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늘상 마주하던 ‘한양의 랜드마크’

1부 1회 ‘근대 이전의 남산’…
빼어난 자연경관에 신성함까지 곁들여진 서민 주거 공간이자 양반들의 유람지
등록 2009-09-25 11:21 수정 2020-05-03 04:25

서울 남산의 역사와 경관은 서울 사람들의 삶과 자취를 반영한 거울이다. 조선시대의 영광부터 일제 시기의 굴욕까지 고스란히 겪었던 남산의 존재는 서울 주민들의 생활사를 응축한 단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시대 이래 남산은 수도의 공간적 중심지에 있었기에 정치·사회·경제·문화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남산은 한성부의 도시 공간 구조를 결정하는 데 큰 작용을 했다. 풍수 국면으로 한양의 내사산(內四山) 중에 하나인 남산은 북악산과 상대해 도성 공간의 축을 결정하는 요소였다. 남산의 지형을 따라 건설된 도성은 성 안과 밖을 가르는 주거 공간의 계층적이고 차별적인 분포를 나타나게 했다.

200여년 전 한성의 모습을 담은 <도성대지도>(작자 미상). 아래쪽 뾰족한 곳이 남산이고 위쪽으로 북한산, 인왕산, 북악산 등이 보인다. 사진 한겨레 자료

200여년 전 한성의 모습을 담은 <도성대지도>(작자 미상). 아래쪽 뾰족한 곳이 남산이고 위쪽으로 북한산, 인왕산, 북악산 등이 보인다. 사진 한겨레 자료

고려시대 ‘남경’ 지정 뒤 역사 무대에서 두각

구한말 조선을 찾은 영국의 여행작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1897)에서 “아름다운 남산으로부터 산에 둘러싸인 서울이 가장 잘 보인다”고 했듯이 남산은 한양의 랜드마크이자 왕궁의 방어적 요충지였고, 이러한 지리적 위치로 말미암아 남산은 조선 왕실에 의해 국토와 왕경을 수호하는 진산(鎭山)으로서 작위를 가지고 제사를 받는 위엄스럽고도 성스러운 신산(神山)으로 대접받기도 했다.

자연미학이나 인문학적으로도 남산의 의미는 각별했다. 유토피아의 대명사라고 할 만한 청학동 골짜기가 있을 정도로 남산의 산수 경관은 아름다워서 조선시대의 문인 선비와 관료들이 풍류를 즐기고 도덕과 심성을 닦는 장소이기도 했던 것이다.

높이가 해발 262m에 불과한 나지막한 야산에 지나지 않던 남산이 역사의 무대에서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고려 문종 21년(1067)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이 3경의 하나인 남경(南京)으로 승격하고 유수관을 두어 지방제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면서부터다. 당시 남경의 범위는 동으로 대봉(大峰·낙산), 서로 기봉(岐峰·안산), 북으로 면악(面嶽·북악산), 남으로 사리(沙里·용산 남단)에 이르렀으니, 이러한 공간 범위의 설정은 남산을 고려한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역사에서 남산의 지리적 중요성이 명실상부하게 갖춰지고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시기는 조선시대에 이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던 때부터다. 이씨 왕조가 주산을 백악산(현 북악)으로 삼고, 좌청룡 인왕산과 우백호 낙산 그리고 안산(案山)으로 남산을 삼아서 도성의 풍수적 국면을 형성하면서, 남산은 조선시대 한양의 랜드마크로 우뚝 섰던 것이다. 이름도 한양 도성의 남쪽에 자리잡은 산이라고 하여 남산이 되었으니, 목멱산(木覓山)·종남산(終南山)·인경산(仁慶山 또는 引慶山)·열경산(列慶山)·마뫼 등 다른 고유지명이 있지만, 위치를 가리키던 남산이라는 이름이 대표지명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남산은 한성에서 군사적 방어의 요충지이자 지정학적으로도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태조는 남산을 외적을 방어하는 방패로 삼기 위해 1396년에 도성을 쌓고 보수했다. 태종 6년에는 봉수대를 설치해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기도 했다. 남산의 제1봉수는 양주 아차산과 대응해 경기도·강원도·함경도와 연결되었으며, 제2봉수는 광주 천천령에 대응해 경기도·충청도·경상도와 연결되었고, 제3봉수는 무악 동쪽 봉우리에 대응해 경기도·황해도·평안도와 연결되었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는 남산 기슭에 병영으로서 어영청의 분영인 남소영과 금위영의 분영이 자리잡기도 했다.

이러한 지리적인 위치에 기인한 지정학적 가치 평가는 남산을 상징적 작위를 받는 신성한 산으로 탈바꿈시켰다. 태조 4년(1395) 12월에 북악산을 백악산신의 진국백으로, 남산을 목멱대왕으로 봉작해 국가에서 제사를 받들게 했던 것이다. 남산의 정상에는 조선 중기까지 봄과 가을에 초제를 지내던 목멱신사(木覓神祠)가 있었는데, 에는 “목멱신사가 도성의 남산 꼭대기에 있고 소사(小祀)로 제사 지낸다”고 했다. 남산 꼭대기에 자리한 목멱신사는 나라에서 제사 지내는 사당이라 하여 일명 ‘국사당’(國祀堂 또는 國師堂)이라고도 했다. 이 국사당 건물은 일제의 조선신궁 건립으로 헐리게 되어 현재는 인왕산으로 옮겨졌다.

