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보다 소설 같은 현실. 지난해 크리스마스 이브, 이영도씨와 김순진씨는 울산 현대중공업 소각장 담장을 넘어 100m 굴뚝에 올랐다. 그리고 꼬박 한 달 동안 농성을 벌였다. 이들이 일용한 식량은 초콜릿 한쪽과 육포 손가락 반만큼. 하루에 두 번씩 이만큼 먹으며 한겨울 칼바람을 맞았다. 당시 48살 이씨와 37살 김씨는 한 달에 한 번만 ‘큰 일’을 보았다. 아니 빼냈다. 그것은 차라리 돌덩어리였다. 이씨는 “(변이) 돌처럼 굳어서 베어링 돌듯이 돌았다”며 “한 번에 빠지지 않아 2시간 동안 손톱으로 찍어서 빼냈다”고 돌이켰다. 100m 상공에서 뿌린 소변은 코앞의 바다에서 부는 강풍에 실려 금가루처럼 날아갔다.
‘절대로 뛰어내리지 않는다.’ 당시 이영도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 수석부위원장은 김순진 현대미포조선 현장조직 ‘현장의 소리’ 의장과 굴뚝에 오르기 전에 다짐을 받고서 동행에 나섰다. 김순진씨는 이홍우 조합원의 투신에 대한 책임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미포조선 정규직 노동자 이홍우씨는 미포조선 사내하청 용인기업 해고 노동자들의 정규직 복직을 요구하며 투신했다. 대법원은 용인기업 노동자들의 미포조선 종업원 지위를 인정하지 않은 고등법원 판결을 파기환송했지만 회사는 이들의 정규직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고, 정규직 이씨가 이에 몸으로 항의한 것이다. 같은 현장조직에 있던 “홍우 형”의 결단에 책임을 느낀 김씨는 죽음을 각오한 투쟁을 결심했다. 이렇게 살기 위해서, 살리기 위해서 이들은 하늘로 올랐다.
일찍이 이곳에선 골리앗의 전사들이 태어났다. 1987~88년 노동자 대투쟁의 열기가 몰아친 미포만, “무쇠 바람 부는 울산의 하늘 아래서 육천의 전사들이 태어났다”.(노동가요 ) 그렇게 골리앗 투쟁은 시작됐다. 1990년 4월26일 78명의 현대중공업 노동자는 82m 골리앗 크레인에 올라 노조 탄압 중지를 외쳤다. 10여 일 만에 지상으로 내려왔지만, 이들의 투쟁은 “죽을 수는 있어도 물러서지 않는다”는 절규로 기억된다. “아~ 골리앗이여 노동자의 깃발이여~”로 끝나는 노래처럼 골리앗 투쟁은 남한 노동운동의 깃발이자 고공농성의 역사였다. 그러나 “흩어질 줄 모르고 그들은 지칠 줄 모르며”로 이어지는 ‘철의 기지’는 세기를 넘기며 녹슬었다. 현대중공업 노조는 민주노총을 탈퇴했고, 지금은 이곳에 ‘화합의 골리앗’ 현판이 붙어 있다고 한다.
농성의 역사는 운동의 역사였다. 한국 노동운동, 민주화, 반미투쟁은 농성장의 외침을 통해 세상에 존재를 알렸다. 1979년 ‘공순이’로 불리던 YH노조 여성 노동자들이 신민당사를 점거하고 진압하는 경찰에 알몸으로 저항했다. 1980년 4월 강원도 사북의 광부들은 탄광을 점거하고 인간답게 살 권리를 요구했다. 1982년 3월18일 부산 미문화원에서 타오른 불길은 반미의 무풍지대 한반도 남쪽에서 반미투쟁의 시작을 알리는 봉화였다. 1987년 명동성당 농성은 직선제 개헌을 앞당기는 횃불이 되었다. 1993년 발표된 박노해 시인의 시 ‘이 땅에 살기 위하여’는 여전히 현재형의 울림을 남긴다. “우리가 태어나고 자라온 이 땅/ 우리의 노동으로 일떠세운 이 땅에/ 사람으로 살기 위하여 사랑으로 살기 위하여/ 저 지하 땅끝에서 하늘 꼭대기까지/ 우리는 쫓기고 쓰러지고 통곡하면서/ 온몸으로 투쟁한다 피눈물로 투쟁한다/ 이 땅의 주인으로 살기 위하여.”
