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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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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정치의 대명사가 되다


5·16 쿠데타 뒤 중앙정보부 입주하며 야당탄압·간첩사건 조작·고문 현장으로…
‘남산 체제’라는 시대의 상징
등록 2009-12-10 16:23 수정 2020-05-03 04:25
글 싣는 순서

제1부 남산의 역사와 문화

① 근대 이전의 남산
② 일제시대 남산 1
③ 일제시대 남산 2
해방~자유당 시절의 남산
군사정권시대 1
군사정권시대 2
⑦ 민주화 이후

완곡어법(婉曲語法)이 있다. 어떤 대상을 직접 지칭하는 대신 모호하고 우회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표현법을 말한다. ‘남산’은 중앙정보부(중정)의 완곡어법이었고, 중앙정보부장은 ‘남산의 부장’이었다. 권위주의 시대 중정은 권력과 공포의 대상이었고, 언제부터인가 국민은 중정 대신 남산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중정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한국에는 마땅히 정보기관이라 부를 만한 것이 없었다. 장면 정권하에서 이후락이 지휘하던 중앙정보위원회(79호실) 정도가 있었지만, 단순한 정보수집팀에 불과했지 국내외 정보의 수집과 판단, 공작과 수사를 전담하는 어엿한 정보기관은 아니었다. 5·16 쿠데타 이틀 뒤인 5월18일, 김종필은 육군본부 전략정보과에 근무하던 이영근과 서정순을 불러 정보부 창설을 위한 법을 입안하라고 지시한다. 김종필의 지시가 있은 지 불과 한 달 만인 6월20일 중앙정보부법이 공포된다. 중앙정보부법을 기초했던 이는 박정희 소장의 법무참모였던 신직수였는데, 이후 신직수는 유신헌법을 기초한 뒤 제7대 중정 부장이 되어 유신체제 수호의 최전방을 지휘한다.

나무에 반쯤 가려진 옛 중앙정보부 수사국. 서울 남산1호 터널 바로 옆에 있다.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나무에 반쯤 가려진 옛 중앙정보부 수사국. 서울 남산1호 터널 바로 옆에 있다.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남산에 산재한 중정 건물 40여 개

중정이 창설되자 김종필 부장과 두 명의 차장은 서울 태평로 사무실(국회 제3별관)을 썼다. 2국은 남산 북쪽 숭의학원 인근에 있던 이후락의 정보연구실 건물을, 3국은 무교동의 서린호텔 자리, 서울분실은 남산 3호 터널 입구의 사무실을 썼다. 당시는 초창기여서 6개 실·국이 모두 들어설 수 있는 건물을 확보할 수 없었을뿐더러 보안상의 이유로 조직을 한 곳에 집결해서도 안 되었다. 중정 본청 부지 마련을 위해 이영근이 헬리콥터를 타고 다니며 찾아낸 곳은 동대문구 이문동 부지(실제로는 성북구 석관동 산 1-5번지 의릉터)였다.

중정은 발족과 더불어 의릉터 전역과 이웃 토지 일부를 포함해 13만 평의 부지를 점령해 중정 청사터로 사용했다. 조선시대 왕이 누렸던 절대 권력에 대한 동경이었을까? 중정이 의릉(경종)터에, 이후 국가정보원이 영릉(세종)터에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은 묘한 여운을 남긴다. 어쨌든 대외적으로는 의릉터가 중정의 소재지였다.

그러나 서울의 동쪽 교외에 위치한 의릉터와는 별도로 남산 중턱, 정확히는 중구 예장동 4-5번지 일대에 또 하나의 정보부가 있었다. 의릉 본청이 자료 수집·보관, 교육·훈련, 해외 업무 등 배후적 기능을 담당한 반면, 남산 중턱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별관에는 대공 및 국내 정치를 다루는 중정의 핵심 부서가 모두 입주해 있었다. 중정 부장을 비롯한 주요 간부들도 석관동 청사보다 예장동 청사에서 주로 근무했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4개 동에 불과하지만, 서초구 내곡동으로 국정원 청사가 이전하기 직전까지 남산에 산재하던 중정 건물은 무려 40여 동에 이르렀다. 1972년 남산 본관이 준공되기 전부터 중정 부장들은 본청이 있던 석관동이 아닌, 청와대를 마주 보는 남산 중턱의 집무실에서 근무했다. 대통령이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가기 위해서다. ‘남산의 부장들’이라는 세간의 호칭이 생긴 것은 이 때문이다.

