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바야카와(小早川), 가토(加藤), 고니시(小西)가 살아 있었다면 과연 오늘 저녁 저 달을 어떻게 볼 것인가.”
1910년 8월29일, 무너진 대한제국의 수도 경성. 남산 자락의 통감관저에서 거나하게 술에 취한 조선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거만스런 표정으로 시를 읊었다. 이날 아침, 이른바 ‘한국 병합에 관한 조약’(한일합병조약)이 정식으로 공포됐다. 꿈에 그리던 조선 합방이 이뤄진 날이었다. 데라우치는 400여 년 전 도요토미 히데요시 휘하의 무장들이 실패했던 ‘조선 정벌’을 자신이 이뤄냈다는 자만감에 취해 있었다.
통감관저→총독관저→시정기념관일주일 전인 8월22일의 일이다. 남산 기슭 ‘왜성대’ 중턱에 있던 통감관저에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이 나타났다. 데라우치가 한일합방 전권위원으로 임명한 이완용이었다. 순종의 국새를 찍은 위임장을 받아 달려오는 길이었다. 역사학자 이이화씨는 에서 이 순간에 대해 이렇게 썼다. “8월22일 (이완용은) 위임장은 뜻대로 받아냈다. 순종이 (위임장에) 옥새를 찍지 않으려 하자, 황후 윤씨가 옥새를 치마폭에 감추고 내놓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자 (황후 윤씨의 외숙부) 윤덕영이 달려가서 빼앗아 찍었다고 전한다.”
8월4일부터 이때까지 데라우치와 이완용 사이를 오가며 공작을 꾸민 자는 이완용의 비서였던 이인직이다. 등의 신소설을 발표한 작가, 바로 그 이인직이었다. 이완용과 데라우치는 이날 오후 통감관저 2층의 데라우치 침실에서 한일합병조약에 서명했다.
이 장소에 대해 1940년 11월22일치는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2층에는 17점의 사군자폭(四君子幅)이 걸려 있다. 이것을 보아가던 기자는 우뚝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는 방 안에 나섰다. 이 방은 합병조인실(合倂調印室). 이 방이 바로 30년 전 일한합병의 도장을 찍던 그 한순간을 가졌던 방인 것이다. 오늘의 조선을 낳아놓던 역사적 산실(産室)이요, 이 강산 백의인에게 새길을 밝혀준 봉화대(烽火臺)도 되었던 것이다. 여섯 칸 남짓한 방 안에 거울을 좌우로 이토공(伊藤公)으로부터 미나미 총독에 이르기까지 8대 통감 총독들의 흉상이 놓여 있고 중앙의 테블- 그 위에는 벼룻집과 ‘잉크 스탠드’가 있고 좌우로 네 개의 의자와 한 개의 소파가 놓여 있다. ‘자, 이것으로서 완전히 우리는 한 형제요 한 임군을 섬기며 나아갈 길을 연 것이요’ 하며 ‘허허허…’ 하고 소리를 높여 웃는 옛 어른들의 환영이 눈앞에 움직이는 것 같다.”
한일합방 이후 한국통감은 조선총독으로 격상된다(1910년 8월29일까지 한반도에 존재하는 국가의 정식 명칭은 ‘대한제국’이었고 ‘한국’은 이를 줄인 말이었다. 일본 내각은 1910년 7월 내부 칙령을 통해 대한제국을 대신할 말로 ‘조선’을 택했다). 총독은 식민지 조선을 통치하는 최고권력자였다. 관저도 총독관저. 왜성대 총독관저는 1939년까지 쓰이다가, 제7대 총독인 미나미 지로가 지금의 청와대 터로 관저를 옮기면서 ‘시정기념관’으로 탈바꿈한다. 는 이에 대해 “메이지 18년 이곳에 새로이 터를 닦고 일본공사관으로서 등장한 이래 작년 9월 미나미 총독이 경무대 신관저로 이사하기까지 실로 50여 년의 묵은 역사를 가지고 있던 이 집을 시정 30주년의 빛나는 해와 함께 영원히 기념하고자 여기에 그 이름을 ‘시정기념관’으로 하고 역대 통감, 총독의 보배로운 유물을 진열하여 일반에게 공개”한다고 보도하고 있다.
1960년, 건물의 마지막 운명
통감부는 위치부터가 조선 정복을 목적했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다음해인 1906년 2월에 설치된 통감부의 위치는 조선 왕조 역대 왕의 신위를 모신 종묘를 정남에서 마주 보는 자리였다. 당시 대한제국의 본궁이던 경운궁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남산 아랫자락이었다. 통감부가 여기에 위치를 잡으니, 일본인들도 여기로 모였다. 궁성이 내려다보이는 곳에는 건물을 짓지 못하게 했던 조선의 오랜 관례를 묵살하고 일본인들은 남산 기슭에 집과 청사의 터를 잡고 대한제국의 왕궁을 내려다보았다.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가 집계한 바에 따르면, 1900년부터 1910년까지 일제에 의해 한성에 신축되거나 증축된 청사만 139개동에 달했다고 한다. 이들이 선호했던 건축양식은 자신들의 건축 방식에 르네상스 양식을 합친 ‘왜양절충형’이었다. 통감부 역시 이런 양식에 따라 지어졌다.
