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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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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가까이에 역사의 현장이…”


통감관저 터·중앙정보부 건물 찾은 대학생들
“데이트 장소의 아름다운 추억이 아픈 역사에 대한 분노로 바뀌어”
등록 2009-11-19 15:09 수정 2020-05-03 04:25

지난 10월31일 오전에 남산을 찾았다. 서해성 교수의 ‘현대정치학 입문’ 수업 현장 답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 교수는 학생들에게 친구들과 함께 참여하라고 했기에, 수업을 듣는 학생과 그 친구들까지 100여 명이 손을 맞잡은 채 남산을 걸었다. 우리처럼 서 교수도 친구를 모시고 왔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였다. 가을비에 흩날리는 은행잎이 예쁜 남산이었다.

10월31일 서울 남산 옛 중앙정보부 건물 앞에서 한신대 학생들과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악명 높은 고문 장소였던 5별관 앞 터널은 스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10월31일 서울 남산 옛 중앙정보부 건물 앞에서 한신대 학생들과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악명 높은 고문 장소였던 5별관 앞 터널은 스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남친과 자물쇠 달기 위해 처음 찾았던 남산

사실 전통사회에서 남산은 민중이 신성시하면서도 의지하는 공간이었다. 자신들의 복과 안녕을 기원하며 사람들은 남산에서 제사를 지냈다. 남산은 사람처럼 제삿밥을 먹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대한제국은 나라와 백성을 빼앗기는 국치를 당했고, 해방 뒤엔 일상적인 국가 폭력이 자행되는 공간이었다. 1910년 그날 부동산 매매하듯 나라를 넘기는 도장을 찍었다는 통감관저 터와 중앙정보부 건물 여러 채를 두루 돌아보았다.

내가 처음 남산에 간 것은 남자친구와 함께 자물쇠를 달기 위해서였다(요즘 젊은이들은 변치 않는 사랑을 약속하는 의미에서 남산 전망대 울타리에 자물쇠를 채운 뒤 열쇠를 버리곤 한다-편집자). 하지만 두 분의 설명을 들으며, 남산 데이트의 추억은 나라 잃은 분노와 인권 말살의 공포로 변하고 있었다. 우리는 빗속에서 고기 ‘육’자라는 6국과 중앙정보부가 처음 들어섰다는 둔덕 위, 본관, 지하고문실 들머리를 차례로 살펴보았다.

“고등학교 때 근현대사, 특히 현대사를 상대적으로 적게 배운 것 같다. 우리 역사의 중요한 공간이 우리 주변에 이렇게 가깝게 있을 줄은 몰랐다.” 동행한 친구가 말했다. 나 또한 남산에 중요한 역사가 숨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내 발밑의 땅이 남산이라는 것이 새삼 경이로웠다.

마지막으로 악명 높은 고문 장소였다던 제5별관으로 향했다. 별관은 반드시 터널을 지나야 했다. 이동하는 사람들의 발소리와 대화로 터널 안은 웅성거림으로 가득 찼다. “이건 여기서 고통받은 사람들의 비명 소리야.” 서 교수의 한 마디에 소름이 돋았다.

외면해왔던 과거를 여는 열쇠 찾았으면

“간첩이 줄어들던 시절에는 어부가 물때를 아는 것을 국가기밀 누설이라고 몰고, 해병대는 뭐하는 곳이냐는 평범한 아줌마의 질문을 군사기밀 수집이라고 죄를 씌워 간첩으로 잡아다 고문했습니다.” 5국 앞에서 한홍구 교수의 설명을 듣는 동안 빗발이 유난히 거세어졌다. 급히 이야기를 끝내고 밥을 먹기 위해 유스호스텔로 향하는 터널에서 남자친구와 이곳을 다시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남자친구는 얼마 전 박정희 전 대통령 사진을 싸이월드에 올려놓았다. 멋있어서 올린 것이라고 했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해 그는 “독재·고문을 했던 것은 분명 나쁜 짓이지만 나라를 성장시켰으니 잘했다”며 “우리나라가 후진국이었으니 박정희 그에게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이 왠지 거슬렸지만 그때는 딱히 대꾸를 할 수 없었다. 이제는 좀 다른 얘기를 해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남산에 처음 올라 채우고 온 자물쇠는 남산의 역사에 대한 우리 세대의 무관심이 채운 자물쇠는 아니었을까. 이다음에 남산을 찾았을 때는 우리가 외면해온 과거를 여는 열쇠도 찾을 수 있었으면 한다. 바람이 불자 빗물에 젖은 소나무가 무거운 어깨를 털어내고 있었다.

최유리 한신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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