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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익의 신이여, 강림하소서

스펙터클 스펙 쌓기|‘기술’만 가르쳐주는 학원, 학원비를 쏟아부어도 오르지 않는 성적
등록 2013-11-22 13:48 수정 2020-05-03 04:27
매일 아침 8시면 서울 종로구 종로3가 금강제화 사거리는 학생들로 붐빈다. ‘토익 900점 돌파’를 향해 내달리는 취업준비생들이다. 이들을 유혹하는 학원 광고가 나부낀다.탁기형

매일 아침 8시면 서울 종로구 종로3가 금강제화 사거리는 학생들로 붐빈다. ‘토익 900점 돌파’를 향해 내달리는 취업준비생들이다. 이들을 유혹하는 학원 광고가 나부낀다.탁기형

35만원과 맞바꾼 5점

이은미 종로3가의 싼 밥집들은 이미 학원 수강생들로 가득했다. 배가 꼬르륵거렸다. 아침 8시30분 토익 강의를 들으려고 편의점 삼각김밥으로 아침을 때웠다. 배고픈 것도 배고픈 거지만 너무 추웠다. 칼바람을 맞으며 종각 쪽으로 내려갔다. 청계천가에 있는 5천원짜리 불고기백반집. 좁은 계단을 올라가 구석 자리를 잡았다. 6명이 다 앉기엔 비좁다. 하지만 만족해야 한다. 이 식당은 싸면서도 반찬과 밥이 무한 리필된다. 조금만 늦었으면 다시 다른 곳으로 가야 했다.

점심을 먹고 나면 숨 돌릴 틈도 없이 바로 학원으로 돌아간다. 학원에서 제공하는 리스닝테스트를 해야 한다. 시험이 끝나면 각자 채점한다. 쥐 죽은 듯 조용하다. 오늘은 몇 개 안 틀렸다고 좋아하고 있는데 현수가 갑자기 채점하던 펜을 던진다. “내가 외국계 회사에 들어갈 것도 아니고, 진짜.”

매일 아침 8시면 서울 종로구 종로3가 금강제화 사거리는 학생들로 붐빈다. 영어학원 건물 밖의 한 귀퉁이는 그들이 내뿜는 담배 연기로 자욱하다. 커피자판기 앞에는 졸음을 쫓으려는 발길이 이어진다. 강의실로 가는 엘리베이터 앞에 수십 명이 두 줄로 서 있다. 만원 경고음이 울릴 때까지 엘리베이터는 무게를 견뎌낸다. 몸을 부딪치며 강의실에 도착하면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다시 몸을 부딪친다.


적어도 나에겐 ‘토익의 신’이 강림하지 않았다. 점수는 올랐다. 단 5점. 학원비만 28만원, ‘노랭이’ 영단어장 1만2900원, 스터디 비용 1만원, 시험 응시료 4만2천원까지. 거기다 스터디 벌금까지 합하면, 나는 토익 5점과 35만원을 맞바꿨다.


‘토익 900점 돌파.’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다. 스타 강사의 강의를 들으며 스터디를 할 때만 해도 나는 곧 900점의 점수를 얻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인터넷 홍보 동영상에서 스타 강사를 우연히 봤다. 왕관을 쓰고 망토를 두른 그는, 눈이 안 보일 정도로 사람 좋게 웃고 있었다. ‘토익 최다 만점 강사’ ‘토익의 끝판왕’ ‘토익의 신’ ‘토익 국민 대표 강사’. 수많은 찬사가 떴다가 사라졌다. 토익 900점이 눈앞에 와 있는 듯했다. ‘발밑에 차이는 게 토익 900점이라던데 나라고 못하겠나. 첫 시험에서 800점 초반이 나왔으니까.’ 곧바로 수강 신청을 했다. 기꺼이 월 14만원의 학원비를 냈다. 밥값을 줄이더라도 말이다.