남산의 자연 지형을 따라 수축된 도성은 한성의 성 안과 밖을 구획하는 공간 구조를 결정했으며 구획했다. 조선 태조는 1396년 4월에 한성부의 행정구역을 설정하고 같은 해 9월 도성과 문루를 완성하면서 행정구역을 도성(都城)과 성저(城底)로 구성했는데, 남산을 중심으로 서쪽의 인왕산과 동쪽의 낙산에 이르는 연결로는 성 안과 밖을 가르는 자연적인 기준이 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 혼성여단이 주둔한 만리동 고개에서 바라본 남산과 경성 남쪽의 풍경. 남산 일대 풍경을 담은 가장 오래된 사진 가운데 하나다. 사진 한겨레 자료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 혼성여단이 주둔한 만리동 고개에서 바라본 남산과 경성 남쪽의 풍경. 남산 일대 풍경을 담은 가장 오래된 사진 가운데 하나다. 사진 한겨레 자료

한성의 성 안팎 경제 겸 방어의 요새지 역할

조선시대 한양의 도시 공간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현 세종로의 관아 공간과 종로의 상업 공간, 그리고 주거 공간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중 주거 공간의 분포를 보면 종로 북쪽은 양반 관리의 주거지인 북촌(계동·가회동·원서동·안국동 등)이 있었으며, 중간의 청계천에는 중인 계층과 상인들이 누하동·적선동·사직동 방면에 살았다. 남쪽에는 하급관리와 세력이 없는 선비들이 남촌(회현동·필동 등)에 살았다. ‘남산골 딸깍발이’ 혹은 ‘남산골 샌님’이라는 말도 남산골에 살았던 선비들이 대체로 벼슬 자리가 없고 가난해 나막신을 신고 다녔지만 정신적으로는 고고한 기상을 지녔다고 하여 붙여진 별칭이다.

조선시대에 제도적으로 시행되었던 남산의 자연과 생태 보호의 배경에도 풍수가 뒷받침되고 있었다. 남산의 탁월한 식생인 소나무는 남산의 지덕을 보존하고 배양하는 중요한 식물로 여겨졌고, 소나무의 생육은 조정에서 적극적으로 관리되었던 것이다. 국초부터 남산은 소나무를 베지 못하는 금송(禁松) 지구로 지정·관리된 바 있었으니, 흔히 남산의 나무 하면 소나무가 떠오르는 것에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자리잡고 있다. 태종 15년(1415) 4월, 산에 송충이로 인해 피해가 심하자, 한성부에 명해 송충이 구제에 나서도록 하고 서울 도성 사방의 산에 대한 관리를 엄하게 했다. 에 도성 사방 산에 입산금지표를 세우고 벌목과 채석 등을 금하는 내용이 명문화돼 있으니, 오늘날 산악 관리와 개발·훼손을 제한하는 정책인 그린벨트의 시원이라고 할 만하다.

남산은 청학동이라는 아름다운 신선경도 있을 만큼 시문학이 꽃피던 심미적으로도 아름다운 경관의 산이었다. 더더욱 한성부의 생활권 내에 있기에 접근성이 좋아서 남산의 승경을 찾아 풍류를 즐기던 관료와 도덕을 연마하는 선비가 줄을 이었다. 남산에 있었다는 청학동과 관련해 세조 2년(1456)에 “세조가 청학동에 거동했다”는 의 기사가 있고,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규경(1788~?)은 남산의 청학동에 관해 “도성의 남촌 필동의 가장 깊은 곳에 있다. 가운데로 한 줄기 산골물이 흐르니 곧 남산의 산록이다. 곁에는 금어영 화약고가 있다”는 상세한 변증도 했으며, 김정호의 (1864)에도 한양의 남산 남쪽(잠두산 북쪽)에 청학동이 있었다는 표기가 확인된다.

문인들이 인격을 닦던 ‘경관 텍스트’

이처럼 남산의 북쪽 기슭은 맑은 물이 흐르는 골짜기를 이루어 많은 사대부들이 저택과 정자를 마련했다. 이행, 이안눌, 조현명, 이유원, 정원용, 조인영, 정광필, 김석주, 박영원, 조용화, 윤정진 등 수많은 관료와 학자, 문인들이 남산에 살거나 남산을 찾아 풍치를 즐기고 남산을 노래한 시문을 남겼다. 조선조 유학자들에게 산수는 나를 비추어보고 수기(修己)하는 ‘경관 텍스트’로 인식되었으니, 이러한 산수에 대한 태도는 자연지리적 환경을 자아의 정립과 인격의 수양에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이었다.

조선시대에 남산이 누렸던 영예와 문화는 일제 시기를 당해 굴욕과 생채기의 경관으로 새겨지게 된다. 해방과 전후의 혼란기를 거치고 수도 서울의 한복판에서 심장과 같이 의연히 있는 남산을 바라보니 형언할 수 없는 감회가 메아리친다.

최원석 경상대 연구교수·인문학부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