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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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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군사독재 흔적 오롯한 ‘역사 창고’


남산 역사신탁운동을 시작하며…
역사 보존한다며 한일 강제병합·중앙정보부 공포정치 현장 철거는 있을 수 없는 일
등록 2009-09-10 18:00 수정 2020-05-03 04:25
‘남산을 평화공원으로’(774호 표지이야기)‘남산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776호 특집)를 통해 일본 통감관저 터 복원 및 옛 중앙정보부 건물 보존 필요성을 강조하고 이와 관련된 시민사회의 움직임을 소개한 바 있다. 이 연장선상에서 ‘돌아온 산, 남산’이라는 제목의 기획 연재를 시작한다. 연재는 남산의 역사와 문화는 물론 국내외 역사신탁 사례, 전문가 기고, 심포지엄 등을 포괄할 예정이다. 연재의 총론격으로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가 보내온 첫 글을 싣는다. 편집자.
남산 일대 중앙정보부·안기부 건물들과 통감관저 터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남산 일대 중앙정보부·안기부 건물들과 통감관저 터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높이 262m. 아주 낮은 산이지만 남산은 참 특별한 산이다. 우리의 험난한 역사를 온몸에 새기고 있는 곳이 바로 남산이다. 지금 팔각정이 있는 자리 부근에는 국사당이 있었다. 나라에서 봄·가을로 두 번 이곳에서 제사를 모셨는데, 점차 세월이 흐르면서 민중이 자신들의 복과 바람을 비는 곳이 되어버렸다. 그 국사당은 지금 남산에 없다. 일제가 1925년 남산에 조선신궁을 지으며 자기네 신을 굽어보는 높은 곳에 국사당을 둘 수 없다는 이유로 인왕산으로 옮겨버렸기 때문이다. 꼭대기에서 발끝까지 상처 입은 산, 남산이 입을 열면 우리 민족의 수난사가 나온다. 옛날 서울의 사대부집에는 ‘수여남산’(壽如南山)이라 쓴 현판을 사랑이나 대청에 많이 걸었다고 한다. 이런 현판에 담은 마음이 어찌 개인의 장수만을 빈 것이겠는가. 나라의 명운이 위태로워지던 한말에 우리 모두 남산 위의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하기를 빌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남산을 빼앗겼다. 나라를 빼앗겼는데, 남산인들 온전했을까? 아니, 남산의 통감관저에서 데라우치와 이완용이 1910년 8월22일 강제 병합조약에 도장을 찍었다. 남산은 곧 경술국치의 현장이었다. 그날 밤 데라우치는 400여 년 전 임진왜란 당시 조선 침략에 앞장섰던 “고바야카와, 가토, 고니시가 이 세상에 있다면 이 밤의 저 달을 어떤 눈으로 볼까나”라고 읊었다. 총독부의 2인자인 정무총감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지하에서 깨워 펄럭이는 일장기를 보여주라는 시로 화답했다. 남산부터 상처를 입었던 것이다.

민족의 명산이 일본의 침략 교두보로

일본은 조선을 남산부터 먹어들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일본식 성을 쌓았다고 해서 ‘왜성대’라 이름 붙인 곳에 일본공사관을 짓고, 이곳(현재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일대)을 다시 통감부로 삼고, 1925년 경복궁 앞에 새 건물을 짓고 옮겨갈 때까지 남산의 북쪽 예장동 자락은 일제 통치의 중심부였다. 남산의 서남쪽에는 일본군사령부가 들어섰고, 필동 쪽으로는 헌병대가 자리를 잡았다. 후암동부터 남산 자락을 빙 돌아 필동·장충동까지 일본인 거주지가 형성됐다. 일제는 장충단 위쪽 지금의 신라호텔 자리에 ‘박문사’라는 절을 세웠다. 안중근 의사의 총에 맞아 죽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절이었다. 장충단이 어떤 곳인가? 을미사변 당시 온몸으로 일본 낭인들을 막다 희생된 홍계훈 등 조선의 충신들을 기리던 곳이다. 일제는 그 장충단을 내려다보는 곳에 이토의 보리사를 세웠고, 얼마 뒤에는 상해사변 당시 침략의 선봉에 섰던 육탄 3용사의 동상을 세워버렸다. 조선신궁, 경성신사, 러일전쟁 당시의 사령관으로 군신으로 떠받들어진 노기의 신사, 그리고 지금의 해방촌에 있는 호국신사 등 우리 마음의 고향 남산에는 일본 귀신들이 우글거리게 되었다.

