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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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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배층의 특권적 공간 ‘남촌’


1부 3회 일제시대 남산 ②…
산자락인 남대문·명동·충무로에 대기업·은행·백화점 등 입주 일본식 신시가지 조성돼
등록 2009-10-16 10:58 수정 2020-05-03 04:25

국운을 다시 일으키려는 심사로 고종은 1897년 10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로 즉위했다. 그에 앞서 1896년 8월 고종은 서울을 황도로 개조하기 위한 지시도 내렸다. 새로운 본궁 경운궁(덕수궁)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현재의 태평로에서 세종로로 이어지는 길, 동쪽으로는 을지로에 해당하는 구리개길, 동남쪽으로 현재의 소공로, 남쪽으로는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길이 그렇게 해서 정비되었다. 미국 워싱턴을 본뜬 방사형 가로 체계로 서울을 재편하고자 했던 것이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초기에 자리를 잡았던 충무로 1~3가 진고개 지역을 ‘거주지의 으뜸’을 뜻하는 ‘혼마치’(本町)라고 부르며 시내의 중심가로 키워갔다. 이로 인해 전통적 중심지인 종로 쪽 대신 혼마치 일대가 서울의 중심으로 올라섰는데, 이는 현재의 ‘중구’라는 명칭에서도 확인된다. 사진 <서울 남촌; 시간, 장소, 사람>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초기에 자리를 잡았던 충무로 1~3가 진고개 지역을 ‘거주지의 으뜸’을 뜻하는 ‘혼마치’(本町)라고 부르며 시내의 중심가로 키워갔다. 이로 인해 전통적 중심지인 종로 쪽 대신 혼마치 일대가 서울의 중심으로 올라섰는데, 이는 현재의 ‘중구’라는 명칭에서도 확인된다. 사진 <서울 남촌; 시간, 장소, 사람>

비슷한 시기, 일본은 남산 아랫자락에 구축한 그들의 거점을 서울 중심부를 향해 확장하고 있었다. 고종의 황도 건설에 맞불을 놓은 격이다. 도시 개조는 점차 힘을 잃어갔다. 여기에 더해, 새로 연 ‘광화문~남대문 가로축’은 일제가 용산으로부터 서울로 침투하는 경로가 되었다. 서울은 점차 식민도시로 전락해갔다.

남산 중턱에서 기슭으로 확대된 일본인 구역

이는 일본인 거주가 급격히 늘어나는 것으로 확인될 수 있었다. 본래 일본인의 성 안 거주는 허용되지 않았다. 1880년 서대문 밖 천연정(지금의 서울적십자병원 자리) 청수관에 연 공사관에 40여 명의 일본인이 기거한 것이 처음이다. 이듬해 임오군란으로 청수관이 불타자, 이들은 성 안으로 들어와 금위대장 이종승 집을 임시로 쓰다가 교동의 박영호 집을 사들여 공사관으로 신축했다. 이때 일한 인부 70명이 서울에 들어온 최초의 일본 민간인이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일본인들은 1884년 갑신정변을 틈타 조정을 압박해 서울 입경과 거주를 정식으로 허가받았다. 이때가 1885년 2월이었다. 일본 공사관도 남산 기슭 ‘녹천정’ 자리로 옮긴 뒤였다. 일본인 거류 지역은 공사관 인근의 중구 예장동·주자동에서 충무로 1가에 이르는 진고개 일대로 지정되었다. 최초의 일본인 가옥 12동이 명동성당 후문 앞 일대에 세워졌는데, 그해 9월 일본 거류민은 20호 89명이었다.

식민지 시절 남촌은 최신식 건물들의 집합소였다. 그 가운데서도 조선은행(현 한국은행·맨 위), 경성우편국(현 중앙우체국 자리·가운데), 미쓰코시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이 마주 보고 있던 한국은행 로터리는 최고의 명소로 꼽혔다.

식민지 시절 남촌은 최신식 건물들의 집합소였다. 그 가운데서도 조선은행(현 한국은행·맨 위), 경성우편국(현 중앙우체국 자리·가운데), 미쓰코시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이 마주 보고 있던 한국은행 로터리는 최고의 명소로 꼽혔다.

이는 조선인이 모여 사는 북촌과 대비되는 일본인 거주지 ‘남촌’의 시작이었다. 지금의 예장동 일대인 남촌의 시작점은 300년 전 임진왜란 때 일본군 1500여 명이 성을 쌓고 1년간 머물던 ‘왜성대’라는 곳이다. 남촌의 등장은 300여 년 만에 일본인의 식민지 건설이 다시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인 거류민 수는 빠르게 늘어 1884년 말 260호 848명에서 1895년 말 500호 1889명으로 배가 되었다. 청일전쟁을 이긴 일본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거류 지역을 본격적으로 확장했다. 진고개에서 남대문 사이에 새 도로를 냈다. 일본인 전용 종합병원을 신설해 무료 진료도 했다. 일본 상품 전문 진열소까지 설치했다.