적어도 나에겐 ‘토익의 신’이 강림하지 않았다. 점수는 올랐다. 단 5점. 학원비만 28만원, ‘노랭이’ 영단어장 1만2900원, 스터디 비용 1만원, 시험 응시료 4만2천원까지. 거기다 스터디 벌금까지 합하면, 나는 토익 5점과 35만원을 맞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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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익 공부가 끝나면 강남으로 향했다. 토익스피킹 학원 수업이 저녁 7시에 시작한다. 첫 강의 시간, 강사가 들어와 책상 위에 가방을 올려놓았다. 루이뷔통이다. 수강생들의 시선이 쏠렸다. “제가 월 1천만원 넘게 벌어요.” 가방만 명품이 아니다. 신발은 발리에다 노트북도 애플 최신형이다. 외모도 말투도 한국인인데 이름은 ‘스티브’다. 알려준 휴대전화 번호를 입력하자 영어강사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이 뜬다. 외제차를 옆에 두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얼마 뒤 바뀐 프로필 사진에서는 유럽의 밤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밤 9시가 되자 함께 강의를 듣던 주현이의 눈이 빨갛게 충혈됐다. 오늘 일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본강의 뒤 진행되는 족집게 첨삭을 받아야 한다. 쉬는 시간, 우리는 학원 구석에 있는 자판기로 갔다. 오늘만 넉 잔째. 저녁도 못 먹고 커피만 마시니 속이 쓰려온다. 첨삭은 밤 11시를 훌쩍 넘겨서야 끝났다. 강남에서 월곡동에 있는 우리 집까지 1시간30분. 약수역까지는 어떻게 간다고 쳐도 그 뒤엔 지하철이 끊길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택시를 잡았다. 우리는 토익스피킹 과정을 듣는 2주간 택시비로만 10만원을 썼다.

그렇게 공부해 2011년 9월 토익스피킹 7급(최고 8등급)을 ‘따냈다’. 25만원을 낸 대가였다. 응시료는 7만7천원. 겨우 20분간, 그것도 컴퓨터에 녹음하는데 그렇게 비싸다. 이 점수는 올해 9월에 만료됐다. 다시 이 짓을 반복해야 한다.

오싹한 ‘포기각서’

노민호 정적이 감도는 도서관 전산실. 발걸음 소리가 다른 사람들의 신경에 거슬릴까봐 살금살금 걸었다. 빈자리에 앉았다. 주변을 둘러봤다. 전산실을 채운 20명의 사람들. 절반은 토익 인터넷 강좌에, 나머지 절반은 공무원 시험 강좌에 열중한다.

토익 강좌 때문에 고민하던 내게 ‘구세주’가 나타났다. ‘100% 환급 제도’를 시행하는 EBS 인터넷 토익 강좌를 찾았다. 제때 강의를 듣고 주어진 과제를 제출하면 20만5500원의 수강료 중 절반(10만2750원)을 돌려받을 수 있다. 거기에 ‘특별미션’까지 수행하면 나머지 절반도 환급해준다.

토익 듣기(LC) 교재를 펼쳐 강의를 재생했다. 미국식·영국식·오스트레일리아식 영어 발음을 구별 못하는 내 귀가 원망스럽다. ‘그래도 착실히 매일 영어 말하기를 들으면 귀가 트이겠지.’ 강의도 과제도 꼬박꼬박 해냈다. ‘이대로라면 영어 실력도 늘고 돈도 다시 받을 수 있겠지.’ 희망에 부푼다.

이상하다. 인터넷 강의를 들은 지 열흘이 지났는데, 왜 누리집에 특별미션이 없는 거지? 여기저기 클릭하다 인터넷 카페로 들어갔다. 공지사항에 특별미션이 올라와 있다. ‘매일 학습일기 작성, 스마트폰 미션 수행.’ 스마트폰 미션이란 이렇다. 카카오톡에서 친구 11명 이상을 초대해 묻는다. ‘토익 인터넷 강좌 듣는데 내가 어떤 걸 포기해야 하는지 알려줘.’ ‘포기해야 할 것’의 예시는 잠, 게임, 술, 쇼핑이다. ‘나의 목표점수 다짐하기’란 미션도 있다. 열흘이나 늦었으니 내 특별미션은 이미 실패다.

