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한순간이 그대로 역사가 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삶은 한 자락을 뚝 떼서 글로 옮기면 기사가 되고, 소설이 된다. ‘통일의 꽃’이라 불리던 임수경(41)씨. 1989년 6월 방북은 그 자체가 역사였다. 그해 8월15일, 남북 군사분계선을 넘는 순간은 질긴 분단 역사의 파단이었다. 그 뒤 20년, 그의 삶은 그대로 소설이었다. 질긴 역사의 끈은 그의 발목을 졸라매고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남산으로 동행해주셨으면 한다”는 제안에 거듭 고개를 저었던 이유다.
“제가 강남으로 갈 때는 아직도 남산 1호 터널을 안 넘어가요. 거기 근처만 가도 떨리고 속이 울렁거리고 토할 때도 있었으니까요.” 시대가 남긴 트라우마(심리적 상처)다.
2009년 9월8일 은 어렵사리 임수경씨와 서울 남산 옛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터를 찾았다. 그가 남산을 찾기로 결심한 것은 그날의 의미 때문이었다.
“정확히 20년 전이네요. 20년 전 오늘 여길 나와서 서울구치소로 갔죠. 다시는 오고 싶지 않은 곳이었는데, 그래도 남길 것은 남겨야죠.”
100촉 전구 빛나던 지하 조사실은 문서고로1989년 8월15일 문규현 신부와 군사분계선을 넘어 내려온 임수경씨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커다란 헬기였다. 그를 태운 헬기는 단숨에 남산 국립극장 앞마당에 도착했다. 검은색 세단을 탄 안기부 요원들은 좌석 가운데 앉은 임씨에게 “고개 숙여!”라고 짧고 강하게 명령했다. 악명 높은 터널을 지나 도착한 곳은 대공수사실(안기부 6별관). 지금은 서울시청 별관으로 쓰인다. 시청 별관 앞에 선 임씨는 뒤쪽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조사받는 이들이 출입하는 곳은 뒤쪽에 가파른 계단이 있었어요, 아주 가파른. 그 계단을 따라 지하 2층으로 가면 조사실이 나왔어요.”
과연 그의 말대로 건물 뒤쪽 가운데에는 가파른 계단이 있었다. 계단은 중간에 네 개의 중턱을 둘 만큼 길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지금은 서울시청 공무원과 시민들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공간이지만, 그는 자꾸만 밀어내는 척력을 느끼는 듯했다. 지하 2층은 서울시의 자료를 보존하는 문서고로 쓰이고 있었다. 임씨는 발소리까지 죽여가며 걸어 들어갔다. 이미 이름도 사라진 안기부였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실체로 살아남아 있었다.
“여기에서 맨 왼쪽 끝 방으로 끌려갔어요. 방음 보드로 이뤄진 벽과 천장으로 온통 하얀 방이었어요. 100촉짜리 전구 두 개가 한꺼번에 켜져 있어 ‘하얀 지옥’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침대랑 욕조도 있었는데, 그게 다 고문용이었죠.”
입고 있던 옷을 벗고 때에 찌든 파란색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었다. ‘통일의 꽃’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사범’으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그가 20일을 갇혀 있던 방에는 ‘110’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절 조사하던 조사관이 그랬어요. 그 방에 저 같은 ‘피라미’가 들어온 건 처음이었다고. 이랬죠. ‘너 오기 바로 전에는 서경원이가 그 자리에 있었고, 문(익환) 목사가 있었어. (대한항공 폭파범) 김현희도 이 방 출신이고, (이중간첩 혐의로 사형당한) 이수근이도 이 방에 있다 나갔어.”
직접적인 구타나 고문은 없었다. “조사관들이 그랬어요. 검사들이 ‘임수경은 절대 때리지 말라’고 했다고. 대신 욕을 했죠. 답변이 마음에 안 들면 앉아 있던 의자 다리를 걷어찼어요. 그때마다 바닥으로 나동그라지는 거죠.”
임수경씨가 여자라서 때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방북을 도운 혐의로 먼저 붙잡혀 지하 2층에서 조사받은 한양대 여학생 3명은 쏟아지는 매를 피할 수 없었다. 고문은 없었지만, 구타는 엄연한 조사 수단이었다. 그 여학생들은 국방색 군복을 입은 채로 조사를 받았다. 땀과 피, 눈물에 찌든 군복은 입는 자체가 고문이었다.
전세계의 눈이 쏠린 탓에 그에게는 쉽게 손을 댈 수 없었다. “조사관들이 그랬어요. 저는 특별 대접해서 ‘추리닝’ 입히는 거라고. 머리가 아플 만큼 때 타고 냄새나는 옷을 입혀놓고.”
조사관들은 13명이었다. 이들은 네 팀으로 조를 짜서 24시간 그를 취조했다.
조사관들 문 열 때마다 들려온 비명소리
“조사관들이 문을 열고 들어올 때마다 옆방에서 터지는 비명소리가 새어 들어왔어요. 근데 그게 더 소름 끼치잖아요. 알고 보니 영식이 형(오영식 전 통합민주당 의원)이 그때 같이 지하 2층 조사실에 있었어요. 영식이 형은 정말 많이 맞았대요, 죽고 싶을 만큼.”
그는 그 조사실에서 당시 안기부 대공수사국장이던 정형근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을 만났다.
“정형근씨가 들어와서 이랬죠. ‘네가 백만학도 대표냐. 백만학도라는 이 나라 대학생들이 너를 대표로 인정하냐. 내 딸이 대학생인데, 자기는 너보고 대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던데.”