중정이 남산에 들어선 뒤 남산에는 어떤 변화가 생겼을까? 대한제국 시대 이래로 남산은 공원(한양공원)이었다. 그러나 정보부가 들어서면서부터 남산은 휴식과 충전이 아닌 공포와 억압의 공간으로 변질되었다. 이러한 극적인 변화를 주도한 이가 ‘남산 멧돼지’로 불린 제4대 중정 부장 김형욱이다. 김형욱은 6년3개월 동안 남산의 주인으로 군림하면서 정권 수호에 앞장선다. 김형욱 재임 기간 중 발생한 굵직굵직한 사건들의 목록만 봐도 그가 박정희 장기 집권을 위해 얼마나 헌신했는지 알 수 있다.

정권 유지 첨병이었던 ‘남산의 부장들’

1963년 7월 김형욱은 중정 부장으로 취임하자마자 제5대 대통령 선거를 지휘한다. 그해 10월15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 박정희는 민주정의당 후보 윤보선을 겨우 15만6026표(1.5%)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는데, 선거 승리의 일등 공신이 김형욱이었다. 김형욱은 야당을 분열시켜 후보가 난립하도록 했고, 특히 자유민주당 후보였던 송요찬을 석연찮은 이유로 구속한 뒤 후보를 사퇴하도록 했다. 김형욱은 1967년의 이른바 6·8 부정선거에서도 신민당의 재정을 후원하던 김재화를 협박해 신민당 전국구 후보에서 사퇴시켰다. 김재화의 사퇴로 선거자금 유입이 차단된 신민당의 선거운동은 사실상 마비되었다.

김형욱은 주요한 정치적 고비마다 조직사건을 발표해 정권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무산시켰다. 1964년 8월의 제1차 인민혁명당 사건과 1967년 7월의 동백림 사건이 대표적이다.

조직사건은 피의자들에 대한 가혹한 고문을 수반하는 경우가 많은데, 제45회 국회 법사위 회의록(1964년 10월21일)을 보면, 도예종을 비롯한 인혁당 관련자 26명 중 20여 명이 전기 또는 물고문을 당했다. 심지어 김형욱 본인도 그의 회고록 에서 인혁당 수사가 무리한 수사였음을 토로했을 정도다. 동백림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시인 천상병은 친구인 강빈구가 독일 유학 중 동독을 방문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막걸리 값으로 1500원을 받은 것이 빌미가 되어, 간첩과 내통하고 간첩자금을 수수한 ‘국사범’이 되었다. 중정에서 받은 극심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시인은 출소 뒤 폐인이 돼버렸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위세를 떨친 ‘남산의 부장들’. 왼쪽부터 김형욱, 이후락, 신직수.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위세를 떨친 ‘남산의 부장들’. 왼쪽부터 김형욱, 이후락, 신직수.

미군이 사용하던 남산의 원형 콘센트 막사 2개 동(개당 100평)에서는 남자를 여자로 만드는 것을 제외하고는 불가능한 일이 없었다고 한다. 순진무구한 시인 천상병의 경우처럼 아무것도 아닌 일로 얼마든지 국사범이 될 수 있었다. 당시의 남산은 최종길 서울대 교수처럼 동생이 중정 감찰실 직원이어도 앞일을 알 수 없는 곳이었는데, 하물며 간첩 혐의로 끌려간 사람들은 어떠했겠는가. 김형욱의 중정은 부당한 선거 개입, 야당(정치인) 탄압, 간첩단 사건, 고문, 협박, 시장경제 질서 교란( 강제 매각) 등 정권 안보에 앞장서는 정보기관의 전형을 창출했고, 청와대를 마주하고 있던 남산의 콘센트 막사에서 그 모든 일이 이루어졌다.

