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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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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독재를 삼킨 거대한 우물

다시 올라본 안기부 남산…
서울시의 ‘남산 르네상스 마스터플랜’ 따라 옛 안기부 건물 모두 허물게 돼
등록 2009-08-20 19:13 수정 2020-05-03 04:25

남산 안기부 터를 처음 찾은 날, 하늘은 거칠게 으르렁거렸다. 번개가 희번덕거리기 무섭게 천둥이 귀를 찢었다. 뇌우는 머리 위로 바로 내리꽂히고 있었다. 언제 덮칠지 몰랐다. 어느 순간 내가 갈가리 찢길 수도 있다는 현실적인 공포감은 인간을 극단적인 무력감으로 내몬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30년 전 수많은 이들이 그 공포감을 현실로 느끼며 이 공간으로 내몰렸을 것이다. 전직 국가정보원 고위 당국자와 전직 직원, 그리고 안기부 고문 피해자의 증언과 함께 남산 일대를 둘러보았다(증언하고 동행했던 이들의 신분은 밝히지 않기로 한다).

남산 안기부 본관이었던 서울유스호스텔 옆 터널 안쪽에서 바라본 안기부 ‘제5별관’. 이곳에서 35년 동안 수많은 이들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만으로 모진 고문을 당했다.

남산 안기부 본관이었던 서울유스호스텔 옆 터널 안쪽에서 바라본 안기부 ‘제5별관’. 이곳에서 35년 동안 수많은 이들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만으로 모진 고문을 당했다.

6국, 민주화운동 대학생의 두려움 그 자체

서울 남산 소파길의 동쪽 끝. 대한적십자사 건물을 등지고 남산을 바라본다. 너른 주차장 앞에 서울특별시 균형발전본부(면적 2449㎡)라고 적힌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균형발전본부 건물에는 청계천복원추진본부도 함께 있다. 조화와 균형, 환경과 녹색을 이야기하는 지금의 명칭에서 두려움을 느낄 이들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30여 년 전, 그곳은 민주화운동을 하던 대학생들에겐 두려움 그 자체였다. 이곳의 명칭은 ‘6국’. 학원 사찰과 수사를 담당했다. 2~3층에서 통상적인 조사를 받은 학생들은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지하 1층과 2층에 끌려 들어가 고문을 당했다. 1975년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도예종씨 등 8명이 이 건물 지하 보일러실에서 자행된 고문 끝에 조작된 혐의로 사형선고 18시간 만에 형 집행을 당한다.

대한적십자사도 한때 안기부의 공간이었다. 행정 업무 공간으로 주로 쓰였지만, 건너편 ㅅ호텔에 투숙한 사찰 대상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였다. 길을 건너 TBS교통방송(면적 1962.2㎡)과 서울시 소방방재본부를 지난다. 이 두 건물 역시 안기부 청사였다. 수사 기능과 행정 기능을 맡았단다. 소방방재본부 건물에는 유치장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서울시 균형발전본부로 바뀐 안기부 ‘6국’. 이곳은 대학가의 동향을 관찰하는 학원 사찰의 거점이었다.

지금은 서울시 균형발전본부로 바뀐 안기부 ‘6국’. 이곳은 대학가의 동향을 관찰하는 학원 사찰의 거점이었다.

이제 예장동 안쪽으로 올라가는 산길이 나온다. 서울유스호스텔 방문을 환영한다는 수소 뿔 모양의 입간판을 지나는 길에 ‘준공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1996년 10월부터 두 달간 계속된 ‘남산 청사 이적지’ 공원 조성 공사의 준공을 알리는 기념비다. 왜 굳이 이전한 기관의 이름을 빼야 했을까. 아니 ‘남산’이라고 하면 중앙정보부와 안기부를 충분히 연상할 수 있다는 뜻이었을까. 독재의 시간을 모르는 후손은 그냥 잊으라는 뜻이었을까.