태초의 하늘에 여성이 있었다. 강주룡씨는 1931년 5월28일 평양 을밀대에 올랐다. 서른 살의 평원고무공장 여공은 을밀대 지붕에 올라 이렇게 외쳤다. “우리는 49명 우리 파업단의 임금 감하를 크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평양의 2300명 고무공장 직공의 임금 감하의 원인이 될 것이므로 우리는 죽기로써 반대하려는 것입니다.”( 1931년 7월호). 이렇게 ‘’나’를 넘어 ‘우리’를 위해 이들은 하늘로 올랐다. “누구든지 이 지붕 위에 사다리를 대놓기만 하면 나는 곧 떨어져 죽을 뿐입니다.” 이렇게 목숨을 걸고 고공에 오른 저항은 종전대로 임금을 지급한다는 성과를 끌어냈다.
높이 올라도 오래 굶어도 사회는 ‘불감증’그래도 20세기의 농성은 세상을 울렸지만, 21세기 한국은 농성 불감증에 걸렸다. 아무리 높이 올라도, 오래 굶어도 세상의 시선은 차가웠다. 노동자의 농성은 노조 이기주의, 빈민의 저항은 도심 테러 집단으로 매도됐다. 마침내 2003년 10월23일 김주익의 비극이 터졌다. 35m 크레인에 올라갔던 김주익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이 농성 130일 만에 목을 매서 목숨을 끊었다.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의 추도사는 지금도 절절하다. “이제 정말 소름이 끼칩니다. 1970년에 죽은 전태일의 유서와 세기를 건너뛴 2003년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당시는 현대중공업 골리앗 크레인으로 달려갔던 노무현 변호사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때였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지율 스님의 100일 단식 뒤로 20일 굶어서는 언론에 나지도 않고, 웬만큼 높은 곳에 올라가서는 눈길을 끌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강주룡이 올랐던 을밀대는 5m에 불과했고 올해 현대미포조선 노동자가 오른 굴뚝은 100m에 이르지만, 세상의 관심도는 더욱 낮아졌단 것이다.
70일 만에 성과 없이 철탑을 내려올 때세월이 흐르며 농성의 주체와 방식도 변했다. 이제는 ‘노동자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농성의 중심이 되었다. 이들의 이름은 비정규·이주·여성·해고 노동자. 대형마트를 점거했던 이랜드 ‘아줌마’들의 500일 파업, 기륭전자 비정규 노동자의 94일 단식은 농성으로 호소할 수밖에 없는 이들의 변화를 상징한다. 이주노동자도 ‘미등록 이주노동자 전면 합법화’를 요구하며 2003년 말부터 300일이 넘는 천막농성을 벌였다. 2000년대 중반부터 장애인도 지하철 선로 등을 점거하고 이동권과 교육권을 요구하는 농성을 벌였다. 여기에 화물연대처럼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농성도 가세했다. 하늘로 오르던 농성은 땅바닥으로 몸을 낮추기도 했다. 2003년 새만금 삼보일배, 2009년 생명평화결사 오체투지는 스스로를 던지는 농성 방식의 변화와 경제에서 환경으로 확장된 의제의 변화를 동시에 상징한다.
로케트전기 해고 노동자 유제휘·이주석씨는 지난 3월부터 광주시 옛 도청 앞 30m 철탑에 올라가 원직 복직을 촉구하는 고공농성을 벌였다. 유씨는 “새도 아닌데 새들이나 둥지를 틀 만한 철탑에 올랐다”고 말했다. 철탑이 좁아서 무릎을 잡고 난간에 기대서 잤다. 점점 무릎과 허리에 마비가 왔다. 나중엔 다리를 철탑 아래로 내리고 머리를 ㄱ자로 누웠다. 유씨는 “철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매달려 있었단 표현이 맞다”고 말했다. 더구나 4월30일 안면이 있던 화물연대 박종태 광주지부장이 자살했단 소식을 들었다. 그렇게 70일을 버텼지만, 회사의 복직 약속도 없이 철탑을 내려와야 했다. 유씨는 “아래에서 도와준 사람들이 힘들어할까봐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참았다”고 말했다. 내려왔을 당시에 이들은 걷지도 못했다. 10월엔 또다시 단식농성을 벌였지만 허사였다. 해고자 9명은 11월13일로 농성 804일을 맞았다. 기타를 만들던 콜트·콜텍 노동자들도 10월28일 문화연대 등과 함께 ‘기쁘지 않은’ 복직 투쟁 1천 일 콘서트를 열었다. 여기에 KTX 여성 노동자, 용산 참사 철거민, 쌍용차 노동자…. 여전히 한반도는 농성 중이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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