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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100년, 역사가 통째로 사라진다

일제와 독재를 기억하는 남산의 역사 현장, 개발계획으로 허물지 말고 평화공원 조성을
등록 2009-08-21 11:59 수정 2020-05-03 04:25
안기부가 내곡동으로 옮긴 직후인 1995년의 남산 안기부 본부(왼쪽). 경술국치 직전에 찍힌 통감관저(동그라미 안). 이곳이 경술국치의 현장이다. 사진 왼쪽부터 한겨레 김종수 기자· <서울행정사>

안기부가 내곡동으로 옮긴 직후인 1995년의 남산 안기부 본부(왼쪽). 경술국치 직전에 찍힌 통감관저(동그라미 안). 이곳이 경술국치의 현장이다. 사진 왼쪽부터 한겨레 김종수 기자· <서울행정사>

지금 그곳은 벤치 몇 개 달랑 놓인 잔디밭이다. 한때 그곳은 시멘트 바닥의 농구장이었다. 한 세기 전 그곳은 조선을 다스린 일본 통감의 숙소인 통감관저였다. 1910년 8월22일, 거기에서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는 조약이 맺어졌다. 통감관저 바로 옆에는 400년의 세월을 버틴 은행나무 거목이 버티고 서 있있다. 그때 일본인들은 “1592년 조선 정벌에 나섰던 임진왜란 당시의 가토 기요마사가 이 나무에 말을 매어두었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몽진한 한양에 진을 친 왜군들은 남산 꼭대기에 성을 쌓았다. 꼭대기의 성은 사라져도 ‘왜성대’(倭城臺)라는 이름으로 남았다. 1890년부터 공공연히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들은 그 왜성대를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다. 조선과 대한제국의 왕궁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공원을 짓고 그들의 신을 모시는 신사를 지었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한반도를 삼킨 일본인들은 아예 그 동네 이름을 ‘왜성대정’(倭城臺町)이라고 불렀다.


1972년, 왜성대의 한쪽에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서울 중구 예장동 4-5번지. 6층으로 들어선 그 건물의 이름은 중앙정보부 남산 본부였다. 지금 그곳은 서울유스호스텔로, 수많은 내외국 젊은이들을 맞고 있다. 서울시의 정책으로 독재의 공간은 젊음과 문화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유스호스텔 옆길을 따라오면 만날 수 있는 ‘남산창작센터’는 안기부 요원들의 실내체육관이었다. 남산창작센터에서는 매일 수많은 젊은이들이 노래하고 춤춘다. 남산창작센터에서 200여m 떨어진 곳에는 ‘문학의 집, 서울’이 있다. 널따란 정원이 딸린 2층 단독주택을 개조한 이곳은 원래 중앙정보부장 관저였다. 그 앞에 있던 정보부장 경호원들의 숙소도 2005년 ‘산림문학관’으로 변신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과거 이곳이 어디였는지를 알려주는 흔적은 없다.

1년 뒤인 2010년 8월, 대한민국은 경술국치 100년을 맞는다. 우리는 어떻게 100년 전 나라를 빼앗긴 순간을 기억해야 할까. 그 2년 뒤인 2011년 6월에는 중앙정보부 설치 50년을 맞는다. 이 역사는 또 어떻게 남겨야 할까. 서울시는 올해 3월 ‘남산 르네상스 마스터플랜’을 밝혔다. 2015년까지 남산에 있는 옛 중앙정보부(안기부) 건물 등을 모두 허물고 녹지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과연 그게 옳은 길일까. 역사는 그대로인데, 역사를 증언할 건축물들은 계속 사라진다.

다시 남산을 본다. 조선 태조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할 때, 북쪽의 북악산을 현무로 삼고, 서쪽의 인왕산을 우백호, 동쪽의 낙산을 좌청룡으로 삼았다. 남쪽의 목멱산, 지금의 남산은 주작이었다. 우리의 선조들은 두 날개를 활짝 펼친 붉은 봉황의 모습으로 주작을 그렸다.

왜성대와 안기부를 머리와 어깨에 얹고 있는 주작은 힘겹다. 남산의 주작이 다시 날기 위해서는 건물을 없앨 것이 아니라 바로잡아야 한다. 통감관저와 옛 안기부 청사를 복원하고 보존하는 것이야말로 식민과 독재에 묶인 남산의 사슬을 제대로 푸는 길이다. 그래서 남산은 평화를 상징하는 공원이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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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희 기자 herme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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