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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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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직업병’을 인정하라

노동자의 건강권 보장을 위해 끌어내야 할 제도 변화
등록 2019-03-05 03:20 수정 2020-05-02 19:29
2월20일 오후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열린 ‘유가족과 함께하는 기업처벌법 이야기 마당’이 열렸다. (왼쪽부터) 김혜진 생명안전 시민넷 공동대표, 반올림 대표이자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 제주 현장실습생으로 숨진 이민호군의 아버지 이상영씨, 원진산업재해자협회 위원장 박민호씨, 고 이한빛 피디 동생 이한솔씨,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사고로 숨진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씨가 묵념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2월20일 오후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열린 ‘유가족과 함께하는 기업처벌법 이야기 마당’이 열렸다. (왼쪽부터) 김혜진 생명안전 시민넷 공동대표, 반올림 대표이자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 제주 현장실습생으로 숨진 이민호군의 아버지 이상영씨, 원진산업재해자협회 위원장 박민호씨, 고 이한빛 피디 동생 이한솔씨,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사고로 숨진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씨가 묵념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이 문제를 계기로, 우리 국가와 사회가 노동자의 건강권이라는 기본적 인권 보장을 위해 무엇을 다해야 할지 함께 고민해보자. 정부를 대표해 고용노동부, 국회를 대표해 환경노동위원회(환노위)가 ‘시즌2’를 이끌어나가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2018년 11월23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반올림)와 삼성전자의 ‘중재판정 이행합의 협약식’에 나선 김지형 ‘삼성전자반도체 등 사업장에서의 백혈병 등 질환 발병과 관련한 문제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 위원장은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았지만 ‘반올림 시즌2’를 예고했다.

반도체 노동자의 직업병 인정을 놓고 11년 동안 갈등했던 기업(삼성전자)과 노동자(반올림)가 처음 손을 맞잡은 것이었지만, 이는 ‘끝’이 아닌 ‘시작’이었다. 직업병에 신음했던 노동자들이 기업의 사과를 받아냈지만, 이를 외면하고 방관했던 정부에는 책임을 묻지 못했다.

노동자에게 직업병을 준 것은 기업이었지만 ‘직업병을 직업병이라고 인정하지 않은’ 것은 정부였다. 기업의 사과뿐만 아니라 정부의 반성 또한 중요한 이유다. 정부가 잘못을 인정하고 노동자의 건강권을 보장하는 법·제도를 마련하지 않으면 황유미씨와 같은 직업병 피해자와 노동자의 아픔을 외면했던 삼성전자와 같은 기업이 계속해서 나올 수밖에 없다.

김지형 조정위원장과 조정위원인 정강자 인하대 교수(법학전문대학원), 백도명 서울대 교수(환경보건학)는 중재위 권고문을 통해 국가와 사회의 역할을 강조했다. 권고문은 “국민의 생명권과 건강권을 보장하는 것은 헌법에 담긴 국가와 사회공동체 모두의 책임이다. 노동건강권의 적정한 보장을 이뤄내기 위해 산재 판정에서 인과관계의 증명 책임을 전적으로 노동자에게 부담시키는 것은 적정한 보상의 실현에 막대한 장애로 작용한다”고 지적했다. 중재안에 합의했던 황상기 반올림 대표는 “정부의 산업재해 보상을 받기가 그토록 어렵지 않았다면 우리 노동자와 가족이 이렇게까지 고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근로복지공단은 많은 산업재해 노동자에게 절망을 안겨줬다. 산재보험 제도와 근로복지공단을 개혁해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역할을 다해야 한다”며 정부에 제도 개선을 촉구했다. 이 ‘반올림 시즌2’에서 노동자의 건강권 보장을 위해 끌어내야 할 제도 변화를 살펴봤다.