다른 수강생의 학습일기를 훑어본다. 매일 학습한 핵심 내용이 적혀 있다. “아자아자!” “열심히 해서 만점 받자!” 등의 응원 구호가 보인다. 인증샷도 올라와 있다. 수강료를 돌려받으려고 카카오톡 대화를 인터넷 카페에 공개한 것이다. “나 목표점수는 850점이야. 응원해줘.” 수강생이 문자를 보내자 친구들의 반응이 다양하다. “힘내라” “아직도 토익 공부하냐”. ‘포기각서’ 게시판에는 설문조사 인증샷이 수두룩하다. 신체포기 각서가 떠올라 좀 무섭다. 10만2750원을 받으려면 감내해야 한다.

닥치고 ‘기술’

이나연 교환학생이 되려고 나는 토플(TOEFL) 시험을 봤다. 시험 응시료는 1회에 18만원. 원하는 점수를 얻으려면 두세 번의 시험은 기본이다. 영문학 전공이지만 시험은 어려웠다. 토플학원의 대명사인 강남 해커스학원에 등록했다. 주말 오전반의 월 수강료가 22만원. 거기다 권당 2만원은 족히 넘는 책도 다섯 권이나 사야 했다. 그렇게 토플 점수를 ‘만드는 데’ 나는 120만원을 썼다.

학원 수업은 읽기·듣기·쓰기·말하기의 네 가지로 진행된다. 하루 4시간 강의를 듣는데 영어 해석은 아무도 해주지 않는다. 문제 유형만 내내 반복한다. 이 단락엔 이 단어가 핵심, 그다음 단락엔 이 단어가 핵심, 두 개를 합쳐 주제를 찾아내면 된다는 식이다. ‘기술’만 가르쳐주는 게 찜찜했다. 하지만 덕분에 나는 독해 부문에서 만점 가까이를 받았다. 말하기와 글쓰기 수업은 더 단순했다. 샘플을 달달 외우는 거다. 첨삭이라는 게 필요 없다. ‘닥치고 암기’가 특효약이다.

금융권에 지원하려면 자격증이 하나 더 필요하다. 재무분석사(CFA)·공인회계사(CPA) 같은 ‘고난도’ 자격증은 아니더라도 경제지가 주관하는 시험은 봐야 한다. 서류전형 때 기업이 그 점수를 반영한다. 경영학을 복수전공하니까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책을 사러 서점에 갔다. 기본서가 3만원, 핵심요약책 2만원, 예상문제 3만원, 기출문제 2만2천원…. 모두 그 언론사에서 나온 것이다. 기출문제집을 한 권 집었다. 최근 시험 4회분이 묶여 있었다. 응시료 3만원을 내고 첫 시험을 봤다. 우수 등급을 받았지만 최우수 등급으로 올리고 싶었다. 고득점자 인터뷰를 인터넷에서 찾았다. 동영상으로 공부해야 한단다. 인터넷 강의는 20만원이다.

유행 따라 자격증

칸이 있으면 채워야 하니까

이은미 2011년 8월 여름방학 두 달을 바쳐 컴퓨터 자격증을 땄다. 컴퓨터활용 자격증인 모스마스터(MOS Master).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입사지원서에 보유한 자격증을 써넣는 칸이 있을 뿐이다. 칸이 있으면 취업준비생은 채워넣어야 한다. ‘어떤 자격증이 가장 효율적일까?’ 인터넷 취업 카페에 올라오는 합격자 스펙을 봤다. 컴퓨터 자격증 하나씩은 다 있다. 그중에서도 국제자격증인 MOS가 가장 많았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주관한다.

나는 합격자들과 비슷한 ‘급’이 되기 위해 MOS 자격증에 도전했다. 워드·파워포인트·엑셀·엑세스 등 네 번의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응시료도 4배다. 7만9천원씩 도합 31만6천원을 냈다. 컴퓨터학원 수강료와 교재비를 합하면 45만원이 넘었다. 2년이 지난 지금 그 자격증은 쓸모없다. 유행이 지나서다. ‘돈만 들이면 누구나 따는 자격증’이란다. 어떤 기업은 입사지원서 자격증란에 MOS가 검색조차 안 된다. 요즘 대세는 컴퓨터활용능력 1급이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다시 따야 한다. 유행이 또 지나가기 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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