해방 뒤 남산은 잠시 우리 품으로 돌아오는 듯했으나, 권력자들은 남산을 그냥 두지 않았다. 이승만은 남산에 자기 동상을 세웠지만, 겨우 5년 만에 4월 혁명이 일어나 동상은 땅에 나뒹굴었다. 일본은 조선인들이 훼손할까 두려워 이토 히로부미의 동상을 세울 엄두를 내지는 못했지만, 통감관저 터에 러일전쟁 무렵 장장 8년간 조선공사를 지내며 강제 병합의 길을 닦은 하야시 곤스케의 동상을 1936년 그가 아직 살아 있을 때 세웠다. 그 동상도 해방이 되면서 허물어졌으니 남산은 살아 있는 자의 동상을 용납하지 않았다.

1961년 5·16 군사반란 직후, 반란 세력은 김종필을 책임자로 해서 중앙정보부를 창설했다. 김종필은 자신은 최고위원이 되기 위해 ‘혁명’을 한 것이 아니라 중앙정보부장이 되기 위해 ‘혁명’을 했다고 공언할 만큼 중앙정보부장 자리에 애착을 가졌다. “혁명 과업 수행의 장애를 제거”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는 중앙정보부는 처음부터 막강한 권한을 휘둘렀다. 중앙정보부가 들어서면서 남산은 다시금 민중에게 곁을 주지 않았다. 아니, 남산은 공포의 대명사가 되었다. 운동권이 아닌 일반 시민 중에도 지금까지 국정원이 ‘나를 감시하고 도청하고 미행하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피해망상을 가진 사람이 많이 있는 것을 보면, 이것이 한국형 정신병의 대표적인 특징인 것을 보면 중앙정보부·안기부가 우리 현대사에 드리운 어둠의 깊이를 짐작해볼 수 있다.

중앙정보부가 군대 퀸셋 막사 몇 개에서 처음 시작한 자리는 바로 경술국치 현장인 통감관저 바로 뒤의 언덕이었다. 1972년 중앙정보부 남산본부(현재 서울유스호스텔 건물)가 들어선 곳은 그 옆이다. 땅에도 운명이 있는 것인가? 20세기 전반기 우리 역사에 가장 큰 상처를 남긴 경술국치의 현장이 20세기 후반 우리 역사의 가장 어두운 시기 고문과 공작과 사찰의 본산인 중앙정보부 자리와 맞닿아 있다. 통감부의 고문정치(顧問政治)는 중앙정보부·안기부의 고문정치(拷問政治)로 이어진 것이다.

우리는 흔히 해방 뒤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것이 군사독재를 낳았다고 말하지만, 제국주의 침략이 군사독재와 이렇게 맞닿아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서슬 푸른 중앙정보부·안기부가 버티고 있었기에 우리는 남산에 다가갈 수 없었고, 경술국치의 현장은 그렇게 내버려져 있었다. 제국주의 침략의 죄업 위에 군사독재의 죄업이 겹겹이 쌓이는 동안 우리는 나라를 빼앗겼고, 남산을 빼앗겼고, 민주주의를 빼앗겼고, 기억을 빼앗겼다. 우리의 찬란한 금속활자 문화를 꽃피웠던 주자소(鑄字所)가 있던 흔적은 중앙정보부 면회소로 전락한 주자파출소의 이름에만 처량하게 남아 있었다.