영구 독재 꾀한 ‘풍년사업’ 주도하기도

‘포스트 김형욱’ 시대의 남산은 그 역할이 더욱 증대되었다. 남산은 7·4 남북 공동성명을 계기로 반공의 수호신에서 남북 화해의 선도자로 변신을 준비하는 듯했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는 비밀리에 ‘풍년사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대만의 총통제와 프랑스의 드골헌법을 근간으로 중정에서 초안을 마련하고, 법무장관 신직수의 수정을 거쳐 유신헌법이 완성되었다. 국가의 골간인 헌법이 국회가 아닌 남산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당시 한국 정치의 상황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풍년사업의 성공으로 남산은 더욱 강력해졌다. 박정희가 경제 문제에 집중하는 동안 이후락과 신직수는 국가 안보를 전담했다. 긴급조치를 통해 남산은 강력하고 난폭해졌다. 그럴수록 남산에 대한 국민의 공포는 커져만 갔다. 최종길 사망사건, 김대중 납치사건 등이 이 시기에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법률가 출신 신직수가 남산의 부장이 되자 남산은 법질서 확립을 전면에 내세운다. 1975년 3월18일 국가모독죄를 신설한 형법 개정안이 날치기 통과되었다. 이 법은 국내외의 외국인 또는 외국 단체 등을 상대로 사대적(事大的) 행위를 한 모든 사람을 처벌할 수 있도록 했는데, 이는 국내외 민주화운동 세력을 탄압하는 법적 근거가 되었다. 또한 이 법은 국내의 야당 정치인들이 외신기자나 국제 인권단체 인사와 접촉하려는 시도 자체를 봉쇄했다. 신직수 시대 남산이 법을 정치적 무기로 활용한 대표적 사건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다. 이미 1964년에 고초를 겪었던 제1차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이 이번에는 긴급조치 4호 아래 민청학련의 배후로 지목돼 다시 구속되었다. 고문수사가 이루어졌고, 사건 발표 1년 만에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으며, 사형 확정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2007년 1월23일 서울중앙지법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8명에게 무죄를 선고함으로써 이 사건은 법률가 출신 정보부장하에서 가혹한 고문수사를 통해 만들어진 ‘법살’이었음이 입증되었다.

김종필이 씨를 뿌리고, 김형욱이 싹을 틔웠으며, 이후락과 신직수가 꽃을 피우고, 김재규가 종말을 선언한 남산의 중정은 전두환에 의해 다시 태어났다. 1981년 1월 중정은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로 개칭하면서 새롭게 출범했지만, 안기부의 새로움이란 중정의 ‘정보 및 보안 업무의 조정·감독 기능’을 ‘기획·조정’으로 변경하고, 반공법 위반 범죄에 대한 수사권까지 확보하는 것이었다, 남산은 정권이 바뀌고 명칭이 바뀌었지만 본모습은 변하지 않았다. 국민의 머릿속엔 여전히 억압과 공포의 상징인 남산이 있을 뿐이었다.

유학성(11대), 노신영(12대), 장세동(13대), 안무혁(14대), 배명인(15대), 박세직(16대), 서동권(17대), 이상현(18대), 이현우(19대), 김덕(20대)을 거쳐 권영해(21대)에 이르기까지 11명이 남산의 부장 자리를 거쳐갔다. 그 사이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1982년 12월), 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1985년 9월), KAL 858기 폭파사건(1987년 12월),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사건(1990년 10월), 남한조선노동당 사건(1992년 10월) 등 굵직굵직한 조직사건들이 발생했고, 그 사건 현장에는 남산의 안기부가 있었다.

