피해를 밝히고,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을 지키기 위해 결성된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반올림)가 가질 수 있었던 단 하나의 무기도 논증이었다. 반올림이 삼성이라는 거대 기업과 자본의 횡포,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지 않는 정부·제도에 맞서 싸운 기록을 읽으면 숙연해진다.

반올림이 반도체 노동자들의 질병 사례를 모아 병의 원인이 안전하지 않은 작업환경에 있음을 밝히는 과정은 지난한 ‘지식투쟁’이었다. 기업의 계속된 은폐 시도에도 굴하지 않았다. 반도체 산업장에서 생긴 직업병에 관한 선행 연구와 권위 있는 논문을 끊임없이 찾아내 맞싸웠다. 반올림은 피해자와 법률가를 연결해줬고, 연대해서 정치권을 압박했다.

리영희재단이 2018년 11월 반올림에게 ‘리영희상’을 준 이유다. 리영희상 심사위원회는 “보건·노무·법률 등 여러 분야 전문가와 피해자가 힘을 합쳐 결성한 반올림은 반도체 공장에서 발생한 노동자의 직업병 원인을 규명하고 정의를 구하기 위해 끈질기게 투쟁해 리영희 선생의 정신을 실천했다”고 선정 사유를 설명했다.

권영은 반올림 활동가는 “2007년 3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가 백혈병에 걸려 목숨을 잃은 황유미씨가 안전하지 않은 작업환경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을 이 사회에 알리는 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한 일이다. 사람들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문제로 규정하는 과정이었다”고 평가했다. 반올림의 활동은 그 이상이었다. 한국 사회가 그동안 간과했던 노동안전의 중요성을 알렸다. 노동자 건강을 보장하지 못했던 산업, 과학, 법의 모순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지난해 11월1일 삼성전자와 중재안에 합의하면서 11년간의 활동을 일단락 지은 반올림이 다시 ‘논증’을 준비한다. 중재안 이후 반올림에 새롭게 쏟아진 220건의 직업병 제보가 그들을 멈출 수 없게 했다. 반올림이 중재안 이전의 활동으로 기업에게 책임을 물었다면, 지금부터는 ‘정부’와 ‘정치’에 요구할 차례다. “황유미씨 같은 불행한 피해자가 다시 나오지 않도록 법·제도를 ​바꿔달라”고. 은 ‘반올림 시즌2’를 준비하는 구성원들을 만나 인터뷰했다.

<font color="#991900">“좀더 빠르 게 산재를 인정받을 수 있는 제도 개선 필요” </font>
황상기 반올림 대표

황상기 반올림 대표

“노동자를 병들고 죽게 하는 기업은 감당하기 힘들 만큼 강하게 처벌하는 법이 꼭 있어야 한다.”

2월20일 오후,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열린 ‘유가족과 함께하는 기업처벌법 이야기마당’에 나선 황상기 반올림 대표는 발언을 마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황 대표는 2017년 고 노회찬 의원이 발의한 ‘중대재해 기업처벌법’의 제정을 요구하려고 이날 행사에 나섰다.

“지금까지 삼성에 (딸의) 병에 대한 책임을 지우기 위해 싸워왔고, 보상 중재안에 합의했다. 하지만 반도체와 LCD(엘시디) 두 공장에서 발생한 문제에 대해서만 매듭을 지은 것이다. 중재안 합의 이후에도 반올림이 많은 제보를 받았는데, 반도체·LCD 공장 말고 다른 곳에서도 병에 걸린 사람이 많다. 이들도 보상받을 수 있도록 반올림이 도와야 한다.”

중재안 합의 후에 쏟아진 제보에 ‘무임승차’라는 시선도 일부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는 “용기가 없고 자신이 없어서 지금까지 제보하지 못하고 못 싸운 사람들이지만, 반올림이 싸워온 이유는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무임승차라고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용기내주는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다른 사업장에서 일하다 직업병을 얻은 분들도 좀더 빠르게 산재 신청 절차를 밟을 수 있도록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황 대표는 자신의 딸뿐만 아니라 아직 직업병으로 인정받지 못한 수많은 딸을 위해 다시 일어섰다. “기업과 정부가 노동자들을 속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앞으로는 잘못된 부분이 발견되면 처벌하는 법을 제정해야 한다. 반올림이 이런 법을 만들고 더 많은 노동자의 건강을 위해 일할 수 있도록 관심과 지지를 부탁한다.” 황 대표가 당부했다.