일본인 거류지가 커지고 관리 업무가 늘자 일본 공사관은 1896년 주자동 6번지에서 충무로 1가 입구(현 신세계백화점 자리)로 확장해 옮겨갔다. 고종이 도시 개조를 지시한 해였다. 공사관의 이전은 일본인 거류지의 중심지가 외진 남산 밑에서 번잡한 도심으로 옮겨진 것을 의미한다. 이는 동시에 거류지 개념에서 신시가지 혹은 신도시 개념으로 남촌의 확장이 이뤄졌음을 의미한다. 이전 뒤 10여 년간 일본인 수는 약 5배가 늘어 1906년 1만 명을 넘어섰다. 한-일 합병이 되던 1910년 일본인은 서울 인구의 14%를 차지했는데 대부분이 남촌에 살고 있었다. 일본 공사관의 지위도 변했다. 정미7조약을 체결한 이듬해(1908년) 일본은 공사관을 통감부의 경성지부인 ‘경성이사청’으로 바꾸었다. 외교기관이던 공사관이 식민지 통치기관으로 변화한 것이며, 남촌 또한 이방인의 거주지에서 식민지 지배층이 사는 특권적 공간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남촌의 변화는 우선 내부 정비로 나타났다. 한-일 합병 직후 총독부는 1910년 남대문에서 남대문 정거장에 이르는 도로를 개수했고, 1911년에 황금정(현 을지로), 1912년에 태평통(태평로)을 준공했다. 황금정은 일본인 거주지인 남촌을 청계천변까지 확장시키면서 본정통(충무로)과 함께 새로운 중심가로 부상했다.

1910년 서울의 일본인 비율 14% 달해

총독부는 한 걸음 더 나가 경성 도시 개조도 추진했다. 북촌과 남촌의 중심을 안국동과 을지로 3가에 두고, 각 중심의 방사형 도로망을 개설한 뒤, 남촌과 북촌을 파고다공원을 중심으로 통합하는 도시 구조의 개편이 시도되었다. 1908년엔 일본 황태자 방문을 맞아 남대문을 허문 뒤 서울역을 거쳐 용산에 이르는 남북축도 구축했다. 남촌이 서울 밖으로까지 확장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남촌 내부의 중심부는 충무로에서 명동(조선시대 명례방)으로 넓혀졌다. 일본인들은 충무로 1~3가의 진고개를 ‘거주지의 으뜸’을 뜻하는 본정(本町), 즉 혼마치로 부르며 중심가로 키워갔다. 충무로 1~2가에는 당시 일본인이 경영하던, 귀금속·잡화류·화장품·서적·문구류·식료품·화장품 등을 취급하는 고급 점포들이 즐비했다. 1910년대에 들어 충무로 상권은 인근의 명동으로 파고들었다. 1912년엔 명동 2가 85번지에 경성어시장이, 1919년엔 25번지에 공설시장이 문을 열었다. 동명도 일제식 메이지마치(明治町)로 바뀌었다. 혼마치와 메이지마치는 남촌을 상징하는 최고의 번화가였다.

이곳은 단순한 고급 소비지만 아니었다. 일본 공사관이 남대문통으로 옮겨오고, 또한 경성이사청으로 승격되는 것을 전후로 충무로·명동 일대엔 식민지 조선을 경제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기관들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섰다. 가령, 조선은행(현 한국은행 건물)은 1907~12년에 남대문로의 현재 위치에 건립되었고,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908년 현재 을지로 2가 외환은행 자리에 설치되었으며, 조선식산은행은 1918년 현 롯데호텔 신관 자리인 남대문로 2가에 세워졌다. 이후 남대문로는 동일은행, 천일은행, 조선상업은행, 조선신탁회사, 삼화은행 등이 들어서면서 조선의 최고 금융거리가 되었다.

1920년대를 지나면서 금융기관과 관련된 대기업체와 백화점이 대거 입지했다. 오늘날 증권거래소의 전신인 경성주식현물취급시장이 1920년 명동에 개설되었고, 현 한국전력의 전신인 경성전기주식회사가 남대문로 2가에 1927넌 준공되었다. 현재 신세계백화점이 된 삼정(미쓰이) 재벌 계열의 삼월(미쓰코시)백화점이 1927~34년 충무로 1가 현 위치에 건립되었고, 삼중백화점도 1932~33년에 충무로 2가 24번지에 문을 열었다. 1939년엔 미도파백화점의 전신인 전가옥(조지아)백화점이 들어왔다. 일제시대의 3대 임대빌딩 중 하나인 천대전 빌딩도 1932년 남대문로에 건립되었다.

식민지 백성 현혹하던 고급 소비문화의 요람
명동과 을지로 입구 일대는 일제시대부터 금융과 쇼핑의 중심지였다. 맨 위부터 수많은 조선인의 원망을 샀던 동양척식주식회사(현 외환은행 본점 자리), 조지아백화점(현 롯데백화점 자리), 조선식산은행(현 롯데호텔 신관 자리).

