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인신매매라고 하면 성매매에 한정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국제 기준은 다르다. 한국 농·축산 이주노동자들은 계약서상의 노동시간·임금과 실제 노동시간·임금의 차이로 고통을 겪는다. 허위 계약으로 노동착취를 당하고 자유의지로 사업장을 이동할 수 없다면 인신매매로 본다.
불편한 결론이다.
“한국의 법·제도와 행정이 농·축산업 현장의 인신매매를 악화시키고 있다.”
노마 강 무이코 국제앰네스티 동아시아 조사관은 한 문장으로 뽑아 요약했다. 보고서 ‘고통을 수확하다: 한국 농·축산업 이주노동자 착취와 강제노동’에서 그는 ‘뜨거운’ 결론을 이끌어냈다. 그가 도려내 보여준 국내 농·축산업 이주노동의 단면은 표현만큼이나 아프고 논쟁적이다. 보고서를 내는 데 1년10개월이 걸렸다.
노마 강 무이코는 2008년 ‘한국: 촛불집회에서 경찰력 집행’ 보고서를 발간하며 한국 사회에 이름을 알렸다. 이주노동은 그의 주요 조사 영역이다. 2009년 ‘일회용 노동자: 한국의 이주노동자 인권상황’을 작성한 뒤부터 한국의 이주노동 실태를 모니터링해왔다. 2011년과 2013년엔 네팔(‘거짓약속: 네팔 이주노동자의 강제노동’)과 인도네시아(‘이윤을 위해 착취당하고 정부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 홍콩의 인도네시아 가사이주노동자’) 이주노동자들의 인신매매 피해 실태를 고발했다. 그는 국제적 송입·송출 시스템 속에서 한국과 아시아 이주노동자들이 어떻게 얽히고 물리는지를 살펴왔다. 그 톱니바퀴 위에 이번 보고서를 올리면 한국 농·축산업 이주노동이 무관할 수 없는 ‘아시아의 비참’이 읽힌다.
한국의 이주노동 실태 모니터링해와=2009년 ‘일회용 노동자’ 보고서를 쓰면서 한국에서 가장 취약한 이주노동 분야가 농·축산업이란 사실을 알게 됐다. 보고서 후속 작업을 하던 중 겨울에 일감이 없다는 이유로 고용주가 유기한 노동자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사를 시작했다. 2014년이면 고용허가제 도입(2004년 8월17일) 10년이 되는데, 농·축산 분야에선 제도가 나아지기보다 후퇴하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한국에서 인신매매라고 하면 성매매에 한정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국제 기준은 다르다. 한국 농·축산 이주노동자들은 계약서상의 노동시간·임금과 실제 노동시간·임금의 차이로 고통을 겪는다. 허위 계약으로 노동착취를 당하고 자유의지로 사업장을 이동할 수 없다면 인신매매로 본다.
-2013년 1월 기초조사를 시작했다. 보고서 발표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처음 계획한 건 20쪽 안팎의 브리핑이었다. 이미 100여 쪽 분량의 보고서를 낸데다 고용허가제 노동자 중 농·축산 분야는 8%(2013년 12월 현재 전 업종 24만6695명 중 1만9726명) 정도여서 그 분량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조사를 시작하자 농·축산과 연계된 고용허가제가 너무 복잡했다. 한국어를 어느 정도 구사하는 나도 어려운데 언어 소통이 쉽지 않은 이주노동자들은 얼마나 당혹스럽겠나. 제대로 이해하려면 박사학위가 필요할 지경이었다. 고용허가제의 어떤 메커니즘이 자신들의 삶을 옥죄는지 농·축산 이주노동자들이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논리 구조를 찾느라 시간이 필요했다.
-조사 내용만 보면 지난해 한국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한 보고서(‘농·축산업 이주노동자 인권상황 실태조사’)와 거의 일치한다. 앰네스티 보고서의 차별성은 무엇인가.=관점과 평가다. 인권위 보고서는 한국적 맥락에서 인권침해를 조사했다. 국제 비정부기구(NGO)인 우리는 글로벌 이슈로서 한국의 이주노동을 바라봤다. 국제 기준에서 평가할 때 한국 농·축산업 현장에서 강제노동과 인신매매가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 관점이 보고서 전반을 아우르는 우리의 핵심 문제의식이다.