서울유스호스텔을 향하는 길이 몸을 틀기 전, 하늘을 찌를 듯 치솟은 은행나무 뒤로 벤치 몇 개 달랑 놓인 잔디밭이 보인다. 2007년까지 그곳은 시멘트로 바닥을 바른 농구장이었다. 99년 전 통감 데라우치와 총리대신 이완용이 몰래 숨어 한일합방조약을 맺은 곳이라는 것을 기억할 장치는 어디에도 없다. 기관의 이름을 뺀 준공 기념비와 표지석조차 없는 잔디밭은 ‘망각’을 유도하는 장치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동산 허리를 돌아서면 눈앞에 서울유스호스텔이 들어온다. 길게 치솟은 통신용 철탑과 권위적으로 사각진 형태가 예사 건물이 아니란 느낌을 주지만, 누구도 그 과거를 알려주지 않는다. 1층 로비에 들어서면 ‘마음 공부 잘하여서 새 세상의 주인 되자’는 액자가 뒤통수를 친다. 독재의 시절, 취조와 고문의 목적은 대상의 마음을 읽어내는 일이었다. 새 마음으로 돌리는 일이었다. 건물의 옛 용도를 아는 이는 왠지 마음이 편치 않다.

남산 안기부 터로 올라가는 고갯길에 놓인 준공 표지판. ‘남산 청사 이적지’라고만 돼 있을 뿐, 어떤 청사가 있었는지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남산 안기부 터로 올라가는 고갯길에 놓인 준공 표지판. ‘남산 청사 이적지’라고만 돼 있을 뿐, 어떤 청사가 있었는지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유스호스텔 지하의 굳게 잠긴 문

서울시 중구 예장동 4-5번지. 이 건물이 여기에 들어선 것은 지난 1972년의 일이었다. 중앙정보부(안기부) 남산 본관. 여기는 1층부터 6층까지 대부분 행정 기능을 하는 사무실로 쓰였다. 탐지와 분류, 분석이 업무의 주요한 부분인 정보의 특성상 행정 사무실은 곳곳에 필요했다고 한다. 6층에는 정보부장실(안기부장실)이 있었다.

지난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여기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의 진실을 밝혀냈다. 지난 1973년 본관 앞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최종길 교수는 추락사한 것이 아니라, 고문 사실을 은폐하려던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옥상으로 가는 외부 계단에서 최 교수를 내던졌다는 증언을 받아낸 것이다.

본관 내부는 유스호스텔로 리모델링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형태를 다 잃어버렸다. 그래도 사라지지 않는 공간은 있는 법. 유스호스텔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은 그대로 보존됐다. 두 단계의 계단을 내려가면 굳게 잠긴 문이 나온다. 이 문 뒤에는 지하 통로가 있다. 지하 통로는 유스호스텔 앞의 서울종합방재센터로 이어진다. 길쭉한 원통형 철탑을 모자처럼 쓴 방재센터 건물은 1층짜리 구조물로 보인다. 안으로 들어서면 지하 3층까지 이어진다. 그 옛날 안기부로 끌려온 이들은 본관 지하 통로를 통해 방재센터 건물 지하로 끌려갔다. 건물의 당시 명칭은 ‘제6별관’. 민주화운동을 하던 이들이 ‘안기부 지하 벙커’라고 부르며 치를 떨었던 곳이다. 그만큼 수많은 조작과 고문이 이뤄진 현장이다. 당시 ‘제6별관’에는 아예 지상 구조물이 없었다. 건물의 존재 자체를 알 수 없도록. 지하 통로를 따라 지하 1층으로 끌려간 이들은 다시 지하 2층으로 옮겨졌다. 지하 2층에는 복도 양쪽으로 화장실이 딸린 4~5평 크기의 취조실들이 10여 개 늘어서 있었다고 한다. 중앙에는 대형 취조실이 있었고, 취조실을 밖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특수한 창문들이 곳곳에 설치돼 있었다. 지하 3층 한쪽에는 유치장도 있었다.

지난 1995년 안기부가 내곡동으로 이전한 직후에 촬영된 남산 일대 사진. 지금은 사라진 제1별관 모습이 보인다. 사진 한겨레 김종수 기자

지난 1995년 안기부가 내곡동으로 이전한 직후에 촬영된 남산 일대 사진. 지금은 사라진 제1별관 모습이 보인다. 사진 한겨레 김종수 기자

중앙정보부-안기부의 주요 인권침해·정치개입

중앙정보부-안기부의 주요 인권침해·정치개입

제6별관보다 악명 높은 곳이 ‘제5별관’이었다. 방재센터 옆길을 따라가면 갑자기 터널이 나타난다. 100m 남짓한 터널의 끝으로 4층짜리 건물이 보인다. 지금은 서울시 남산 별관으로 쓰이고 있는 곳이다. 이 제5별관은 정보부 직원들도 수사용이었다고 인정하는 곳이다. 깜깜한 밤, 정보부 직원들에게 연행된 이들은 눈을 가린 채로 끌려오기 마련이었다. 이들이 처음 눈을 뜨는 곳은 남산 3호 터널 앞 대형 철제문. 육중한 철제문이 끔찍스런 소리를 내며 열리면 차는 곧바로 깜깜한 터널을 향한다. 깊은 밤, 위치를 알 수 없는 이들은 거대한 지하 공간으로 끌려가는 듯한 두려움을 느껴야 했다. 제5별관 앞 터널의 용도였다.