‘역사를 여는 사람들 ㄱ.’ 8월28일 오전 서울 남산 옛 안기부장 공관 자리에서 ‘남산 역사신탁’ 사업 발의식과 기자회견이 열렸다.왼쪽부터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서해성 소설가, 정상덕 원불교 교무, 법안 스님,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 천정배 민주당 의원, 이해동 목사, 정진우 목사, 안상운 변호사. 사진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역사를 여는 사람들 ㄱ.’ 8월28일 오전 서울 남산 옛 안기부장 공관 자리에서 ‘남산 역사신탁’ 사업 발의식과 기자회견이 열렸다.왼쪽부터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서해성 소설가, 정상덕 원불교 교무, 법안 스님,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 천정배 민주당 의원, 이해동 목사, 정진우 목사, 안상운 변호사. 사진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경술국치 현장 뒤 언덕서 중앙정보부 창설

1995년 안기부가 서울 내곡동으로 이전하면서 우리는 다시 남산에 말을 걸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남산은 공포의 남산이 아니다. 돌아온 남산을 어떻게 활용할까를 놓고 여러 가지 좋은 안이 나왔지만, 서울시는 이곳을 유스호스텔로 만들어버렸다. 그곳에 몸을 누이면 수많은 사람들의 비명과 신음이 들려오지 않을까? 기억을 완전히 지워버린다면 모를까, 과연 저기서 잠이 올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시는 2009년 3월 ‘남산 르네상스 마스터플랜’을 발표했다. 이 계획은 남산의 생태 및 산자락 복원, 역사 복원, 경관 개선 등을 통해 시민에게 남산을 일상 속 공간으로 되돌려준다는 내용을 핵심으로 한다. 취지야 나무랄 바 없이 좋다. 그런데 예장동 자락에 대한 내용은 대단히 문제가 많다. 역사를 복원한다는 것이 계획의 목표에 들어가 있건만, 현재 남산에 남은 역사 유적 중에서 가장 중요한 안기부 건물들을 모두 헐어버린다는 것이다. 현재 서울시 균형발전본부가 들어 있는 옛 중앙정보부 6국 건물은 당장 오는 9월부터 철거한다고 한다.

‘역사를 여는 사람들 ㄱ’(이하 ‘ㄱ’)은 이런 시급한 상황 때문에 발기됐다(‘ㄱ’은 처음·으뜸이란 뜻이기도 하고 ‘기억’을 의미하기도 한다). 누구보다도 지선 스님, 문정현 신부, 법안 스님, 정진우 목사, 정상덕 교무 등 종교인들이 죄는 용서할 수 있지만, 죄의 흔적을 지워버려서는 안 된다는 뜻에서 중앙정보부·안기부 건물의 보존을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이해동 목사나 강만길 교수처럼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은 분도 있고,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처럼 안기부에 근무했던 분도 있고, 박원순·김형태 변호사처럼 인권변호사로 변론을 위해 안기부를 드나들었던 분도 있다.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적 차이를 떠나 한번 훼손되면 돌이킬 길 없는 역사 유적을 지키자는 데 뜻을 같이한 사람들이 급하게 모인 것이다.

‘ㄱ’은 우선 서울시와 협의해 남산 르네상스 마스터플랜이 역사 복원이라는 취지에 맞게 진행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남산에서 가장 중요한 유적인 안기부 건물을 헐어버리고서 역사를 복원한다고 표방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서울시도 열린 자세를 보일 것이라 생각한다. 중앙정보부·안기부 건물은 여러 채가 남아 있는데 ‘ㄱ’은 그중 중앙정보부 △남산 본관(현 서울유스호스텔) △지하취조실(현 서울유스호스텔 앞 서울종합방재센터) △수사국과 터널(현 서울시청 별관) △6국(현 서울시균형발전본부) 등 4개소는 반드시 보존해야 하며, 이 건물들의 영구 보존을 위해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해줄 것을 관계 당국에 요청할 것이다.

또한 ‘ㄱ’은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2010년 8월29일을 목표로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인 통감관저를 복원하는 사업을 진행할 것이다. 이 사업을 위해 ‘ㄱ’은 이 공간이 개발·용도 변경 등으로 훼손되는 일을 막기 위해서 기금을 모아 매입(보존·복원)한 뒤 역사적으로 공공화해 후대로 전승하는 역사신탁 사업을 전개하려고 한다. 이 작업은 우리가 과거를 사서 미래를 여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아우슈비츠 철거하고 표석만 세운다면?