명동과 을지로 입구 일대는 일제시대부터 금융과 쇼핑의 중심지였다. 맨 위부터 수많은 조선인의 원망을 샀던 동양척식주식회사(현 외환은행 본점 자리), 조지아백화점(현 롯데백화점 자리), 조선식산은행(현 롯데호텔 신관 자리).

남대문로가 금융과 대중소비의 요람으로 탈바꿈하는 것과 아울러 인근의 소공로와 명동 일대도 큰 변화를 겪었다. 당시 소공로에는 조선호텔,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공회당, 사우공회의소, 은행집회소, 비전옥여관, 일본항공수송회사 객화취급소, 경성부 도서관, 기독교청년회 등이 들어섰다. 명동 일대에도 전가옥백화점이 들어 선 뒤 명동 입구에서 명동성당까지의 도로가 10m 폭으로 확장되면서 독립적인 상가가 형성됐다. 당시 명동은 충무로에 예속된 유흥오락가로 다방, 카페, 주점 등이 이미 밀집해 있었다.

이때부터 충무로 중심의 남촌은 명동과 남대문로 중심으로 점차 탈바꿈해갔다. 도심 집중이 가속화되자 일제는 예장동 통감부 자리에 있던 총독부를 1926년 경복궁 앞으로 신축해 옮겼고, 경성이사청에서 승격한(1918년) 경성부청(시청·현 서울시청 건물)도 1926년 현재의 위치(당시 경성신문사 터)로 신축해 옮겼다. 부청 자리엔 삼월백화점이 들어서면서 조선은행 앞 광장(일본인들은 줄여 ‘선은광장’이라 불렀다)을 중심으로 조선은행, 경성우편국, 삼월백화점이 삼각축을 이루는 남대문통 랜드마크가 생겨났다.

1920년대 남대문통 시대가 열리면서 1910년대까지만 해도 엇비슷하던 북촌과 남촌의 경제력은 현격한 격차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본 상인들은 식민지 지배자로서 지위를 이용해 급속히 성장했고, 이는 도시 공간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경성부 내 주요 공공건물 중 북촌에 위치한 것은 조선총독부 하나에 불과했고, 그 밖의 건축물 대부분은 남촌에 있었다. 남촌은 충무로 일대와 명동에서 인현동까지, 퇴계로 남쪽, 즉 남산동·회현동·예장동·필동·묵적동 일대에 걸쳐 있었다. 이들 지역의 주민 중 일본인 비율은 평균 90%에 달했다.

193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남촌 중심부인 충무로와 명동은 마치 일본을 옮겨놓은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었다. 일본을 거쳐온 서양의 신문화가 조선에 등장하는 무대가 이곳이었다. 여기서도 특히 백화점이 꽃이었다. 삼월백화점을 중심으로 밀집된 고급 상가들이 불야성을 이루는 충무로, 즉 혼마치는 경성 사람이면 누구나 가서 맘껏 소비하고 즐기고 싶어한 욕망의 해방구였다. 그러나 동시에 ‘내지인’으로 불린 일본인들이 식민지 지배층으로서 특권적 삶을 누리는 ‘선망과 배제의 공간’이기도 했다.

당시 충무로·명동 일대의 백화점 등을 배회하며 옮겨다니는 무리를 ‘혼부라당’이라 불렀다. ‘혼마치를 방황하는 무리’란 뜻의 일본어 속어다. 모던보이나 모던걸의 겉모습을 한 이들은 제국주의를 통해 번진 자본주의적 소비욕망의 포로였지만, 동시에 탈권력화된 식민지 국민이기도 했다. 북촌에서 강(청계천)을 건너 혼마치로 몰려간 이들은 백화점을 배회하면서 고히(커피)와 칼피스를 마시고 재즈를 듣고 찰스턴을 추지만 그 시간이 끝나면 북촌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꿈같은 남촌의 화려함을 뒤로한 채 돌아온 북촌은 더욱 깜깜하고 궁핍하게만 느껴졌을 것이다.

남촌의 화려함 뒤엔 ‘전통적 중심’ 북촌의 쇠락

1930년대 말~1940년대 초 서울의 도심 모습은 예전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주목할 만한 변화는 태평양전쟁 발발로 용산과 영등포가 도시 변화의 새로운 중심으로 떠오른 점이다. 1930년대부터 나타난 ‘대경성’이라는 이름과 함께 서울은 ‘대동아공영권’의 거점도시로 공간적 확장이 시작된 것이다. 이는 남산 북쪽에 구축된 남촌과 남쪽에 조성된 신시가지가 연접되는 ‘대경성’의 한 현상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전쟁에 패색이 드리워지면서 남촌의 화려함은 빛을 잃기 시작했으니 대경성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조명래 단국대 교수·도시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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