“남산이 남산을 떠나야만 했던 상황”

1987년 민주화를 계기로 정권과 체제 수호의 상징이던 안기부가 서울 도심의 한복판 남산에 계속 머물러 있기에는 안기부도 국민도 부담스러운 상황이 되었다. 민주화와 함께 세상이 변했고, 남산도 변해야 했다. 안기부의 청사 이전은 국민에게 봉사하는 국가 정보기관으로의 변화라는 시대적 요구에 안기부가 부응한 결과다. 손정목의 표현처럼 “남산이 남산을 떠나야만 했던” 상황이 온 것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우리에게 남산의 경험과 이미지가 반드시 부정적으로 작용했던 것만은 아니다. 남산은 국민에게 이른바 ‘형성적 경험’(formative experience)을 제공했다. 남산의 폭력성을 직접 체험하거나 목격한 다수의 사람들이 남산 체제의 문제점을 인식하게 되었고, 이들은 폭압적 국가기구와 권위주의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세력으로 성장했다. 중정과 안기부에 대한 부정적 경험이 이른바 민주화세력을 형성하고 민주화를 달성하는 긍정적 힘이 되었다는 사실은 이명박 시대의 국정원이 새겨둘 만하다.



육영재단의 뿌리도 남산
‘거대한 흉물’ 강제 매각 뒤 능동으로 이사


서울시 교육연구정보원

서울시 교육연구정보원

과거 개발독재 시절 위정자들은 큰 공간이나 건물이 필요할 경우 남산을 곶감 빼먹듯이 이용했다. 지금은 동국대의 일부가 된 중앙공무원교육원, 재향군인회관 등이 대표적이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동생 근령씨와 관련해 종종 언론을 타는 육영재단도 그 시작은 남산이었다.
1969년 박정희 전 대통령 부인 육영수씨가 주관하는 재단법인 육영재단이 출범하면서 남산 중턱에 어린이회관(현재 서울시 교육연구정보원·사진)을 짓기 시작했다. 이듬해 7월 지하 1층 지상 18층짜리 거대한 건물이 지어졌고, 언론은 “동심의 궁전” “여기는 우리들 세상” “동양 최대의 어린이회관”이라며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하지만 그런 축포와 달리 어린이회관은 불편함이 많았다. 교통편이 나쁠 뿐만 아니라 남산 중턱에 있어 어린이들이 걸어 올라가기 힘들었다.
결국 박정희 대통령은 어린이회관을 국립중앙도서관에 넘기고 어린이회관은 광진구 능동 어린이대공원 옆으로 이전하도록 지시했다. 장소가 비좁아 여의도 쪽 새 이전지를 물색하다 졸지에 산으로 올라가게 된 국립중앙도서관으로서는 ‘폭탄’을 맞은 셈이었지만 이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1974년 정부(국립중앙도서관)는 8억4천만원에 어린이회관을 인수하고, 을지로 1가에 있던 국립중앙도서관 터는 8억3600만원에 롯데그룹에 특혜 매각돼 롯데호텔이 들어섰다. 육영재단은 8억4600만원으로 광진구 능동 어린이대공원 부지 3만여 평을 할애받아 지하 1층 지상 4층 연건평 5200평의 번듯한 새 회관을 지어 이사했다.
겉으로 보기엔 각 기관의 독자적 판단에 따른 자연스런 거래 같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서울시 도시계획국장, 내무국장 등을 역임한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자신의 저서 에서 이같은 삼각거래에 얽힌 뒷이야기를 소개하며 “이런 일련의 독재 행위를 당시 어떤 매스컴도 보도하지 않았고 따라서 일반 시민은 무엇이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며 “제3·4공화국 정권이 어떤 것이었는지 박 대통령의 절대권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를 말해주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어린이회관에 부적합했던 건물이 도서관에 적당할 리 없었다. 구조적으로도 적합하지 않고, 지하 서고 또한 너무 습해 장서가 변질·부패될 우려가 컸다. 또 장소가 협소해도 증축이 불가능했을뿐더러, 이용객이 찾아오기에도 너무 멀었다. 결국 국립중앙도서관은 1988년 서초구 반포동 현재 위치로 이사했다.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오승용 전남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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