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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OTL-숨은 인권 찾기] 집에서 내쫓기지 않을 권리

등록 2008-08-15 00:00 수정 2020-05-03 04:25

▣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인권 OTL-숨은 인권 찾기⑮]

몇 년 전 살던 집에서 ‘쫓겨난’ 적이 있다. 당시 집주인은 집을 크게 수리하려는데 기간이 오래 걸릴 듯하니 아예 이사를 가라고 전화를 했다. 이사 다니는 데에 질린 나는 그냥 살기로 마음을 정하고 공사 기간 동안 친구 집에서 지내고 다시 살겠다고 전화를 했다. 그러나 집주인은 막무가내로 보증금을 빼줄 테니 이사를 가라는 말만 했다. 그러던 가운데 집에 도둑이 드는 일이 생기고 똑같은 얘기를 전화로 반복하는 것도 귀찮아진 나는 살던 집에서 나왔다. 임대차 계약 기간은 남아 있었지만 나는 당시에 임대차보호법이라는 것이 있는지도 몰랐다. 이제 임대차보호법이 있다는 것은 알게 됐으나 그 법이 아무 도움이 안 됐을 거라는 판단까지 드니 차라리 다행일까.
법률상으로 계약 기간 2년 동안 거주할 권리는 인정된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세입자들은 대개 ‘합의’를 내세운 이사비용 약간을 받고 쫓겨나게 된다. 나처럼 아무런 정보도 없이 미련하게 쫓겨난 세입자도 억울하지만 적당히 돈을 받고 쫓겨난 사람들도 속상하기는 마찬가지다. 계약을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다. 집주인은 계약 기간이 끝나기 한 달 전까지 나가라거나 돈을 더 내라거나 그대로 살라는 통지를 할 수 있다. 세입자 역시 말은 할 수 있다. 나가겠다거나 돈을 덜 받으라거나 그대로 살겠다거나. 그러나 권력은 집주인에게 있다. 집은 없으면 그만, 혹은 없어도 불편한 대로 지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선 집이 꼭 필요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살 만한 집에 살 권리가 있다는 원칙이 벌써 60년 전에 세계인권선언을 통해 보편적인 약속으로 자리잡았다.
인권은 사람이라는 이유 말고 아무것도 묻지 않는 권리다. 그러나 주거권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람이라는 이유 따위는 재산이라는 이유 앞에서 아무 힘도 쓰지 못한다. “집은 소유가 아니라 거주”라는 공익광고는 얼마나 무안한가. 가난할수록 ‘내 집 마련의 꿈’은 절박하다. 집을 소유함으로써 어떤 수익이 발생하기를 기대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만큼 자주 쫓겨나고 주거비 때문에 허리가 휘고 그러면서도 장마철이면 비 새고 겨울에는 외풍이 드는 집에 살아야 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살 만한 집에 살 권리의 내용은 누구나 안다. 집을 구할 때 따져보는 모든 것들, 그중에 기대수익만 빼면 그것이 유엔사회권위원회에서 정리한 주거권의 내용이다. 거기에는 당연히 부담할 만한 비용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내 발로 나가기 전에는 쫓겨나지 않아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이제 ‘내 집 마련의 꿈’에 자리를 찾아주자. 소유에 대한 욕망으로 탈바꿈해 질타당하거나, ‘능력’으로 칭송받으며 부동산 시장을 떠돌다가 오히려 스스로를 밀어내는 그 꿈에 ‘주거권 실현’이라는 제 옷을 입혀주자.
못된 집주인들이 문제가 아니다. 집주인들이 언제든 못되게 굴 수 있는 구조가 문제다. 임대료를 통제하거나 보조하거나 임대 기간에 대한 우선권을 세입자에게 주는 정책들은 없어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니까 못하는 거다. 2년마다 이사 다니는 것이 예외적인 현상이 되기는커녕 당연하게 여겨지는 지금, 더 늦기 전에 ‘인권침해’ 경고카드를 날려야 한다. 일부 유럽 국가들은 국민이 정부를 상대로 살 만한 집을 내놓으라고 청구할 수 있는 권리까지 법으로 만들고 있다. 가랑이 찢어질까봐 당장 따라하라는 얘기는 참지만, 살고 있는 집에서 내쫓기지 않을 권리는 보장해야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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