제국주의 일본이 세세만년 기념하고 싶었던 ‘합병조인실’. 그러나 우리는 그곳을 까맣게 잊고 있다. 경술국치의 터는 지금 남산 중턱의 잔디밭으로 사라졌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근·현대문화재 전문가 이순우(47)씨는 3년간의 추적과 고증 끝에 경술국치 현장을 찾아냈다. 그가 확인한 경술국치의 터 주소는 ‘서울 중구 예장동 2-1번지 인근의 잔디밭’. 이씨의 설명이다.
“해방 이후 이승만 정부는 시정기념관을 민속박물관(1946년)으로 바꾼다. 6·25 전쟁 때 피난 갔던 국립박물관이 경복궁 석조전에 자리를 잡을 때까지 1년6개월 남짓 임시 국립박물관(1953년)으로 쓰이던 때도 있었다. 이후는 연합참모본부 건물(1954년)로 쓰였다.”
1960년 9월20일치에 이 건물의 마지막 운명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정부는 시내 중구 예장동에 있는 ‘연합참모본부 건물’을 개수 내지 증축해서 국무총리 관저로 사용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동 건물은 신관과 구관으로 되어 있는바 한일합병조약 체결 당시 합병조인을 하였던 구관은 건물이 낡았기 때문에 허물어 버리고 신관만을 개수 또는 증축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통감관저는 이 직후에 헐린 것으로 추정된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가 이곳에 중앙정보부를 설치하면서 이 일대는 일반인들의 발길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변했다. 사라진 건물은 기억까지 지웠다. 그래도 복구해내는 이들은 있기 마련이다.
이순우씨는 지난 2006년 이 잔디밭에서 통감관저 안에 서 있던 하야시 곤스케(1860~1939) 동상 받침대 판석 3점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남작 하야시 곤스케 군상’(男爵林權助君像)이라고 쓰여 있었다. 하야시는 1899년 주한공사로 부임해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을 주도한 인물이다. 1936년에는 그의 업적과 희수(77살)를 기념해 관저 건물 앞뜰에 동상이 세워졌다고 한다. 잔디밭 옆 수령 400년의 은행나무도 이곳이 관저 터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터의 은행나무는 서울시 보호수로
1926년 간행된 라는 책에 있는 이 은행나무에 대한 설명이다. “녹천정 부근에는 전설의 명목인 ‘대공손수’(大公孫樹·은행나무)가 있다. 수령 500년이 넘고, 높이는 (통감) 관저의 옥상에 닿아 있고, 가지는 남산 기슭을 덮고 있다.” 녹천정은 통감관저 바로 옆에 있던 조선시대 정자다. 녹천정 옆에 있다던 그 은행나무는 현재 서울시 보호수(고유번호: 서2-7, 중구 예장동 2-1)로 남아 있다.
이순우씨는 “지난 2006년부터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이곳이 경술국치 터임을 알리는 표지석을 세우기 위한 활동을 벌였지만, 서울시와 중구청의 비협조로 중단되고 말았다”며 “지금이라도 서울시와 정부가 가진 문헌과 학계의 고증을 거쳐 경술국치 터를 알리는 표지석이라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통감 관저는 이렇게 흔적조차 희미한 반면, 통감부 터에는 표지석이라도 남아있다. 한일합방 이후 통감부는 총독부로 바뀌고, 남산 총독부는 16년간 조선을 지배했다. 1926년 광화문의 경복궁 앞 옛 중앙청 터로 옮겨가기 전까지. 남산 총독부 터에는 지금 남산 서울애니메이션센터가 들어서 있다. 남산 숭의여전 옆이다.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앞에 보면 통감부와 총독부가 있던 자리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1926년 총독부가 옮겨간 뒤 총독부 건물은 ‘은사과학박물관’이 된다. 이 땅에 들어선 최초의 과학박물관이었다. 해방 뒤 국립과학박물관으로, 1948년에는 국립과학관으로 거듭났으나 한국전쟁 도중 불타고 말았다. 정부는 1957년 이 자리에 한국방송공사(KBS) 건물을 지었다. 한국방송이 여의도로 옮긴 뒤에는 국토통일원 청사로 쓰이다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런 역사를 기억하고 찾는 이들은 드물다. 통감관저는 어디에 있었는지조차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내년 2010년이 경술국치 100주년임에도.
“진보·보수 넘어 복원에 나서야”
이런 상황을 타개하자는 이들이 있다. 작가 서해성씨의 말이다. “경술국치의 통한이 어린 통감관저는 한일합병이 이뤄지던 지난 1910년 시기에는 2층 목조건물이었다. 한일 전문가들의 고증과 각계의 의지만 모이면 충분히 복원할 수 있다고 본다. 보수와 진보의 차이를 넘어 100년을 기억할 공간을 만드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이태희 기자 herme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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