-인신매매라는 결론에 반발하는 고용주가 적지 않을 듯한데.=한국에서 인신매매라고 하면 성매매에 한정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국제 기준은 다르다. 한국 농·축산 이주노동자들은 계약서상의 노동시간·임금과 실제 노동시간·임금의 차이로 고통을 겪는다. 허위 계약으로 노동착취를 당하고 자유의지로 사업장을 이동할 수 없다면 인신매매로 본다. 유럽연합(EU) 등에선 노동 분야 인신매매에 대응하는 경찰과 공무원들이 잘 훈련돼 있다. 한국에서는 노동착취에 따른 인신매매는 주목하지 않거나 무시하는 분위기다. 근로감독관들이 인신매매 여부를 인지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인권침해를 파악하고 대처할 수 있겠나.
노동자이지 도우미가 아니다-제조업이나 건설업 등보다 농·축산 분야의 인신매매가 더 심하다고 할 수 있나.=그렇다. 제조업의 계약서는 근로시간과 초과노동 임금 등의 규정이 비교적 명확하다. 농·축산 분야의 계약서는 계약서라고 할 수 없다. 근로기준법 제63조를 근거로 모든 것을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농촌의 지리적 특성상 상호 접촉이 적고 정보가 제한돼 있다는 점도 작용한다.
-기억에 남는 조사 사례가 있나.=25살 캄보디아 남성이 배추를 뽑다가 허리를 다쳤다. 관리인한테 잠시 앉아 쉬겠다고 부탁했으나 거절당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일하다 배추 뿌리를 잘못 잘라 다섯 포기가 상했다. 관리인이 남자를 구타하는 사이 관리인 동생은 남자의 목을 붙잡고 있었다. 형제는 힘을 합쳐 남자를 때리고 발로 찼다. 노동자가 고용센터를 찾아갔더니 그가 배추를 잘못 잘라 벌어진 일이라며 사장한테 가서 사과하라고 했다. ‘당신은 폭행당해선 안 되는 사람’이란 사실을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는 상황은 절망스럽다. 내 일의 특성상 폭행 사례를 많이 접한다. 하지만 폭행 피해자가 정부기관에 도움을 청했을 때 피해자의 잘못이라며 사과를 요구하는 경우는 듣지 못했다. 인터뷰했던 많은 노동자들이 울었다. 슬픔 이상으로 이해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고, 분노 이상으로 자신의 처지를 개선할 수 없다는 절망 탓이었다.
-한국의 농업 자체가 국가 정책에서 소외된 산업이다. 왜곡된 유통 구조는 농민들의 생산물이 제값을 받지 못하도록 한다. 이런 현실을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농촌에서 사라진 노동력을 이주노동자들이 대신하고 있다. 농·축산업 종사자들의 어려움을 이해한다. 그래서 정부의 책임이 더욱 크다. 일부 고용주는 가사도우미를 부리듯 이주노동자들에게 집안일까지 시킨다. 이주노동자는 노동자이지 도우미가 아니다. 근로기준법 제63조가 그런 왜곡을 부른다. 이주노동자들은 계약서대로 대우받을 것이라 기대하고, 고용주는 이주노동자들의 바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정부가 더 이상 유지되기 힘든 제도를 고집하면서 서로의 오해를 부추기고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다.
-국제사회가 한국의 농·축산 이주노동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한국은 이주노동자 채용국이다. 그만큼 책임 있는 위치에 있다. 한국이 설정한 기준이 다른 나라로 수출될 수도 있다. 실제로 아시아 국가들 중엔 고용허가제가 좋은 제도라며 따라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곳도 있다. 지구적 측면에서 한국의 고용허가제가 국경을 넘어 재현될 수 있다면 사업장 변경 제한 같은 독소조항은 수출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독소조항’ 사업장 변경 제한 반드시 폐지돼야 -대안은 무엇인가.=첫째, 근로기준법 제63조와 고용허가제의 사업장 변경 제한 규정은 반드시 폐지돼야 한다. 둘째, 일선 출입국 업무 관계자나 경찰, 고용센터 직원들이 인신매매의 국제적 기준을 인지하고 훈련받아야 한다. 셋째, 충분한 통역과 쉼터 등 피해자를 지지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
-보고서를 토대로 국제사회에서 어떻게 이슈화할 계획인가.=유엔 시스템을 활용할 계획이다. 각종 기구를 대상으로 로비를 진행하려고 한다. 국제노동기구(ILO) 관계자들과도 접촉하고 있다. 미국과 영국 등 한국의 인권 상황에 관심이 많은 국가들을 상대로 한국의 현실을 알리는 활동도 추진 중이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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