쿠데타 이틀 만에 중앙정보부 설치 착수

남산 안기부가 가장 세력을 넓혔을 때에는 2만4800여 평의 부지에 총 41개동이나 되는 건물들이 있었다고 한다. KCIA라고 불렸던 중앙정보부를 만든 인물은 김종필 전 자유민주연합 총재였다. 박정희 소장과 함께 5·16 쿠데타를 일으킨 그는 쿠데타 이틀 만인 1961년 5월18일 육사 동기생(8기)인 육본전략정보과의 이영근·서정근 중령을 불렀다. “우리에게도 정보부가 필요하다, 이를 만들기 위한 법을 만들어달라.” 이 중령과 서 중령은 이화여고 앞 정동호텔에서 숙식을 같이하며 미국의 중앙정보국(CIA)과 연방수사국(FBI), 일본의 내각조사실 같은 기관을 연구하며 한국형 정보부의 뼈대를 만들었다. 법은 6월20일 공표된다. 이 법을 토대로 만들어진 중앙정보부 초기 요원 수는 500명 정도였다. 독재를 연장하려면 감시와 처벌이 필요했다. 항거가 불가능할 만큼 겁줄 수 있는. 정보부는 날로 커져갔다. 요원이 가장 급격히 늘었던 때는 민청학련과 인혁당 재건위 사건 직후였다. 공안수사의 법적 완결성을 좀더 높여야 할 필요성을 느낀 정보부는 법대 졸업생을 중심으로 300여 명을 한꺼번에 늘린 적도 있었다. 이렇게 늘어난 조직은 더 많은 건물과 사무실을 삼켰다. 박정희 정권 말기에는 3천여 명 정도로 불어났다. 안기부 요원은 전두환 정권과 김영삼 정권까지 이르면서 갑절로 규모가 늘어난다. 안기부는 남산의 공개성과 협소함 때문에 1995년 내곡동으로 청사를 옮긴다. 안기부 건물들의 소유권은 이때 모두 서울시로 넘어갔다.

옛 안기부 본관이었던 서울유스호스텔 로비 입구에 걸린 액자. 이 건물의 과거와 엇물려 생각하면 묘한 모순감이 든다.

옛 안기부 본관이었던 서울유스호스텔 로비 입구에 걸린 액자. 이 건물의 과거와 엇물려 생각하면 묘한 모순감이 든다.

옛 중앙정보부장의 관저를 서울시가 매입해 개조한 ‘문학의 집, 서울’

옛 중앙정보부장의 관저를 서울시가 매입해 개조한 ‘문학의 집, 서울’

서울시는 안기부 이전 당시 남아 있던 건물 27동 중 23동을 해체했다. 대표적인 것이 1996년 8월 제1별관 폭파 해체였다. 본관 바로 옆에 붙어 두 번째 규모를 자랑했던 제1별관은 지금 시멘트 바닥만 텅 빈 공터로 남아 있다. 1961년 만들어진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는 2011년 50주년을 맞는다.

서울시는 올해 3월 ‘남산 르네상스 마스터플랜’을 내놨다. 서울시 균형발전본부 청사를 허무는 것을 시작으로, 2015년까지 서울시 남산 별관과 교통방송 건물 등을 모두 허문다는 계획이다. 유스호스텔로 쓰이는 본관 건물도 임대 기간이 지나면 철거해 녹지로 바꾸기로 했다.

2003년에도 인권기념공원 거부돼

지난 2003년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와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등 18개 인권단체는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에게 안기부 본관을 유스호스텔이 아닌 인권기념공원으로 만들자고 요청했다. 이명박 당시 시장은 이를 거부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이제 아예 그 공간 전체를 없애버리려고 한다. 시간이 많지 않다. 중앙정보부와 안기부의 정치공작과 인권침해를 오랜 세월 연구해온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현장인 아우슈비츠를 보존한 독일을 비롯해 베트남과 캄보디아 등 불행한 역사를 기념관으로 만든 사례는 해외에도 많다”며 “남산의 옛 안기부 청사를 평화와 인권의 기념관으로 만들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말했다.

글 이태희 기자 hermes@hani.co.kr·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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