노동자의 알 권리 보장산업안전보건법을 강화해야

경북 문경에 사는 정아무개(33)씨는 2004년 3월 삼성디스플레이 천안공장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그의 나이 18살 때였다. 공장에 처음 들어갈 때 신체검사에선 건강등급 A를 받았지만 입사 이후 외이도염, 부비동염, 결막염 등 여러 가지 염증성 질환에 시달렸다. 2006년 6월에 회사를 그만둔 뒤에도 여러 질환을 달고 살았고, 콜라색 소변을 보기 시작해 서울대병원에서 2015년 ‘아이지 에이(IgA) 신병증’ 판정을 받았다.

공장에서 아세톤과 이소프로필알코올(IPA) 등의 유기화학물질로 공장 설비와 기계 부품을 씻는 업무를 담당했던 정씨는 자신의 질병이 직업병에 해당한다고 보고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보상보험 급여를 신청했으나, 공단은 2017년 4월 업무와 질병 사이에 인과관계가 인정되지 않는다며 정씨의 신청을 승인하지 않았다. 공단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정씨는 산업재해보상보험심사위원회에 재심사를 청구했지만 위원회도 기각했다.

결국 정씨는 2017년 말 법원에 요양불승인처분 취소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정씨가 일했던 공장의 노동환경을 파악하기 위해 삼성디스플레이 쪽에 2018년 말 ‘문서 제출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회사 쪽은 “2004년부터 2008년까지 근무한 삼성디스플레이 천안 사업장의 공정 도면과 배치도 등은 영업비밀로 관리되고 있는 자료로, 제출하기 어려운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며 문서 제출에 응하지 않았다. 정씨는 반올림이 삼성과 합의한 중재안에 따라 피해를 보상받을 수 있지만, 정부에선 산재로 인정하지 않는 모순된 상황에 부닥쳤다.

이처럼 기업이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공장에서 쓰는 화학물질을 공개하지 않으면 직업병을 앓는 노동자들은 자기 병과 일 사이의 관계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직업병과 업무 사이의 인과관계를 설명하지 못하면 산재보상을 못 받는다. ‘반올림 시즌1’의 사례들을 보면 기업은 영업비밀 외에도 “사용 물질에 대한 정보가 없다”거나 “사용 물질 기록을 폐기했다”는 등 ‘이유 같지 않은 이유’를 대며 정보 공개를 피했다. 그러면 공단은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며 산재 보상을 거부했다.

노동자가 어떤 화학물질에 노출되는지 ‘알 권리’는 건강권 보장을 위한 최후의 보루다. 환경부는 2011년 수립한 ‘국가화학물질관리 기본계획’에서 “현재 유통되는 4만3천 종의 화학물질 중 유해 정보가 확인된 것은 15%에 불과하다”고 인정했다. 게다가 전자산업이나 첨단산업은 사용하는 화학물질이 빠르게 바뀌고 신물질로 대체되기 때문에 더욱 위험성이 높다. 화학물질의 위해성 검증을 받고 등록하지 않으면 아예 쓸 수 없는 유럽연합(EU)과 같은 곳도 있지만 한국은 화학물질의 안전성에 대한 검증이 없어도 일터에서 사용할 수 있는 법 체계를 갖고 있다. 이처럼 취약한 제도 안에서 노동자가 직업병을 앓게 되면 일터에서 사용됐던 화학물질을 파악하고, 작업환경측정보고서를 확인하기 위해 몇 년씩 싸워야 한다. 황상기 반올림 대표는 “노동자가 무슨 화학물질을 쓰는지 알 수 있게 알 권리를 보장할 수 있도록 산업안전보건법을 강화해야 한다. 노동자 혼자 회사의 안전을 살피고 다른 의견을 내기가 어렵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노조할 권리를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기업이 단순히 사용한 화학물질을 공개하는 것을 넘어서 직접 화학물질의 위해성을 파악해 공개하도록 요구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직업환경의학 전문의인 반올림의 공유정옥 활동가는 “첨단 전자산업에서 신물질을 많이 사용하고, 섞어서 많이 쓰기 때문에 화학물질을 공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기업이 해당 물질의 위해성을 직접 연구해서 정보를 생산하고 공개·보관의 의무를 지도록 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제안했다.