부끄러운 역사일수록 함부로 지워서는 안 된다. 1995년 조선총독부 건물의 졸속 철거는 두고두고 가슴 아픈 일이다. 경복궁을 가로막고 지은 일제의 뜻을 알기에 건물을 헐 수도 있다. 그러나 헐 때 헐더라도 좀더 의미 있게 헐 수는 없었을까? 각 분야의 일제 잔재를 청산하는 계획을 세워 하나하나 그 성과를 집약하면서 헐 수도 있었을 것이고, 아니면 서울에서 열리게 될 남북 정상회담의 최고 이벤트로서 남과 북의 정상이 같이 일제 잔재의 상징인 총독부 건물을 해체하는 첫 망치질을 같이 할 수도 있었을 것 아닌가? 비용이 들더라도 총독부 건물을 이전할 수도 있었을 터인데, 박물관으로 쓰이던 건물을 유물 이전 계획도 제대로 세우지 않고 덮어놓고 헐어버린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역사 교육에서 현장성은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힘을 지닌다. 만일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건물들을 모두 철거해버리고 표석이나 하나 세워두고 나무를 심었다면 그곳을 찾는 사람들이 역사의 무게를 온전히 느낄 수 있을까? 히로시마의 원폭 돔을 철거하고 기념관을 새로 멋있게 짓는다고 한들 앙상하게 남은 철골 구조물이 전하는 진한 감동을 어떻게 따라갈 수 있겠는가? 대지의 기억은 한번 훼손돼버리면 돌이킬 수 없다. 대지의 공공성에는 생동하는 역사와 문화가 살아 있어야만 한다.

필자는 2004년부터 만 3년간 국정원 과거사위원회 위원으로 일하면서 중앙정보부·안기부의 역사를 살필 기회를 가졌다. 위원회의 기본 사명은 중앙정보부·안기부가 행한 인권침해와 권력남용을 조사하는 것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이 기관들이 현대사에서 수행한 또 다른 역할을 조금이나마 들여다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개발독재 시기 중앙정보부와 안기부는 ‘정부 안의 정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국 현대사의 큰 특징은 식민지와 분단을 겪은 한국이 전쟁의 참화를 딛고 일어나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룩했다는 점이다. 이곳 남산은 민주화의 주체 세력과 산업화의 주도 세력이 불꽃 튀게 만난 곳이다. 게다가 경술국치가 맺어진 곳이 바로 남산이다. 이곳 남산처럼 20세기 100년의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곳은 다시 찾기 어렵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우리가 살아온 내력을 차근차근 들려주기에 가장 좋은 곳이 남산이다. 현대사의 고난과 성취가 이렇게 한곳에 어우러진 곳은 여기 말고는 찾기 어렵다.

‘ㄱ’은 통감관저를 복원해 가슴 아픈 역사를 교육하는 현장으로 삼으면서, 그 옆의 안기부 건물들을 아시아 인권평화센터로 활용할 것을 제안한다. 아시아의 모든 나라가 제국주의 침략을 겪었고, 개발독재로 심한 몸살을 앓았거나 앓고 있다. 한국은 큰 희생을 치렀고 아직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지만, 다른 아시아 국가에 비해 빨리 빈곤에서 탈출했다. 독재의 본산으로 고문 등 인권침해가 자행되던 공간이 내일의 인권과 평화를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한다면, 그 자체가 고문 등 피해를 당한 사람들에게 치유의 계기가 될 뿐 아니라 아시아 국가들의 인권과 민주화를 향한 중대한 메시지가 될 것이다.

산업화·민주화 동시 이룬 ‘한류’의 상징으로

한류가 왜 드라마나 대중가요에서만 나와야 하는가?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달성한 우리의 경험은 이 두 과제를 위해 분투하는 다른 나라에 중요한 선례가 될 것이다. 현대사의 상처를 보듬고 우뚝 선 남산은 인권과 민주화와 산업화에서의 한류를 창출하는 생산 현장이 될 것이다. 우리는 상처받은 남산의 회복을 통해 미래를 후대에게 신탁하려 한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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