<font color="#991900">“반도체 직업병 원인 밝히고, 노동 자 의 건강 문제 종합”</font>
이종란 노무사

이종란 노무사

다소 홀가분한 표정의 황 대표와 달리 이종란 노무사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이 노무사는 “(중재안 합의에도) 기분이 좋지 않다. 반도체 직업병의 원인이 얼마나 밝혀졌는지 모르겠다.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이나 최소한의 책임을 묻는 것도 제대로 했는지 의문이다.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아야 하는 게 목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스스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며 자괴감 섞인 표정을 지었다. 지난 1월29일 세상을 떠난 삼성SDI 선임연구원 황아무개(32)씨가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반도체용 화학물질 개발을 담당했던 황씨는 2017년 12월 급성골수성백혈병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 끝내 숨을 거뒀다.

“아직 우리가 명확하게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황 연구원이 일했던 시기가 2014년부터다. 2014년이면 이미 황유미씨 사건이 1심 판결(승소) 이후 3년이 지난 시점이다. 영화 이 나올 정도로 사회적으로 공론화가 된 시기인데, 일했던 환경을 들어보면 말도 안 될 정도로 열악했다. 환기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고, 벤젠 같은 발암물질이 얼마든지 나올 수 있었다. 화학을 전공한 연구자가 그런 위험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된다. 위험을 과소평가하는 조직 문화 때문에 직업병 예방이 전혀 안 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노동조합이 없어 현장의 목소리가 전달되지 않으니 얼마나 안전해졌는지 정확한 진단이 어렵다. 진정한 변화는 아직 없었다고 본다. 앞으로 노동자의 인식과 행동이 싹 바뀌어야 하고 기업도 책임지려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반올림 시즌2’에선 노동자 당사자의 건강 문제뿐만 아니라 자녀의 건강 문제까지 폭넓게 들여다본다. 여기에는 제주의료원에서 근무하다 심장 기형 자녀를 낳고, 일부는 태아를 유산해 제기한 집단 산재 소송의 결과가 중요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font color="#C21A1A">(제1206호 ‘아이가 죽어야 인정되는 산재’ 참고)</font>. 이 노무사는 “2세 질환은 노동자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산업재해 보상을 받기가 어정쩡했다. 그동안 반올림에 (2세 질환) 제보가 계속 있었지만 근로복지공단에서 적용하지 않아 도울 수 없었다. 하지만 미국에선 유산이나 2세 질환이 반도체 산업의 전형적인 직업병으로 이미 주목받았다. 앞으로는 2세 질환을 비롯한 노동자의 건강 문제를 종합적으로 보겠다”고 말했다.

<font color="#991900">“전자 산업 전반과 외주화되는 위험 감시”</font>
이상수 활동가

이상수 활동가

“힘 빠지는 일이 여전히 벌어지지만 우리의 문제제기로 성과를 냈다. 낙담할 것만은 아니다.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삼성전기 엔지니어 출신인 이상수 활동가는 지난 11년의 반올림 활동이 일궈낸 긍정적인 변화를 강조했다. 1999년에 입사해 2010년까지 인쇄회로기판(PCB) 연구를 했던 이씨는 “황유미씨가 일하던 공장은 없어졌고, 황모 연구원이 일했던 연구실도 바닥을 교체했다. 이는 기업이 사회문제로 인식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첨단 전자산업은 직업병 원인이 되는 유해 요인을 밝혀내는 게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소중한 교훈”이라고 했다.