직업병 패러다임을 바꾸자2017년 사법부 판결 실무에 적용해야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서 업무와 질병 사이의 인과관계는 반드시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증명돼야 하는 것은 아니다. 법적·규범적 관점에서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인정되면 증명됐다고 봐야 한다. 산업재해의 발생 원인에 관한 직접적인 증거가 없더라도 여러 사정을 고려해 합리적인 추론으로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있다.”(대법원, 2017년 8월29일 선고 2015두3867 판결)

노동자가 직업병과 노동환경 사이의 인과관계를 밝히고 자신의 건강권을 지키는 것이 어렵다는 점을 고려해 사법부는 2017년에 위와 같은 판결을 내렸다. 반올림과 노동보건안전 전문가들은 직업병의 패러다임을 바꾼 가장 전향적인 판결로 꼽는다. 대법원은 이 판결에서 “첨단산업은 발전 속도가 빨라 작업장에서 사용되는 화학물질이 빈번하게 바뀌고 화학물질 자체나 작업 방식이 영업비밀에 해당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산업재해의 발생 원인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사업장이 개별적인 화학물질의 사용에 관한 법령상 기준을 벗어나지 않더라도 그것만으로 안전하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며 “산재보험은 무과실 책임을 전제로 사업자의 과실 유무를 묻지 않고 산재보상을 하되, 사회 전체가 비용을 분담하도록 한다. 첨단산업은 불확실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 부딪힐 수 있는데 보험은 노동자의 희생을 보상하면서도 첨단산업의 발전을 장려하는 기능이 있다”고 판시했다.

노동자의 직업병을 판정하고 보상 여부를 결정하는 과정은 의학적 판단뿐만 아니라 고도의 과학 지식과 사회적 추론이 필요하다. 현재 사용되는 화학물질의 유해성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다는 과학 지식의 한계, 직업병에 걸린 노동자 보상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직업병 결정을 해야 하는데, 사법부는 이미 이를 인정했다. 문제는 이렇게 이미 존재하는 판례를 실무에 제대로 적용하지 못하는 산재보험 현장이다. 직업병 피해자들은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신청을 했다가 인정받지 못한 뒤 법원으로 가는데, 이렇게 지난한 과정을 거치면서 마음에 상처를 입기도 한다.

이종란 반올림 노무사는 “대법원 판결 이후 근로복지공단도 추정의 원칙을 도입하였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의 경우, 의사가 다수인 판정위원 구조속에서 판례보다는 여전히 의학적 증명, 측정자료에 의존한 협소한 판단기준으로 산재인정을 어렵게 하는 경우가 나타나고 있다. 행정지침을 넘어서 법을 개정하여 보다 손쉽게 산재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산재의 문턱 낮추자 신청 양식부터 바꿔야

직업병을 앓는 노동자들이 4대 사회보장 보험 중 하나인 산재보험 신청을 더 쉽게 하고, 더 많이 보상받을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공유정옥 활동가는 “대법원 판결에서 밝혔듯이 산재보험의 목적은 과실의 유무를 따지는 게 아니라 일을 하다 다친 노동자가 보상받을 수 있도록 만든 제도다. 병원에서 간호사가 일하다 주삿바늘에 찔려 파상풍 주사만 맞아도 산재보상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산재 신청이 보편화돼야 한다”고 했다.

반올림 조승규 노무사는 산재 신청의 문턱을 낮추기 위해서 제도뿐만 아니라 일선 현장의 행정 절차까지 많은 부분을 바꿔야 한다고 했다. 그는 “지금 산재 신청서는 병원에서 받는 일반 진단서로 안 되고 산재 신청용 진단서를 따로 받아야 한다. 그런데 의사들이 산재 신청용 진단서를 쓰기만 해도 산재로 인정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써주지 않는 경우가 있다. 산재 신청자들이 첫 단계에서부터 좌절을 겪는데, 우선 산재 신청서 양식부터 바꿔야 한다”고 했다.

반올림 시즌1의 걸림돌이었던 이런 문제들이 개선된다면, 시즌2의 여정은 좀더 수월해질 것이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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