정형근 당시 국장은 임수경씨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거듭 파일과 서류로 책상을 내리치고 고함을 질렀다고 했다. 거친 욕을 할 때도 많았다고 한다.
“정형근씨가 나가고 나면 조사관들이 그랬어요. ‘자꾸 그런 식으로 말하면 평생 여기서 못 나간다. 너 여기서 안 나간다고 대한민국이 어떻게 알겠느냐. 너 하나 죽는다고, 없어진다고 대한민국이 큰일 나는 것 아니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임씨의 입술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110호 조사실이 있던 쪽은 철제문으로 굳게 닫혀 있었다. 자기를 자꾸만 밀어내는 공간을 그는 쉽게 떠나지 못했다. 굳게 잠긴 문 손잡이를 몇 번씩 돌려보는 그였다.
“여기가 얼마나 많은 청춘의 눈물과 피와 한이 맺힌 곳인데.”
계단을 올라 다시 정문 쪽으로 향했다. 정문을 통해 들어가니 테이블과 의자가 놓인 휴게실이 보인다. 휴게실 건너편이 면회실이었다고 한다.
“당시 노태우 정권이 임수경은 인간적으로 조사한다면서 선전하려고 아버지·어머니 면회를 시켜줬어요. 부모님이 면회 온다고 하니까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더라고요. 제 별명이 ‘수도꼭지’거든요, 잘 울어서. 그런데 막상 부모님을 보니까 눈물이 안 나요. 뒤에 기자들이 가득히 서서 사진을 찍어대는데, 울면 안 될 것 같더라고요. 아, 내가 울면 노태우 정권이 내가 후회하고 있다는 식으로 선전하겠구나 싶어서.”
면회를 마치고 돌아온 그에게 조사관들은 “독한 년, 부모를 만나고서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냐”며 욕했다고 한다.
잔인했으나 평범했던 조사관들“그때 광주 출신이라는 한 여성 조사관이 그랬어요. ‘내 고향 광주가 아니라 대한민국이 모두 사라져도 너 같은 빨갱이는 모두 없애야 한다’고. 그 사람도 이화여대 나왔다고 했어요. 근데 그때 날 조사하던 사람들이 모두 그랬어요. 사법고시 1차까지 합격했다가 2차에 결국 안 돼서 안기부 왔다는 아저씨, 경찰대학 출신이라는 아저씨. 그리고 절 조사했던 여성 조사관이 3명이었는데, 그 2명이 이대 출신이라고 했어요. 그냥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이었죠, 공부 열심히 한, 좋은 대학 나온. 그 사람들을 지금 다시 만나서 묻고 싶어요. 우리가 그렇게 잘못했냐고. 그게 그렇게 인간을 말살시킬 범죄였냐고. 그렇게 조사하면서 당신들의 마음은 편했냐고.”
유대인인 해나 아렌트는 저서 에서 ‘악의 평범함’이란 개념으로 유대인 학살에 나섰던 독일인들의 심리 구조를 정의한 바 있다. 카를 아돌프 아이히만은 유대인 이주와 학살을 총지휘한 친위대 장교로, 전후 아르헨티나로 도망갔다가 1960년 이스라엘 정보기관의 추적으로 붙잡혀 이스라엘에서 재판을 받았다. 아렌트는 그의 재판을 방청하면서 아이히만을 피에 굶주린 학살자가 아닌, 권력자의 명령과 실정법에 충실했던 한 소시민으로 결론 내렸다. 문제는 그런 권력과 체제의 요구에 아무런 의문을 갖지 않았던 양심과 사고 능력의 결여였다. 그런 모든 일에 ‘명분’과 ‘면죄부’를 준 전체주의 체제가 문제였다. 전체주의는 그렇게 고문을 당한 이들과 고문을 가한 이들의 영혼을 동시에 파괴한다.
“또다시 20년이 흐른 뒤 찾아와볼 수 있다면”서울시청 별관을 나온 임수경씨는 뒤돌아서 다시 건물을 쳐다보았다. 눈자위가 조금씩 발갛게 물들고 있었다. 그 순간 임수경씨가 안내판 하나를 가리키며 외쳤다. “봐, 누구나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야. 이젠 누구나 들어갈 수 있어.” 그 안내판에는 남산을 이용하는 이들을 위해 별관 화장실을 공개한다고 적혀 있었다.
“그래, 누구나 들어갈 수 있었어. 그런데 왜 그렇게 가슴을 졸여야 한 거지?” 그의 혼잣말이었다. 건물이 남긴 기억은 그렇게 강했다.
“이 건물을 떠나고 20년이 흘렀어요. 그 20년을 저는 통째로 잃어버렸어요.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던데, 정말 뭘 잃어버렸죠? 우리는 20년, 30년씩 잃어버렸잖아요. 그런데 그 기억을 잊지 않게 해줄 건물들도 다 없애버리면 어떻게 해요.”
그는 개인적인 소망도 하나 더했다.
“인생은 20년마다 한 번씩 바뀐다고 하죠? 20살에 이곳에서 제 인생이 한 번 바뀌었으니, 40살에 여기에 온 것으로 다시 한번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20년 뒤에도 꼭 다시 올 수 있도록 이 건물이 잘 지켜졌으면 좋겠어요.”
글 이태희 기자 한겨레 경제부 hermes@hani.co.kr
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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