2028년까지 진행될 피해자 보상과 삼성전자가 출연하는 산업안전보건 발전기금 500억원의 사용처 감시도 반올림이 해결할 과제다. 산업안전보건 발전기금은 아직 구체적 사용 방안이 정해지지 않았다. 이씨는 “아직 구체로 계획을 세운 것은 아니지만, 반올림이 산업안전보건 발전기금 용처에 아이디어를 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공장에서 쓰는 화학물질의 유해성 연구를 지원하고, 연구를 수행할 사람을 키우며, 예방 대책 수립에 기금을 쓰자는 등의 아이디어가 나온다”고 설명했다.

이씨는 전자산업 전반과 외주화되는 위험에까지 감시망을 넓혀야 한다고 했다. 그는 “반도체 공장뿐만 아니라 인쇄회로기판이나 발광다이오드(LED) 등을 생산하는 공장에도 위해 요소들이 많다. 최근에는 반도체 시설을 분해해서 씻는 유지 보수 업무를 하는 하청업체가 매우 위험한 환경에 놓여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공장이 자동화되면서 위험이 줄어들 수 있지만, 외주화로 위험이 다른 곳으로 옮아가기도 한다. 반올림이 앞으로 들여다봐야 할 것”이라고 했다.

<font color="#991900">“노동자, 학생, 시민을 대상으로 노동 건강 교육”
</font>
권영은 활동가

권영은 활동가

“반올림 시즌1에서는 제보되는 사안마다 구성원들이 모여서 토론하고 문제를 폭로하기 위해 노력했다면, 반올림 시즌2에선 좀더 제도적으로 어떤 변화를 끌어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반도체 공장 직업병을 넘어서 다른 사업장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의 영역을 확장하고 안정적인 연대를 추구해야 한다.”

권 활동가는 지금까지 반올림의 활동을 기록하고, 공유해 폭넓은 사회적 공감을 끌어내고 싶다는 포부를 보였다. 권씨는 “반올림의 활동이 지금까지는 노동자의 건강에 주로 초점을 맞췄는데, 앞으로는 인권과 관련된 일도 많이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태안에서 김용균 노동자가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사건 이후 노동자들이 자신의 인권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백혈병으로 목숨을 잃은 황 연구원도 어쩌면 경직된 조직문화 안에서 자기 권리를 미처 말하지 못하고, 권리가 있는지도 몰랐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반올림이 앞서 쌓은 경험을 잘 정리해서 우리 사회의 평범한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고 했다.

권 연구원은 이 밖에도 노동자와 학생, 일반 시민에게 반올림 활동가가 노동 건강에 대한 교육을 활발하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나타냈다.

<font color="#991900">“산재 신청 문턱 낮추고, 직업병 범위 확장”</font>
조승규 노무사

조승규 노무사

“반올림이 출범한 뒤 11년 동안 받은 제보가 450건이 채 안 됐는데 중재안 합의 이후 넉 달 사이에 220건이 쏟아졌다. 한 달이 1년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우리 사회에 이렇게 아픈 노동자가 많다는 사실에 깊은 슬픔을 느낀다.”

지난해 8월 반올림에 합류해 새로운 제보 내용을 정리하고 있는 ‘젊은 피’ 조승규 노무사는 방대한 양의 제보에 압도당하지 않으려고 분투한다. 2011년 대학에 입학해 사회학을 공부한 조 노무사는 학생 때부터 ‘노동안전’에 관심이 많았다. 일찌감치 활동가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를 찾았다가 “노무사가 되면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2015년 입대와 동시에 노무사 시험을 준비했다. 2017년 노무사 시험에 합격하고 2018년 8월 대학을 마친 뒤 곧장 반올림으로 들어왔다.

그는 “삼성전자 서초 사옥 농성이 끝날 때쯤 들어왔는데 일을 해보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렵다. 제보 내용을 들여다보면 산재 신청이 쉽지 않은 분이 많다. 산재 신청이 안 된다고 해서 직업병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직업병의 범위를 넓히기 위해 우리가 싸워야 한다. 지난 11년 동안 반올림이 기적 같은 일을 해냈지만 여전히 숙제가 많다”고 했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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